괴물들이 사는 나라 -- 나의 화는 어떻게 다스릴까?
‘아버님, 어제는 로아가 아주 많이 웃겼어요.’
‘무슨 일이었는데?’
‘어제 아침에 토라져서 수현이나 저한테 상대를 안 하더라고요.’
‘15개월도 안 된 로아가 벌써 그런 반응을 할 줄도 알아?’
‘글쎄 말이에요.’
‘자꾸 궁금해지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로아와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궁금해 견디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는 현아다.
‘어제 새벽인데요. 로아가 어둠 속에서 혼자 뒹굴뒹굴하는 소리가 잠결에 느껴지더라고요. 시간을 보니 새벽 5시밖에 안 돼서 ‘저러다 그냥 더 자겠지’하고 모르는 체하고 계속 잠을 잤거든요.’
‘그런데?’
‘로아는 이미 잠이 깬 상태였는가 봐요. 어둡기도 하고 혼자서 심심했는지 저희 침대로 올라와서는 수현이와 저를 차례로 깨우다 반응이 없으니까 다시 자기 침대로 내려가서는 저희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에요.’
‘로아가 아주 속상했겠는걸.’
‘맞아요. 저희가 일어나서 불을 켜고 반갑게 인사하고 안아주려고 다가갔더니, 몸을 획 돌리고 외면하더라고요. 처음 보는 그 반응이 얼마나 귀엽고 신기했는지 저희 둘 다 크게 웃었어요.’
‘엄마 아빠 입장에서는 웃을 만했지만, 로아는 더 속상했겠는데?’
‘그랬나 봐요. 저희 웃음소리를 자기를 놀리는 걸로 생각했는지, 침대에 얼굴을 묻고는 서럽게 한참을 울더라고요. 아차, 싶었죠.’
로아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로아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지? 24개월까지의 아기들은 ‘암묵기억’이라 해서 매일 반복되는 일이나 엄마 아빠처럼 매일 보는 얼굴은 기억해도 의식적인 기억은 아직 형성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어쨌든, 로아는 속상해서 그런 행동을 했겠지만, 엄마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듣고 할아버지도 많이 웃으면서도 신기했단다. 로아가 벌써 자기의 감정을 의식적인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말이야. 그동안 배고프면 울고, 잠이 오면 투정하고, 엄마를 보면 떼를 쓰곤 하던 로아의 행동이 애착형성을 위한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면, 로아가 보여준 토라짐과 고의 외면은 의식적인 행동이어서 엄마나 아빠가 로아를 보고 신기해서 웃었던 이유가 되겠구나.
엄마 아빠가 반응해주지 않아서 로아가 느꼈던 속상함과 토라짐의 감정은 로아가 커가면서 점점 더 자주 나타나고 있더구나. 로아가 원하는 것을 어른들이 들어주지 않거나, 로아가 장난감을 갖고 놀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마다 큰 소리를 내뱉어 감정을 표현하곤 해.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오시면 기다렸다는 듯 더러는 뒤로 벌렁 드러누워 보다 적극적으로 몸짓과 표정, 소리로 자신의 속상하고 불편한 감정을 알리기도 하고.
할아버지에게는 여전히 귀엽게 보이는 로아의 이러한 불편함이나 속상함의 감정은 로아가 커가면서 점점 더 커질 것이란다. 자기 생각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자기감정을 더욱 중시하게 되면서 엄마 아빠나 친구들과 의견 대립도 잦아지고 그래서 감정 상하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지. 모든 것이 자기 생각대로 혹은 자신의 감정대로 되지 않는다는 점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러니 로아가 성장하면서 때때로 마음에 일어나는 불편함이나 속상함, 그리고 화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앞으로 로아가 감당해야 할 과제가 된단다.
할아버지의 경험에 의하면, 과거와 비교하면 요즈음 사람들에게 짜증은 많아지고 인내심은 줄었다는 생각이든단다. 세상은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해 더더욱 발전하고 편리해지고 문명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존중의 감정보다는 짜증과 화의 감정을 쉽게 표출하는 것은 아닌지 싶다. 근래 들어서만 분노조절 장애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일들이 자주 언론에 보도되는 것만 봐도 그렇단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든다는 과학기술도 원인이 되고 있어.
