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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아 할아버지 Jan 26. 2024

<무릎서재> 열다섯 번째 이야기

<빨간 암탉> -- 질문은 나의 힘 2

얼마 전 아빠가 올린 동영상을 보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단다. 놀라서 보고 또 보고 한 자리에서 10번은 반복해서 보았던 것 같아. 로아가 마이크를 잡고서 노래를 부른 영상이었어. ‘곰 세 마리’ 노래였는데, 이제 겨우 말하기 시작한 로아가 노래를 다 기억해서 부르는 게 너무 신기했지. 그 영상에서 할아버지에게 더욱 신기한 것이 있었단다. 로아가 아빠와 소통하는 방식이었어. 아직 노래 가사의 뜻을 알지 못하는 로아였기에 노래 중간에 ‘아기 곰은... ’에서 막혔지. ‘너무 귀여워’ 말이 생각이 안 났던지, 아니면 발음이 어려워서였겠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아기 곰은...’을 3번 연속 반복하면서 아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톤을 바꿔가며 시선과 표정, 목소리 톤 변화로 아빠의 도움을 이끌어내는 거야. 그리곤 노래를 마지막까지 불렀단다. 아빠도 로아의 주도권을 빼앗지 않고 추임새로 반응해 주며 로아가 마지막까지 노래를 이어가도록 배려해 주더구나. 로아가 할아버지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끌어낼 때도 종종 상황에 걸맞은 시선과 표정, 목소리 톤을 동원하곤 했던 일을 떠올리며 상대방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반응을 끌어내는 로아의 소통능력이 기특하다고 생각하고 했단다.


얼마 전 재스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허비 핸콕의 영상을 보게 되었단다. 요즈음 할아버지가 재즈음악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들으면서 종종 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련 영상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지. 피아니스트인 핸콕이 마일스 데이비스 4중주 시절 연주에서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 고백하는 내용이었어. 데이비스가 트럼펫 솔로파트를 몰입하여 연주하는 중에 핸콕은 실수로 피아노 코드를 잘못 눌렀고 이내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패닉 상태에 빠졌다지. 낯선 코드 소리에 데이비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핸콕이 잘못 누른 코드를 마치 맞는 코드처럼 들리도록 라인을 찾아 연주를 이어갔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난 뒤에 핸콕은 당시 자신의 실수를 데이비스는 실수로 생각하지 않고 연주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으로 여겼고 그 상황을 처리하는 것은 밴드 리더였던 자신의 책무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회고하더구나. 영상을 보면서 데이비스가 대처한 유연성은 바로 우리 삶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바로 이점이 할아버지가 요즈음 재즈의 매력에 듬뿍 빠져든 이유이기도 하겠지.



로아가 아빠한테서 자연스럽게 필요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표정과 말투나 아빠가 로아의 주도권을 지켜주면서 로아에게 필요한 도움을 추임새로 제공해 주는 센스, 재즈 4중주 리더로서 팀원의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상적인 상황으로 승화시키는 데이비스의 역량과 리더십, 소통능력이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 로아가 성장하며 살아갈 인공지능 시대에 더 중요하게 갖추어야 할 자질이 될 것이야. 로아가 할아버지와 함께 재즈 음악을 즐기면서 소통에 관해 이야기할 날은 로아가 성장하고도 시간이 좀 지나야 오겠지. 우선은 로아가 좋아할 어린이 동화책을 통해 팀워크와 소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꾸나. 그림 동화 <<빨간 암탉>>이란다. 먼저 이 동화의 무릎 스토리텔링이야.


