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오싹 당근 -- 질문은 나의 힘 1
20개월이 지나는 요즈음 로아는 이제 혼자서도 책을 펼쳐 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책을 읽더구나. 그것도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가며 소리까지 내서 말이야. 로아의 책 읽는 모습을 지켜보면, 때로는 재미있는지 웃으면서, 때로는 심각하게, 때로는 심드렁하게 표정이 바뀌기도 하더구나. 로아가 읽으면서 내는 소리는 할아버지에게 의미 전달은 안 되지만, 로아 표정으로 보건대 본인은 내용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다. 로아 읽는 모습을 살포시 지켜보면서 할아버지는 로아가 기특하기도 하고 동시에 궁금증이 생긴단다. 로아는 책장을 넘기면서 읽는 소리는 어른들이 읽어주던 목소리를 단지 흉내 내는 것일까, 아님, 그림을 보면서 어른들이 읽어주던 내용을 기억하고는 로아 나름대로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것일까 하고 말이야.
로아가 할아버지와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면 지금도 시간의 절반 이상은 함께 책을 보며 보내는데, 로아는 가끔씩 할아버지를 놀라게 하곤 하더구나. 책 권수로 보면 절대 적지 않은 분량인데 로아가 뽑아오는 책마다 어느 페이지든 특정 그림을 보고는 책 내용에 맞게 한 두 단어로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이야. 요즘은 책을 펼치고 할아버지에게 문장 단위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서는, (할아버지는 그 내용을 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로아가 책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더구나. 어른들의 생각과는 달리, 로아와 같은 아기들은 관찰력도 뛰어나고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림을 보면서 자기 나름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다.
로아가 아주 어려서부터 어른들과 함께 책 보는 것을 좋아했고 이제는 혼자서도 책과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로아에게 좋은 습관이 생긴 것 같아 기특한 마음이 들면서 로아가 이 습관을 커가면서도 지속해 가길 바란단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가장 크단다. 하나는 스토리와 같이 흥미진진한 내용을 읽는 재미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통해 새로운 것을 접하고 배우는 즐거움이야. 지금의 로아는 전자의 이유로 책을 손에서 떼어 놓지 않고 있을 것이지만, 로아가 커가면서 책을 통해 새로운 것을 접하고 이를 통해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키워가는 즐거움에서 책 읽기의 매력을 느끼기를 바란단다.
이러한 책 읽기를 통한 내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단다. 하나는 좋은 책을 선택해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 할아버지가 무릎서재 시리즈에서 로아에게 소개해 주는 어린이 문학 작품은 대개 이런 책이란다. 좋은 책이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춰야 할 태도와 가치관을 다루면서도 가르치거나 강요하려 들지 않는단다. 오히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고, 생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깨닫게 만들지. 로아가 좋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자, 수동적이 아닌 의문과 질문을 통한 적극적인 책 읽기가 중요한 이유이지.
이번에 소개할 <오싹오싹 당근>은 로아가 살아갈 세상에서 음식과 자연의 소중함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책으로 책 내용에 대한 의문과 질문을 통해서 생각거리가 찾아진단다. <오싹오싹 당근>의 무릎서재식 스토리텔링이야.
