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 꼭 챙겨야 할까?

로아의 백일 기념

by 로아 할아버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요?’



결혼 후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일과를 마치고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아내가 던진 말이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내의 말은 사근사근했지만, 실제로 벼락을 맞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결혼기념일이었던 것이다. 수첩에 적어 놓아 어제까지 기억했지만, 하필 오늘 왜 잊어버린 것일까. 자책은 뒤로 미루고 우선은 수습이 먼저였다.


고맙게도 내가 아닌 아내가 먼저 수습을 해줬다. 수현이가 태어나고 아내도 나도 각자의 일에 묻혀 살던 시절, 아내에 대한 로맨스 감정은 안팎으로 쫓기던 상황에 묻힌 채 생활해 왔던 터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로 아내는 거실 달력에 가족의 생일과 기념일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다섯 겹으로 진하게 그려 넣었다. 이것은 초등학교 모범생처럼 가족에 대한 나의 역할에 미리 만점을 주는 고단수 방법이었다.


‘서프라이즈’보다는 실용과 현실을 택한 아내는 그 뒤로 자신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에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까지 작성해 주는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내가 받은 선물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내의 현명한 조치 덕에 그 뒤로 나는 벼락 맞는 기분이 들 일은 피하게 되었다.


아내의 처방이 처음에는 싱겁게 느껴지기도 하고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그 이후 내가 남편으로서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로서 가족의 이벤트에 성의껏 형식을 갖춰 지켜온 것은 그 덕이다. 가족의 기념일을 일회성 ‘깜짝’ 이벤트로 챙기는 것보다는 정성이 깃든 형식을 갖춰 소중히 챙기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로아 백일이 다가오는데, 백일상을 차릴까 말까 생각 중이에요. 아버님, 어머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번 로아를 보러 잠깐 들렀을 때, 아이들이 우리의 생각을 물어왔다.


‘집에서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로아에게 작은 것이라도 의미 있게 챙겨주는 방향으로 하면 좋을 듯해.’


‘요즈음에는 대개는 그냥 지나가던데. 꼭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냥 지나가면 나중에 로아가 서운해할 것 같기도 해서요. 두 분께서 좋다고 하시니, 그럼 하는 방향으로 준비해 볼게요’


요즘 세대답게 건강한 의미에서의 소확행을 실천하는 수현이와 현아는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로아의 백일을 챙겼을 것이다. 다만, 손주 백일 챙기는 일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충분히 의미 있게 생각하고 함께할 의향이 있는지 예를 갖춰 성심껏 떠본(?) 것이리라.



주말을 이용하여 아이들 집에서 조촐하게 로아의 백일을 기념했다. 요즈음은 참 편리하다. 백일 상차림도 렌털 패키지를 이용하면 된다. 일일이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덜 수 있으니 바쁜 엄마, 아빠에게는 그만이다. 렌털 패키지 상차림에, 로아 외할머니께서 성의껏 올리신 백일 떡과 로아 외할아버지께서 6개월간 정성껏 만드신 십자가 조각품이 맛과 향, 멋을 얹었다.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로아의 양 손가락에 낄 금반지를 준비했다. 백일을 맞는 로아에게 ‘축하해’라고 말한 들, 아직은 알아들을 수 없고 기억도 못 할 테니, 금반지로 할아버지 & 할머니의 애정 증표를 남기고 싶었다. 옛 관습이라고 다 낡은 것만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물이나 관습 중 우리 안에 오래 머문 것이 미래에 더 오래 살아 남는 경우를 본다. 더더구나 요즈음 금값이 진짜 금값이 돼버렸으니, 나중에 로아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로아가 성장하면서 맞게 될 기쁜 일은 기쁜 일대로 함께해 주고, 힘든 일에는 꿋꿋하고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지금 이 마음 그대로 로아와 함께해 줄 거야.’


로아의 양쪽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마음속에 새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백일 서약서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로아로부터 다짐을 받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녀인 저 로아는 약속합니다. 우유도 잘 먹고 응가도 잘하고 잠도 잘 자서 무럭무럭 튼튼하게 잘 자라겠습니다. 엄마 아빠에게 착한 딸보다는, 고집도 부리고 화도 내고 벌레와 친구하고 별에게 말도 거는 엉뚱하고 씩씩한 귀염둥이 로아가 되겠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빼먹었습니다. 아빠 엄마를 졸라 자주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도 꼭 가겠습니다.’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지 말자>. 일전에 관심을 끌었던 책 제목이다. 당장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대개는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니,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의 어려운 점들에 너무 마음 쓰지 말자는 마인드 컨트롤 주문서였다. 한참 일에 몰두하고 있던 나이에 읽었던 당시,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미래지향적 관점과 위로에는 함정이 있다. 우리 세대의 삶은 지나치게 진지했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다 보니 가족의 일은 지나치게 ‘사소한’ 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챙겨주는 일이나 자식의 성장과 관심사에, 무감각하게 지나치는 것을 당연시했던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 역시 예외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과거를 되돌아볼 나이가 된 지금, 사랑스러운 손주에게까지 이 무감각을 전해주고 싶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가족과 관련된, 특히 손주가 성장하면서 맞게 되는, 한번 지나면 다시 오지 않는, 백일과 같은 일이라면,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자’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과장법이다. 이 같은 기념일은 시간이 지나도 ‘사소한’ 일로 바뀌지 않는다. 사진으로, 영상으로 기록되어 손주들이 커가면서 자신의 모습만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손주들은 모든 공동체의 기본단위인 가정과 가족관계에서 자존감을 키워가고, 가치관을 배워가고, 타인과의 관계를 익혀간다.


그뿐이랴. 손주들은 그 존재 자체로 가족의 구심점이 된다. 손주라는 배에 아빠 & 엄마만이 아니라 할아버지 & 할머니가 함께 오르게 된다. 이미 배는 출발했으니,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공동운명체다. 이제는 손주의 미래라는 같은 방향을 향해 시선과 마음을 나누며 큰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손주들은 할아버지/할머니, 아빠/엄마에게 후한 ‘백일상’을 받고도 남을 존재다.




그리고,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주들로부터 이미 더욱 값지고 맛나고 풍성한 인생 상차림을 대접받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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