어느 농장에 빨간 암탉이 있었어. 그 농장에는 고양이와 쥐, 돼지도 함께 살았지. 빨간 암탉은 부지런해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에 나와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구하곤 했어. 하지만, 고양이와 쥐, 돼지는 게을렀고 온종일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잠을 자거나 빨간 암탉이 일하는 것을 지켜만 봤지. 어느 날, 빨간 암탉은 땅 위에 떨어져 있는 밀 이삭을 발견하고는 땅에 심기 위해 동물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하나같이 도움 주는 것을 거절했어. 싹이 돋고 밀이 커가면서 일거리가 많아져 암탉은 도움을 청했지만 역시 거절만 당했단다.
  여름이 끝날쯤, 암탉의 돌봄과 정성으로 무럭무럭 자란 밀을 수확할 시간이 되었지. 이번에도 암탉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 수확을 해서 방앗간에 가져가 밀가루로 만들어 왔어. 맛있는 빵을 만드는 일조차도 동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암탉은 혼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부풀려서 오븐에 넣어 맛있는 빵을 만들었지. 드디어 빵이 다 만들어졌고, “누가 이 빵을 먹는데 도와줄래?”라는 암탉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양이와 쥐, 돼지는 기다렸다는 듯 서로 앞으로 밀치고 나서면서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했지.
   “아니, 너희 도움 필요 없어. 밀알을 심을 때도, 밀을 키울 때도, 밀을 수확할 때도, 빵을 만들 때도, 내 도움 요청에 너희는 싫다고 했잖아. 나 혼자 했으니까 이 빵도 나 혼자 다 먹을 거야.” 그러고는 부스러기도 하나 안 남기고 암탉은 빵을 혼자서 다 먹어버렸단다.


이 동화는 좀 다른 점이 있지? 마지막 장면에서 빨간 암탉이 빵을 나눠 먹지 않고 혼자서 먹는 태도가 좀 낯설지 않아? 대부분 동화에서는 등장인물들 사이에 갈등이 있어도 결말에서는 화해하고 서로 나누는 모습을 생각하면 말이야. 로아는 이 이야기 결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한 결과라고 여길까, 아님, 암탉이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할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짧은 동화가 단순한 스토리라인과는 달리 단순하지 않은 생각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을 알게 될 거야.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꾸나. 하나는 주인공조차도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 이야기가 화해와 협동의 미덕을 중시하는 동화로써 미국에서는 150년 이상을 읽혀온 이유가 무엇일까이고, 다른 하나는 소통의 관점에서 주인공인 빨간 암탉은 다른 동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태도와 방법이 옳았는지 여부란다.


이 스토리는 미국 전래 동화로 1874년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어. 그 후 스토리 속 동물들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내용은 그대로 유지됐단다. 일찍이 디즈니 만화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지금도 어린이 그림 동화로 여전히 출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었던 동화임에 틀림없어. 특히, 미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 관심을 끄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에는 어린이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가치관이 들어있기 때문이겠지.



미국의 가치관과 관련하여 이 스토리에서는 두 가지 주제가 나타난단다. 하나는 근면의 중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립심이야. 빨간 암탉은 매일같이 부지런히 먹이를 구하고 텃밭을 돌보는 등 항상 생산적인 일을 즐겨해. 땅에 떨어진 밀 이삭을 발견하고는 바로 먹지 않고 땅에 심어 더 많은 수확을 올리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야. 땅을 갈아 밀 이삭을 심고, 물을 주어 기르고, 거둬들이고, 밀가루로 만들어 빵을 만드는 각각의 과정에서 정성과 육체노동의 수고스러움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말이지.


빨간 암탉에게서는 근면 못지않게 강한 자립심 역시 보이는구나. 밀을 심고 수확하여 빵을 만드는 이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벅차겠지. 그래서 다른 동물들에게도 같이 일하자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혼자서 감당해 내는 태도와 마음이 자립심이란다. 이 스토리의 원제목이 “Little Red Hen”으로 우리말 번역 “빨간 암탉”에는 빠져 있는 글자가 “Little”이란다. ‘Little’은 체구가 ‘작은’이란 뜻으로 이 암탉의 자립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자신보다 날쌘 고양이나 땅을 잘 파는 쥐, 힘이 센 돼지에게 청한 도움을 거절당했지만, 암탉은 작은 체구임에도 힘에 벅찬 일을 혼자서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해내는 모습에서 강한 자립심이 더 드러나는 것이야. 원제목에 “Little”을 붙인 이유일 텐데, 한글 번역서 제목에서 왜 빠져있는지 아쉬움이 드는구나.


