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알드 달(Roald Dahl)의 <마틸다> -- 책은 나의 힘
로아야,
이번 글에도 열두 번째 이야기에 이어 화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단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야. 지난번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에서, 로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엄마 아빠가 상대를 안 해줘서 속상한 마음이었고 로아의 토라진 모습에 잠에서 깨어난 엄마 아빠가 웃는 바람에 로아가 서럽게 울었다고 했지. 그때 로아가 서럽게 울었던 이유는 엄마 아빠의 웃음을 놀림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엄마 아빠는 로아가 생각했던 것처럼 로아를 정말로 놀렸을까, 아님 로아가 오해했던 것일까? 정말로 놀렸다면 로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하지 못한 행동이니 로아가 속상해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데, 놀린 것이 아니라 로아가 보인 토라진 행동이 처음 보는 것이어서 귀엽고 신기했기 때문이라면, 로아의 오해로 인해 속상했던 마음이 생긴 것이지.
그렇단다. 우리를 속상하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것은 대개 상대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거나, 아니면 상대가 실제로 ‘나’에 대해 존중의 마음이나 배려의 마음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란다. 오늘은 이 두 가지에 대해 말해보려고 해.
먼저, 상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화의 감정이야.
지난번 이야기에서 화가 나는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거나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했지? 자신의 감정을 감추거나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 것보다, ‘나 지금 화가 났어,’ ‘나 지금 슬퍼,’ ‘나 지금 속상해’와 같이 상대에게 자신의 기분과 감정과 솔직하게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단다. 그때그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것이 나중에 더 심각한 분노로 커지지 않게 조절하는 현명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남에 의해 생기는 불편한 감정과 짜증, 속상함, 화는 상당 부분 상대의 의도와는 달리 오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야. 로아가 엄마 아빠의 웃음을 오해했듯이 말이야.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다시 소환해 보자.
“엄마가 소리쳤어. ‘이 괴물딱지 같은 녀석!’
맥스도 소리쳤지.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
그래서 엄마는 저녁밥도 안 주고 맥스를 방에 가둬 버렸대.”
이 우리말 번역을 보면 엄마가 어린 맥스를 ‘괴물딱지’라고 ‘소리치고’ 맥스는 그런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거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서 엄마와 맥스는 영락없이 서로에게 화가 난 것으로 보이는구나.
다음은 영어 원서의 표현을 전체 스토리 맥락에 따라 할아버지가 옮겨본 것이야.
“엄마는 맥스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천방지축 장난꾸러기 녀석!’
맥스는 그런 엄마에게 말했다. ‘그럼, 엄마를 잡아먹을 거야.’
그래서 맥스는 저녁밥도 못 먹은 채 자기 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영어 원서 표현에서는 사실 한글 번역서와는 달리 서로에게 화가 났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단다. 엄마가 맥스를 향해 부른 ‘괴물딱지 같은 녀석아’의 영어 표현인 ‘wild thing’은 들짐승과 같이 들여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야. 늑대 복장을 하고 집안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맥스의 모습을 늑대와 같이 길들지 않은 동물에 빗대어 엄마가 훈육 차원에서 그렇게 부른 것은 아닐까?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의 ‘I’ll eat you up’이란 맥스의 대꾸도 어린 맥스가 하고 있던 놀이의 연장선에서 나온 말은 아닐까? 늑대 복장을 한 맥스가 장난으로 ‘나는 늑대다. 늑대인 내가 강아지인 널 잡아먹을 거야’하며 강아지를 쫓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wild thing’이라고 부른 엄마에게로 대상을 돌렸다고 보면 안 될까? 맥스가 집에 돌아가겠다고 하자, ‘오 제발 가지 마. 우리가 널 잡아먹을 거야. 우린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라고 한 괴물들의 애원에서도 ‘널 잡아먹을 거야’란 표현은 화의 감정과는 거리가 있지.