어른이든 아이든 요즈음 소통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소셜미디어를 예로 들어보자. 소셜미디어가 기존 아날로그 소통방식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신속성과 익명성인데, 이 신속성과 익명성에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많이 부족하단다. 예전에 직접 만나거나 혹은 편지(요즈음의 이메일도)나 전화로 상대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는 자신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상대방의 처지에서 여러 번 고민한 뒤 만나거나 편지를 보내고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단다. 반면, 요즈음에는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상대의 입장에 대한 배려 없이 즉각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방적으로 통보하거나 익명으로 즉흥적인 답글을 다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단다.
할아버지가 가르치는 대학생들을 보면 이런 현상이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더구나. 할아버지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몇 번 당혹스러운 일을 겪은 뒤로는 학생들에게 할아버지 스마트폰 번호를 공개하지 않는단다. 대신, 질문하거나 상의할 일이 있으면 이메일로 보내거나 직접 연구실로 찾아오도록 하지. 이메일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혹은 연구실로 찾아오는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스스로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할 기회를 주기 위한 교육적인 장치인 셈이야. 학생들 입장에서 처음에는 불편했겠지만, 지금은 이런 옛 방식으로도 할아버지와 학생들 간에 소통이 잘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보면 소셜미디어의 편리함과 신속성에의 의존은 습관의 문제로 보인단다.
소셜미디어의 익명성은 신속성보다도 상대에 대해 본인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표출을 더욱 부추긴단다.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드러나는 상황에서는 표현이나 감정표출에서 일정 부분 자제하지만, 익명성이 보장되는 환경에서는 자신의 거친 감정과 험악한 표현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상대에게 상처를 주곤 하지. 근래에 몇몇 유명 연예인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드러났단다. 익명성 뒤에 숨어 저지르는 이런 일은 10대와 어린이들 사이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할 가능성이 크단다. 공부와 성적에 대한 과중한 부담이나 또래와의 경쟁과 비교, 혹은 따돌림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쉽게 노출되지만, 이러한 스트레스를 슬기롭게 해소할 만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성숙한 가치관과 의식을 아직은 갖추지 못했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나 표현 능력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지.
마음에 일어나는 화란 자기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적지 않게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그 어는 감정보다도 화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의해 개개인의 삶과 인격뿐만 아니라 주변에 미치는 영향이 크단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의 감정 중 화의 감정 다스림을 무엇보다도 중시해 왔단다. ‘스스로 화를 다스리는 사람이 싸움터의 어떤 장수보다도 가장 용감한 전사’라고 중국의 사상가인 노자도 말했던 것처럼, 화란 일단 마음에 생기게 되면 조절하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화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고 화가 생기면 폭발하지 않도록 잘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지만, 화를 무조건 억누르는 것만이 화를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즐겨 읽던 틱낫한 스님이 쓴 화에 관한 책에서 스님은 화, 즉 분노를 연꽃밭 진흙으로 비유하셨더구나. 우리 마음에 일단 분노가 일면, 진흙에 발이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극복하기가 어렵지만, 고상하고 멋진 연꽃을 진흙이 피워내듯 분노의 감정도 잘 활용하면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화의 감정을 활용하는 것일까? 모리스 센닥(Maurice Sendak)의 동화 <괴물들이 사는 나라 Where the Wild Things Are>를 통해서 활용하는 방법을 살펴보자꾸나. 먼저 이 동화의 스토리텔링이야.
옛날 옛적에 맥스라는 남자아이가 있었어. 평소에 장난기가 많던 맥스는 어느 날 늑대 복장을 하고 집안을 마구 돌아다니면서 장난을 쳐댔지. 포크를 손에 들고 강아지를 뒤쫓으며 겁주기도 하고. 이를 본 엄마가 ‘이 괴물 녀석!’이라고 부르자, 맥스도 지지 않고 ‘그럼, 난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라고 대꾸했구나. 엄마는 저녁밥도 안 주고 맥스를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벌을 내렸지.
엄마한테 혼이 나고 저녁도 못 먹은 맥스는 화가 많이 났단다. 그런데, 맥스의 방 안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 갑자기 풀과 나무가 자라더니 금방 숲으로 변했고 이제 맥스의 방은 그 자체로 온 세상이 되었어. 여기에 바다가 나타나자 맥스는 맥스호라는 보트를 타고 밤새 항해를 했지. 하루가 지나고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 그리곤 꼬박 일 년쯤 항해한 후에 괴물들이 사는 어느 섬에 도달했지. 사납게 생긴 괴물들은 맥스를 보자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며 괴성을 지르고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는 맥스를 위협했어.