바로 이 근면과 자립심은 미국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유지해 온 기본적인 가치관이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어린아이 때부터 이 가치관을 가정과 학교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배우는 이유이고. 미국 가정에서 어린이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용돈의 대부분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잔디 깎기나 청소와 같은 집안일 도움이란 수고의 대가로 주어진단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익힌 근면과 자립정신은 성인이 되어서도 중요한 덕목으로 지켜지는 것은 당연하지. 전에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이었어.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아파트로 가면서 필요한 것을 몇 가지 사기 위해 학교 근처의 대형식품점에 들르곤 했는데, 자정이 가까운 이 시간대에 장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부에서 지급한 푸드바우처로 식품을 사는 사람들이었단다. 이들은 왜 매장 이용객이 거의 없는 마감 시간에 불편하게 장을 볼까?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식품구입에 정부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그들 스스로 근면과 자립심이란 기본 가치관을 갖지 못해서 떳떳하지 않기 때문이었지.


빨간 암탉이 혼자 애써서 밀 이삭을 심고 키워서 만든 맛있는 빵을 맛있게 먹는 것은 수고의 대가인 것처럼, 자기의 힘으로 혹은 적어도 자기 주도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무슨 일을 성취해 냈을 때 얻는 만족감은 매우 크단다. 빨간 암탉이 자신의 수고의 결과인 빵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게으른 동물들이 빵을 얻어먹지 못하는 것 역시도 당연한 결과라는 점은 근면과 자립심을 중시하는 미국문화에서는 낯선 장면이 아니란다. 

   

근면한 태도와 자립정신은 미국에서 만의 전통적인 가치관으로 국한되지는 않는단다. 특히, 근면한 태도는 지금도 한국 사람들에게서 자주 모범이 찾아지기도 해왔으니까. 로아가 살아갈 인공지능 시대에도 근면과 자립정신은 중요할 것이야. 사람들이 해오던 많은 단순한 일 처리는 훨씬 효율적인 인공지능 툴로 해결될 것이지만,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적지 않을 것이고 자율적이고 주관적인 태도와 사고가 요구될 것이야. 프랑스의 기술철학자인 베르나르 스티글러는 현대인은 삶과 행동 방식에서 지나치게 알고리듬 데이터에 의존한다면서, 이러한 태도를 ‘알고리듬 통치성’에의 종속으로 보더구나. 스스로 생각해 내고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자립적인 생각과 태도 그리고 이에 바탕을 두고 근면한 태도로 일을 대하고 처리해 가는 태도가 바로 이러한 ‘알고리듬 통치성’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한 자질이 될 것이야.


인공지능이 인간이 해오던 영역을 대체해가고 있는 상황에서 근면한 태도와 자립정신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자질이 협력과 공감능력이란다. 요즈음 기업이나 기관에서 기존의 수직적인 직책 시스템을 팀제로 전환하고 있는 이유이지. 인공지능에 자리를 내어주고 인간의 영역으로 남은 일은 혼자만의 독자적인 사고와 관점이 아닌 여러 사람의 통합적인 사고와 관점이 요구되기 때문으로, 여러 사람의 협력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이해, 소통과 공감 능력이 필요하겠지. 여기에는 팀 리더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단다.


이 점에도 빨간 암탉 스토리가 적용될 수 있을 것 같구나. 근면하고 자립정신을 갖춘 빨간 암탉이지만, 밀 이삭을 심고 가꾸고 거두고 빵을 만드는 각 과정에서 다른 동물들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혼자서는 해내기 벅찬 일도 분담했다면 훨씬 수고가 줄어들었을 것이고, 각 단계에서 효율적인 밀 재배에 필요한 아이디어와 방법을 구하는 일도 필요했을 테니까. AI 시대에 우리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듯, 밀을 심고 재배하고 수확하는 과정에서도 다른 동물들과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공유했다면 수고는 덜하면서도 더 풍성한 수확할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된다면 각자에게 돌아가는 수확의 몫도 많아지지 않을까?