숲 속 동물 마을에 제스퍼라는 토끼가 살고 있었고,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숲 공터에는 당근이 모여 자라는 곳이 있었다. 당근을 무엇보다 좋아하는 제스퍼는 매일같이 학교로 오가면서 이곳에 들러 배가 부를 때까지 당근을 뽑아 먹곤 했다. 심지어는 운동하러 오갈 때도 운동에는 에너지가 매우 필요하다면서 당근밭에 들어가 당근을 마구마구 먹어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야구 시합을 마치고 당근밭에 들러 당근을 쑥 뽑았는데, ‘바스락 쓱싹’ 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봤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럭 겁이 난 제스퍼는 그 길로 달려 집으로 돌아왔고, 밤이 되어 화장실에서 이를 닦다가 거울에 비친 당근 모습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고 확인했지만, 당근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당근밭에 가서 당근을 뽑으면서 조심스럽게 지켜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안심하고 당근을 먹어치웠다. 하지만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보니 창고에서도 그리고 자기 방에서도 오싹한 당근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소리를 질렀고, 엄마 아빠가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이후 제스퍼는 자기 주변으로 오싹오싹한 당근들이 슬금슬금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더욱 강하게 느꼈고, 당근밭에 가는 대신 오싹한 당근들을 물리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멋진 생각을 떠올렸고, 곧장 짐수레에 연장을 가득 싣고 당근밭으로 갔다. 당근밭 주위로 빙 둘러 나무 펜스를 높이 세우고 나무 펜스 밖으로는 깊게 땅을 파서 물을 채운 뒤 무시무시한 악어를 풀어두었다. ‘이젠, 당근이 절대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겠지,’하고 제스퍼는 만족하며 집으로 돌아왔고, 과연 그 뒤로 당근은 제스퍼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제스퍼가 나무 펜스를 세우고 떠나자 만세를 부른 것은 당근들이었다. 사실, 당근들이 제스퍼의 뒤를 몰래 따라가고 그의 집에 나타난 것은 사실이었고 제스퍼가 당근들을 무서워해서 더 이상 당근밭에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제스퍼가 나무 펜스를 세우고 참호를 파고는 그 뒤로는 당근밭에 오지 않으니 당근들의 계획이 맞아떨어진 것이고, 이제 당근들은 안심하고 지낼 수 있었다.
로아가 조금 더 커서 스스로 이 스토리를 읽는다면? 식물인 당근이 어떻게 제스퍼를 따라갈 수 있지? 식물인 당근이 어떻게 겁을 줄 생각을 할 수 있지? 식물인 당근이 토끼를 이용할 생각을 할 수 있지? 당연히 이런 의문들이 생길 것이야. 그러면서, ‘이건 말도 안 돼. 순전히 엉터리 이야기야’라고 단정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그런데, 좋은 질문이란 이런 말도 안 돼 보이는 의문에서 출발한단다. 이 책을 읽으며 언뜻 드는 이러한 의문이 사실은 식물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먹는 행위인 섭생에 대해 되돌아보고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구나. 이 책이 미국에서 2013년도에 나왔을 때,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칼데콧 아너상을 받았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 있겠지.
식물은 자신의 종 번식을 위해 곤충이나 인간을 포함한 동물을 이용해 왔다는 점은 잘 알려진 내용이란다. 꽃이 향이 강하고 색깔이 진하게 진화해 온 것이 좋은 예지. 식물은 열매를 통한 종 번식을 위해 수분에 필요한 곤충을 향이나 색깔로 끌어들였던 것이지. 우리가 먹는 당근과 같은 채소나 과일 역시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활용해오지 않았을까?
식물학 연구에 따르면, 당근과 같은 식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인간보다 게놈도 길고 훨씬 정교한 DNA를 갖고 있으며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를 생존에 최적화된 상태로 DNA를 변화시킨다고 하는구나. 야생 당근의 원래의 모습은 흰색으로 지금보다 훨씬 작았고 당도도 낮았지만, 색깔은 노란색을 거쳐 지금의 오렌지색으로 바뀌었고 크기도 커졌고 당도도 높아졌다고 해.
당근이 이렇게 바뀌게 된 정확한 원인은 과학적 자료로 드러난 것은 없지만, 인간의 재배 활동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당근이 흰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한 것은 약 천 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으로 인간이 재배하기 시작하면서였고, 지금의 크기와 당도를 지니고 오렌지색으로 바뀌게 된 것은 오백 년 전에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재배되면서였다고 식물학자들이 밝히고 있어.
천 년 전이나 오백 년 전이나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인위적인 유전자 변형을 통한 종자 개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근이 인간에 의해 조성된 재배 환경에 스스로를 적응시켰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렇다면, 당근이 스스로를 왜 크기와 당도를 높이고 색깔을 이렇게 변모시켰을까? “당근이 오렌지색으로 바뀌게 된 생물학적 원인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그것은 지난 천 년 동안 인간이 당근을 식용으로 애용해 왔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발표된 한 연구의 결말로, 당근은 종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색깔과 크기, 맛에서 인간이 먹기에 좋도록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에게 더 많이 재배하도록 만들었다고 보인단다.