용감한 맥스는 눈 하나 깜짝도 하지 않고 괴물들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조용히 해!”라고 명령하자 괴물들은 오히려 맥스가 두려워졌고 맥스의 명령대로 잠잠해졌지. 곧 괴물나라의 왕이 된 맥스는 ‘괴물소동’ 놀이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겁게 지냈어. 그런데, 곧 괴물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재미가 없어져서 맥스는 저녁도 안 먹이고 괴물들을 잠자리로 쫓아 버렸어. 그때, 아주 먼 곳으로부터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왔고 맥스는 왕 노릇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고 싶어 졌단다.
자기들과 계속 함께 지내자는 괴물들의 요청에도 맥스는 보트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마침내 그리운 집에 도착했어. 자기 방에 들어가 보니 저녁밥이 맥스를 기다리고 있었지. 저녁밥은 아직도 따뜻했어.
로아야,
오늘 로아는 할아버지와 이 그림책만 세 번 보았단다. 글씨보다는 그림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멋진 그림책인 만큼, 로아는 이 세 번 모두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집중했지. 괴물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무서워서 할아버지 품에 꼭 안기기도 했어. 맥스란 아이 멋지지 않아? 엄마한테 꾸중 듣고 벌로 저녁밥도 없이 자기 방으로 올려 보내지긴 했지만, 상상을 통해 아주 먼 곳으로 항해하고 무서운 괴물들이 사는 섬에서 왕 노릇을 하니 말이야.
맥스의 방이 갑자기 숲으로 변한다거나 바다로 먼 항해를 떠나고 도착한 섬에서 무서운 괴물들을 만나는 건 모두 맥스가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란다. 이 사납고 무섭고 못생긴 괴물들은 사실은 맥스의 화가 난 마음의 모습인 것이야. 맥스가 이 괴물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명령하고 왕이 된다는 것은 맥스 마음에 생긴 분노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
사실은 할아버지도 어려서 친구들과 다투거나 어른들한테 꾸중 듣게 되면, 속도 많이 상하고 화도 나고 했단다. 싸움을 잘하지 못했거든. 이럴 때면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힘이 세고 용감한 사람이 되어 평소 못되게 굴던 힘이 센 친구들에게 복수하거나 나쁜 사람들을 물리치는 상상을 하곤 했지. 이런 상상력은 맥스처럼 어려서의 이 할아버지도 속상하고 화난 감정을 상상 속에서 스스로 해소하는 방법이었던 셈이지.
이 동화책이 2012년도 미국 ‘스쿨 라이브러리 저널’에서 ‘어린이를 위한 최고의 그림책’에 선정되었고 만화영화로도 만들어진 것을 보면, 아주 실감 나고 멋진 그림 덕분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화가 났을 때 맥스처럼 화의 감정을 스스로 활용하는 방법을 맥스가 보여주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화가 난 마음을 활용하는 것이 남을 위한 것일 수도, 자신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로아는 화난 감정을 본인을 위해 활용하는 법을 먼저 배웠으면 한다. 맥스가 화난 감정을 상상력 에너지로 바꿔 멋진 여행을 하면서 화가 해소되어 본래의 맥스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나, 돌아와서는 자기 방에 놓여 있는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을 보고 엄마를 오해했던 사실을 알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점을 깨닫고 엄마를 더욱더 믿고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지. 자신이 먼저 화를 긍정적으로 활용할 줄 알게 되면 남을 위해 활용할 수도 있는 것이야.
어제와 오늘은 할아버지가 로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단다. 카메라를 대기시켜 놓고 이제나 저제나 로아가 할아버지한테 짜증 부리고 땡강 부리기를 기다렸지. 이 글에 넣을 사진이 필요했거든. 그런데? 실패했구나. 로아가 할아버지와 그저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서 그렇단다. 사진을 건지지 못한 할아버지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너무 행복하단다. 할아버지 마음에 로아의 웃는 소리와 모습이 대신 생생하게 찍혀있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