엄마와 맥스가 서로를 향해 ‘소리쳤다’란 표현도 사실은 엄마는 ‘큰 소리로 불렀다 called,’ 맥스는 ‘말했다 said’로 서로에 대한 격한 감정은 별로 묻어있지 않단다. 엄마는 맥스의 말투를 버르장머리 없는 대꾸로 받아들였고 훈육 차원에서 맥스를 자기 방으로 올려 보낸 것으로 보이는데, 맥스의 상상 속에서 ‘wild thing’은 ‘괴물’로 그려지는 것으로 보면, 맥스의 화난 감정은 엄마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단다. 맥스는 엄마가 화가 나서 자기를 그렇게 불렀다고 생각했고 저녁밥도 없이 자기 방으로 올려 보낸 조치에 대해 속상하고 화가 난 것 같지. 적어도 맥스로서는 엄마의 훈육을 자신에 대한 엄마의 화로 생각했던 것 같아.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가 아이한테 주는 엄한 벌이 자기 방에 머물게 하고 외출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것을 ‘그라운드 ground’ 시킨다고 한단다.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 이 그림책이 나온 1960년대 초 미국 사회는 보수적인 사회로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도 엄격한 훈육을 중시했단다. 엄마는 천방지축으로 장난치는 맥스를 훈육 차원에서 자기 방에 그라운드 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번역 책에는 “가둬버렸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엄청나게 화를 내고 심하게 벌주는 엄마로 그려지고 있어.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맥스를 많이 사랑하고 있음이 틀림없단다. 맥스가 괴물나라에서 돌아와 보니 자기 방에 저녁밥이 차려져 있었고 여전히 따뜻한 채로 말이야. 맥스가 잠시 잠든 채로 상상의 세계를 다니는 동안, 저녁밥도 굶은 맥스를 안타깝게 생각한 엄마가 살며시 놓고 가셨을 것 같지 않아? 이것을 보고 맥스도 엄마를 오해했단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고.
엄마의 맥스에 대한 훈육 방식은 이 동화가 출판된 시대의 사회적 관행이었단다. ‘엄마를 잡아먹을 테야’란 맥스의 말이 맥락상 어린아이의 장난기 어린 표현이었음에도, 1963년 <괴물들이 사는 나라> 출간 당시 이 표현 자체가 교육적으로 온당하지 않다고 본 교육학자들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던 것을 보면 시대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지. 1960년대 미국 사회는 실제로 소위 ‘맥카시즘’이라 불리던 대단히 보수적인 시대였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따라 자녀 교육과 훈육에서도 매우 엄격한 예절을 중시했단다. 사실은 시대에 무관하게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자율도 많이 주어지지만, 훈육과 규율 또한 엄격하단다. 로아 아빠 역시 어려서의 미국 생활 속에서 그렇게 성장했어.
자신의 지나친 장난에 대해 엄마가 내린 조치를 맥스가 엄마의 화로 오해했듯이,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거나 친구로부터 핀잔을 듣게 되면 상대가 자신을 미워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생각하곤 한단다. 로아도 앞으로 그런 일을 종종 겪을 테고. 그럴 때마다 맥스의 엄마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따뜻한 밥을 차려다가 잠든 사이에 살며시 방에 놓고 가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면 오해도 풀리고 마음도 따뜻해질 것이야. 더불어, ‘엄마가 나를 그렇게 불러서 나도 화가 나’라고 맥스가 미리 말했다면, 오해로 인한 화의 감정도 생기지 않았을 것 같구나.
오늘 두 번째 하고 싶은 이야기는 상대가 ‘나’를 배려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서 생기는 화의 감정이란다. 이 경우는 오해로 인해 생기는 화의 감정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화의 감정이야. 이러한 상대의 태도는 의도적인 행동이거나, 아니면 의도성은 없어도 시대 사회적 관행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단다. 오해로 생긴 화는 오해가 해소되면서 자연스럽게 풀리지만, 이 경우는 화를 다스리는 일이 참 어려우므로 슬기와 지혜가 많이 필요로 해. 로아가 여자아이란 점과 로아가 살아갈 시대가 감성이 존중받기 어려운 과학기술 시스템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단다.
이 문제를 <마틸다>라는 소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 책은 로아가 적어도 초등학교 3학년은 되어야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 테니, 지금은 줄거리만 짧게 요약해 보마.
영국의 어느 마을에 마틸다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마틸다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책 속에서 상상하는 것을 즐겼다. 마틸다가 책과 가깝게 지낸 이유에는 자신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도 있었다. 중고차 판매점을 부정한 방법으로 운영하는 아버지는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고, 빙고게임에 빠져 있는 엄마는 저녁 늦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어린 딸이 무엇을 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 소질이 있는지 부모는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주 어려서부터 책 읽는데 소질이 있었던 마틸다는 부모의 무관심과 무시에 종종 화가 났지만 그럴수록 책에 더욱 빠져들었고, 부모는 오히려 여자아이가 책에 빠져 지내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며 오히려 못마땅해하고 혼내곤 했다.
학교에 입학하고서는 마틸다는 여자아이로서 더한 무시와 부당한 대우에 직면해야 했다. 바로 트런치불 교장선생님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책잡아서는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벌을 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고, 여자아이에게는 더더욱 조건 없는 순종을 강요했다. 다행히도 하니라는 선생님이 마틸다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고 격려해 주며, 이 재능을 마틸다의 부모와 교장선생님께 이야기하고 재능을 키워줄 방법을 모색하지만, 여자아이라는 이유만으로 믿지도 않을뿐더러 재능 자체를 오히려 못마땅하게 받아들인다.