<오싹오싹 당근>에서 당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제스퍼를 겁주고 이용한 것처럼, 당근과 같은 식물에게도 인간과 같이 지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오싹오싹 당근>에서는 어린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치 당근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전략을 짜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일부 식물학자들은 식물에게도 감각 능력과 지각 능력뿐만 아니라 인지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고 파악한단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읽었던 충격으로 다가왔던 놀랄만한 책이 여러 권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식물의 정신세계>로 바로 식물의 지각과 인지 능력을 다루고 있지. 그때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지만, 읽은 지 너무 오래돼서 책꽂이에서 빼서 다시 한번 펼쳐보았단다. 할아버지는 식물학에 대해 무지하고, 인간의 생각과 감정, 삶을 주제로 다루는 인문학자이다 보니, 식물에게도 인간과 다름없는 공감능력과 지각능력, 영혼까지도 있다는 내용은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란다. 그러나 자연 생명체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식물의 지각 능력의 가능성 역시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단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면서 새롭게 할아버지의 관심을 끈 것은 미국 식물학자인 루터 버뱅크였단다. 그는 식물도 20가지가 넘은 지각능력이 있다고 믿으며 식물을 연구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식물과의 신뢰감을 쌓는 일을 했다고 해.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는 가시 없는 선인장 개발에서 버뱅크는 무엇보다 우선해서 선인장에게 수시로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고 사랑의 진동을 통해 선인장으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해. 그래서 선인장으로 하여금 자신은 해치는 사람이 아닌 친구로, 보호자로 인식하도록 해서 선인장이 날카로운 가시를 지닐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해 준 뒤 스스로 가지를 떨어뜨리도록 했다고 하지.
그런데 버뱅크가 식물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식물학자로서의 과학적 증거나 신념보다는 식물을 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과 감수성이라는 점이야. 실제로 버뱅크는 어린이들을 매우 좋아했고 자신의 과학적 발견과 성공이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로 자연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낀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더구나.
로아가 어려서부터 그리고 자라면서도 꾸준히 지녔으면 하고 할아버지가 바라는 점이 바로 버뱅크의 자연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존중감, 감수성이란다. 특히나, 로아는 온갖 인공지능으로 세팅된 환경에서, 더욱 중요하게는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문제가 심각한 시대에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구나. 할아버지에게 <오싹오싹 당근> 스토리가 인간을 향한 자연의 역습처럼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란다.
토끼 제스퍼는 숲 공터에서 당근이 모여 자라고 있는 당근밭을 발견하고는 매일 같이 맛나게 뽑아 먹으면서도 당근에 대해 전혀 고마운 생각이나 돌봄의 마음은 전혀 갖지 않지. 오히려, 당근을 함부로 대하고 필요 이상으로 뽑아 먹으면서 낭비하고 있었지. 당근들이 이런 제스퍼에게 겁을 주고 담장을 둘러치게 만든 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처럼, 지금의 지구는 인간이 고마운 생각이나 돌봄의 마음 없이 함부로 이용하고 파괴해서 많이 아파한단다. 요즈음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심각한 기후변화 현상이나 파괴적인 자연재해는 이와 같은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훼손 행위와 무관하지 않단다. 전문가들이 이러한 현상을 자연의 인간을 향한 역습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해.
자연에 대한 파괴 행위나 보전 활동은 보다 깊게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생각과 태도, 가치관의 반영으로, 어려서부터의 자연을 향한 생각과 태도가 차곡차곡 쌓여 형성된 결과란다. 할아버지는 로아가 <오싹오싹 당근>과 같은 스토리를 읽으며 떠오르는 질문을 통해 자연에 대한 순수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감수성을 꾸준히 지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할아버지 텃밭에서 맨발의 로아가 보드라운 손으로 당근 씨앗을 뿌리고, 물을 뿌려주고, 싹이 나면 바닥에 바싹 엎드려 당근과 눈높이를 맞추고 당근에게 말을 걸어주는 모습을 그려 본단다.
내년 봄이 많이 기다려지는 이유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