사실 팀 프로젝트에서 자주 불거지는 문제가 팀원 간의 공평하지 않은 기여 정도와 수확의 공정한 분배를 두고 벌어진단다.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보면 팀원 간에 의견 차이와 기여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이나 보상에서도 공정성은 불거지게 되지. 이로 인해서 팀원들 사이에 반목과 스트레스가 일기도 하고. 이러한 문제가 흥미롭게도 미국에서는 “빨간 암탉 신드롬”으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이 스토리의 보편성을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지. 이 스토리에서 빨간 암탉은 팀리더이고 다른 동물들은 팀원으로 보자꾸나. 빨간 암탉은 리더로서 밀을 심고 재배하고 수확하는 일에 팀원들에게 참여를 부탁하지만, 팀원인 동물들은 게으름을 피우며 핑계만 대고 전혀 기여를 않다가 빵이 만들어지자 그 결과물에 대한 몫을 요구하는 셈이지. 이 스토리에서 게으른 팀원인 동물들의 빵 요구가 거절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팀의 리더로서 빨간 암탉의 태도에는 전혀 잘못이 없을까? 팀리더의 가장 중요한 일은 팀원들에게 동기를 유발함으로써 함께 성과를 내는 것이라면, 빨간 암탉의 소통 방식에는 잘못된 점은 없을까? 이 질문이 <<빨간 암탉>>에서 제기되는 두 번째 질문이야. 빨간 암탉이 각 단계에서 팀원 동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은 구체성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 빨간 암탉은 구체적으로 자신이 왜 도움이 필요한지 설명하지 않았고, 각 동물의 특성에 맞춰 개별 동물을 상대로 더욱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지. 대신 전체에 대해 ‘지금 밀알을 심을 건데 도와줄래?’ 식으로 요청을 하지. 이런 식으로는 팀원들에게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아. 오히려 각각의 동물은 자신 말고도 더 능력이 많은 다른 동물이 하겠지 하는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이를 ‘방관자 효과’라는 용어로 지칭될 만큼 흔한 현상이야.


“할아버지, ‘알고리듬 통치성’이나 ‘방관자 효과’와 같은 어려운 것을 왜 제게 벌써부터 이야기해 주어요?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어요. 어려운 것은 나중에 제가 크면서 알아도 되잖아요.”



할아버지의 글을 읽으면서 로아가 충분히 던질 수 있는 질문이구나. 그 말도 맞는 말이야. 목표를 설정해 두고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목표 달성에 요구되는 자질을 적지 않게 후천적 노력과 자세로 갖춰가니까.


흥미로운 점은 근면이나 자립정신과 같은 태도와 가치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려서 읽은 스토리북을 통해 익히기도 한단다. 오래전 할아버지가 텍사스에서 공부할 때이지. 미국 대학의 여름방학은 3달 반 정도로 아주 긴데, 농촌 출신 학생들은 대개는 이 기간에 부모님 농장으로 돌아가 일손을 돕는단다. 한 번은 여름방학을 앞두고 수업을 함께 듣던 그 지역 농촌 출신 학생이 방학 동안 무엇하고 보낼 것이냐는 할아버지 질문에 이렇게 말하더구나. “응, 부모님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보낼 거야. <<빨간 암탉>의 고양이나 돼지가 될 수는 없으니까.”


텍사스 농촌 출신 학생이 빨간 암탉 스토리를 꺼낸 것은 어려서 읽은 <<빨간 암탉>>이 너무 감동적이었거나 스토리 교훈을 마음속에 꼭 새겨두었기 때문은 아닐 거야. 그보다는 부모님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실제로 암탉이나 돼지와 같은 동물들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틈틈이 부모님 일을 도와드렸던 경험이 몸과 생각에 밴 결과일 것으로 보여.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도 어려서 읽은 동화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일 테고. 그 당시 할아버지가 빨간 암탉 언급을 낯설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도 할아버지도 어려서 시골에서 암탉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고.


사실, 어려서 읽은 동화 속 교훈이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교훈이나 가치관이 되는 것은 아니란다. 어린 시절 누구나 동화를 읽으면서 성장하지만, 성인이 되어서 각기 다른 가치관과 관점, 행동을 보이는 이유이겠지. 책에서 읽은 스토리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실천될 때, 아이들에게 동화는 살이 되고 뼈가 되어 성장하면서 가치관으로 자리 잡는단다.



로아가 할아버지 텃밭에서 빨간 암탉처럼, 이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씨를 심고 물을 주고 수확하고 함께 나누며 먹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으면 하는 이유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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