마틸다는 자신과 친구들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부당한 대우와 처사에 화가 치밀었고 당당하게 맞서기로 마음먹는다. 일주일에 한 시간 교장선생님의 수업 시간, 교장선생님의 자신과 친구들에 대한 학대와 막말, 가혹한 벌에 마틸다의 분노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그 분노가 초능력으로 변해서 교장선생님 탁자에 놓인 컵을 넘어뜨려 옷을 젖게 만들고 화를 이기지 못한 교장선생님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다.
마틸다는 하니선생님으로부터 교장선생님에 대해 놀랄만한 이야기를 듣는다. 교장선생님은 하니선생님의 이모로 하니선생님 아버지의 재산을 탐하여 아버지를 죽게 했고 그 이후로 딸인 하니선생님에게 남겨준 집을 빼앗고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학대해 왔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분개한 마틸다는 교장선생님 수업시간에 분노의 감정을 모아 분필을 원격으로 조정하여 하니선생님으로 들은 이야기를 칠판에 적고, 이를 자신이 죽인 하니선생님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 교장선생님은 혼절하게 되고, 학교와 마을에서 영영 자취를 감춘다.
마틸다의 아버지도 부정하게 차를 팔아온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엄마와 함께 스페인으로 도망치게 되고, 부모와 함께 가기를 거절한 마틸다는 자신을 존중해 주고 재능을 인정해 주는 하니선생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게 된다.
마틸다를 힘들고 화나게 만든 엄마 아빠의 무관심이나 무시, 교장선생님의 어린 학생들에 대한 폭력적이고 무시하는 행동, 특히 이들의 여자아이에 대한 차별적인 생각과 태도는 개인적인 성향과 기질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흔하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할아버지에게는 이 글이 영국의 가정과 사회, 문화의 한 단면을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도 역시 강하게 드는구나. 작가인 로알드 달도 특히 어려서부터 다닌 기숙학교에서 적지 않은 폭력과 불합리한 처벌을 받았고 그때마다 짓궂은 장난으로 복수를 통해 힘든 시간을 견뎌 냈다고 말했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단다.
마틸다 가족의 일상이 된 냉동식품을 데워서 텔레비전 앞에서 시청하면서 먹는 ‘TV 식사’도 그렇지. 마틸다는 온 가족이 저녁식사 시간에 식탁에 모여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엄마 아빠와 오순도순 이야기하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엄마 아빠로부터 핀잔을 듣는 장면은 이 책이 쓰인 1980년대 보통의 영국 가정에서 흔히 있던 광경이란다.
로알드 달은 왜 이런 이야기를 썼을까? 내가 할아버지다 보니 혹시 이 작가도 손주들과 손주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어서 쓴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 자료를 찾아보니 로알드 달이 이 책을 쓸 때는 손주들을 여럿 둔 할아버지였더구나. 이 책에는 할아버지로서의 손주들을 위한 메시지로 보이는 것들이 여럿 있지만, 로아가 여자이다 보니 여기서는 마틸다가 가정과 학교에서 단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 대우받는 점과 마틸다가 이러한 부당한 대우로 인해 생기는 화의 감정을 어떻게 책을 통해 극복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해.
마틸다는 가정과 학교에서 단지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차별적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단다. 2살 때 이미 말을 다 배웠지만, 부모는 어린 여자아이는 자고로 얌전해야지 말을 많이 쫑알대서는 안 된다고 나무란다든지, 부모의 부당한 지시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강요받아. 마틸다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하니선생님이 방과 후 특별 지도를 해주기로 마음먹고 마틸다의 부모님 허락을 받으려 찾아오지만, 딸의 재능이나 미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부모는 오히려 ‘여자애란 자고로 머리가 좋아서는 남자를 얻을 수 없다’느니, ‘여자애란 모름지기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보이나, 그런데 신경을 써야 한다’라는 소리만을 늘어놓아.
교장선생님의 여자아이들에 대한 생각 역시 무시와 편견에 가득하여 있어. 마틸다가 읽기와 수학에서 또래 아이들보다 지적인 능력이 훨씬 뛰어나니 상급반으로 올리자는 하니선생님의 요청에 교장선생님은 실력을 알아볼 생각조차 없이 똑똑한 여자아이에 대해 말썽꾸러기 내지는 문제아로 낙인찍어버렸지.
‘내가 오랜 교사 경험으로 알아낸 사실인데, 못된 여자아이들은 못된 남자애들보다 더 위험해. 더 나쁜 것은, 못된 여자애들은 짓뭉개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거지. 못된 계집애를 짓뭉개기란 금파리를 잡는 것과 비슷해. 망할 놈의 금파리는 철썩 내리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어. 불쾌하고 더러운 것들! 그게 쪼끄만 계집애들이라고.’
영국이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신분 사회였다는 점에서 마틸다와 같이 이러한 제도와 관습에 도전하는 여자 주인공들이 소설에서 자주 등장한단다. 1800년대에 쓰인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대표적이야. 흥미로운 점은 두 작품 속 여주인공 모두 당시 여성들에게 부과된 사회문화적 편견과 차별, 이에 따른 분노의 감정에 굴복하지 않고 자존감을 지닌 채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힘은 독서에서 왔단다. 『제인 에어』의 여주인공 제인은, 마틸다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로서 학교에서 받는 차별적이고 부당한 대우 속에서도 책에서 위안을 찾았고, 성장하면서도 책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기를 수 있었어.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도 어려서부터 독서를 통해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지식을 갖춰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에게 가해오는 편견과 부당함에 과감하게 맞서면서 결국에는 사회적 신분과 제약을 뛰어넘게 된단다.
“어느 가정에서든 다섯 살 먹은 여자아이가 해야 할 임무란 항상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것뿐이었다”라는 『마틸다』의 작가 달의 말처럼, 1980년대 마틸다의 이야기는 여성에 대한 인식과 대우 관점에서 1800년대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구나. 1800년대 남성가부장적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억압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여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당대의 『제인 에어』나 『오만과 편견』과 같은 소설이 200년이 넘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가 되겠구나.
그렇다면, 소설 속 1980년대 영국사회와 로아가 살아가는 2020년대 한국사회는 많은 차이가 있을까?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 성차별에 대한 인식과 대우가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과 대우가 알게 모르게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단다. 영어식 표현을 빌리자면 ‘유리천장’으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올려다보면 저 높은 하늘까지 다 보이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올라가면 투명 유리가 막아서는 것처럼, 성구분에 따른 차별이 사람들의 인식과 제도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유리천장으로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제약이 어려서부터 꾸어온 꿈을 희석하고 잊게 만드는 요인이 된단다. 『연금술사』란 소설로 갑자기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브라질의 파울로 코엘료에게 이 소설의 성공을 질문에 대해, 자신은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다만, 소설 속 주인공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열정을 불사를 특별한 소명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소명을 따르지 못하고 마는데, 어려서부터 사회에서 규정한 편견과 관습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이라는 거야.
“우리는 어려서부터 우리가 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접한다. 이러한 생각에 잡힌 채 우리가 성장하면서 편견과 두려움의 두께도 더불어 두꺼워져만 간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개인적인 소명이 영혼 속에 너무나 깊숙이 묻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시기가 찾아온다.”
그런데, 꿈은 완전히 사라졌을까? “꿈은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코엘료의 대답처럼, 『연금술사』의 주인공인 목동 산티아고가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자 하는 꿈을 갖고 틈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꿈을 키워오면서 실현했던 것처럼, 우리가 어려서부터 꿔온 꿈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뜨고 이를 바탕으로 꿈을 꾸준히 키워가는 것이 중요하단다. 우리가 꿈을 꾸고 책을 가까이한다면 우리를 가로막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힘을 준단다.
로아야,
로아가 커가면서 특히 여자로서 사회적 편견이나 관습으로 인해 화가 나는 일도 분명 겪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로아는 자신의 소명이자 꿈을 어떻게 찾고 기르고 간직해서 실현할 수 있을까? 로아가 크면 스스로 『마틸다』를 읽겠지만, 궁금하니 먼저 물어볼까?
“로아야, 그 점이 궁금해? 내가 엄마 아빠에게 ‘TV 식사’ 대신 식탁에서 먹자고 하면 연속극에 빠진 엄마 아빠는 여자아이가 건방지다, 무식하다, 멍청하다느니 하면서 핀잔을 주기 일쑤였단다. 교장선생님은 더 했어. 말썽꾸러기, 지긋지긋한 문제아, 못된 계집아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부당하게 대하고 화를 내셨지. 그럴 때마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무지하게 화가 났단다. 일단 분노가 일면 너무 속상해서 가라앉히는 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그럴 때마다 기발한 방식으로 부모님이나 교장선생님을 골탕 먹여 복수해보기도 했지만, 화난 감정에 진정한 위로가 되어 주었던 것은 책이었어. 책을 읽으면서 엄마 아빠나 교장선생님이 결코 얻을 수 없는 지식을 배웠고, 그분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떴단다. 로아에게는 좋은 엄마 아빠가 계시니 크게 염려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자로서 커가면서 학교나 사회에서 마주해야 할 도전들이 있을 거야. 로아도 책을 좋아해야 할 이유를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