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에 공짜는 없다

로아 육아 3주 차

by 로아 할아버지

'육아에 공짜는 없다!'


조부모의 손주 육아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라는 나 스스로의 다짐이다. 로아 육아 1, 2주를 거쳐 3주 차에 오면서 경험을 통해 얻은 내 나름의 교훈이다.



어제는 3주차 첫날로, 나를 맞아준 로아의 모습은 이전 두 주하고는 사뭇 달랐다. 나를 보자마자, 아니 목소리를 듣자마자, 웃음으로 반겼다. 익숙한 사람 맞이 하듯, 반가운 사람 맞이 하듯,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이번에도 난 온갖 반가운 표정과 하이톤의 목소리를 속사포로 동원해 로아에게 아양을 떨었음은 물론이다.


나의 ‘손주바보’ 적인 착각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로아가 할아버지를 너무나도 반기더라.’


정직을 신조로 평생 교직에 계셨던 로아 외할머니께서 나와 교대하시고 귀가하시면서 현아에게 확인해주신 말씀이니 믿어도 될 것 같다.



지난 두 주 사이에 로아와 이 할아버지 사이의 유대감이 만들어진 덕분으로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영유아 발달 전문가들이 정리한 발달단계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적어도 나와 로아와의 특별한 유대감은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과학적 자료로서 설명되거나 규명될 성질은 아닌 것으로 믿는다. 영유아의 욕구나 기분, 양육자와의 교감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규명될 수 있을까 싶다.


처음에는 로아 돌봄이 익숙하지 않아 나도 로아도 불편하긴 했지만, 육아 첫날부터 ‘육아에 공짜는 없다’는 내 나름의 명제를 실천해왔다. 로아와 이 할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 형성과 진전은 그 덕분이라 생각한다.


로아의 격대 육아에서 첫 주부터 내가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세심하게 관심을 두고 격렬히 응대해주기다. 생후 100일 남짓 넘긴 로아의 생리적인 돌봄인 우유 먹이기나 기저귀 갈아주기, 잠재우기에서뿐만 아니라, 깨어 있는 시간에 항상 로아 옆을 지키면서 세밀히 관찰하며 로아의 원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눈을 맞추며 로아 옹알이에 일일이 응대해주고 잠이 드는 시간에는 고장 난 녹음기인 양 내 나름의 짜깁기 스토리텔링을 반복한다. 때론 내가 먼저 지칠 정도인데, 로아가 고맙게도 잘 견뎌준다. 로아 육아에서 나는 이 패턴을 매일 반복한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응대해주기 못지않게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아가 캡처해 준 유튜브에서 소아정신과 전문의가 영아의 뇌 발달 3요소로 영아에 대한 양육자의 민감성, 반응성, 일관성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나의 실천 방법이 전문가의 진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어 안심된다.



‘육아에 공짜는 없다.’


주 양육자로서의 아기의 부모, 특히 엄마는 임신 단계에서부터 이미 몸으로 보듬고 견뎌온다. 지난주 소파에 앉은 현아 무릎 아래로 드러난 선명한 상처 자국을 보고 마음이 찡했다. 가려움증을 참지 못해 긁어 생긴 상흔이 양쪽 다리에 여전히 촘촘히 자리 잡고 있었다. 로아 임신 뒤, 줄곧 극심한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면서도 태아의 안전을 위해 마음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로서 견뎌야만 했던 위대한 인고의 표식이다.


‘아빠, 그건 나중 일이고요. 지금은 현아가 너무 힘들어해요.’


출산 달이 가까워지며 현아의 가려움증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위로랍시고 태어날 로아를 생각하면 견디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나의 뻔한 말에 아들이 전화로 퉁명스럽게 던진 말이다. 평소 아들답지 않은 아빠를 향한 퉁명스러움에 순간 당황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현아의 처지를 먼저 생각해주는 아들이 대견했다.





‘육아에 공짜는 없다.’


이 말은 조부모의 격대 육아에도 적용된다. 손주가 생겼으면,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정 부분 양육을 분담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손주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조부모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내겐 손주 사랑은 무죄라는 말이나, 손주는 무조건 사랑스럽다는 ‘손주바보’식 접근에는 무언가 빠진 느낌이 들었다.


로아 임신 소식을 접한 이후로 로아의 존재와 조부모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점점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태어날 손주에게 조부모는 어떤 존재일 수 있을까? 대물림 차원에서 손주에 대한 역할을 생각해 왔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가짐과 같은 육아참여와 같은 구체적인 실천으로서의 유형의 역할이 있다.



우선, 무형의 역할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흔쾌히 서명해 주신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로아 임신 소식을 접한 지 얼마 뒤,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 직원이라고 밝힌 젊은이가 내 방에 찾아왔다. 코로나 상황에서 아프리카 빈민의 백신 접종 활동을 위한 모금을 위해 직접 후원자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고 한다. 대충 취지를 듣고 정기후원회원 가입서에 바로 서명해 주었다. 후원금도 최소가 아닌 중간 정도 금액을 선택했다. 대충 취지만 듣고 정기후원회원 가입에 서명해 준 것이 의외였는지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던 것이다.


나도 평소 같으면 후원 서명은 신중하게 한다. 구체적으로 캐묻고 내가 낼 후원금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곳에 사용되는지 확인한 후 결정한다. 확실히 이번은 내가 생각해도 달랐다. 그 순간 태어날 로아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케냐 나이로비에서 목격한 빈민촌의 헐벗은 어린이들의 모습이 태어날 로아와 자연스럽게 겹쳤고, 로아에게 선한 영향을 대물림해주어야 할 할아버지로서 후원을 외면하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주에 대한 격대 육아에서 유형의 역할이란 여러가지 있을 것이고 양육에의 직접적 참여도 한 방법이다. 영유아를 둔 대부분의 부모는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다. 마음과는 달리, 영유아에게 필요한 충분한 관심과 시간적 여유, 돌봄을 지속해서 제공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부부도 로아 아빠를 키울 때 그랬고, 로아 엄마 아빠도 둘 다 직장 일로 여념이 없다. 조부모의 격대 육아가 필요한 이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격대 육아는 단지 바쁜 아들이나 딸의 빈자리를 메꾸는 시간 때우기 식 도우미 역할이 아니다. 물리적인 시간적 제약이나 경험 부족과 같은 한계로 인해 엄마와 아빠가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적극적인 양육을 통해 손주에게 제공해주는 것을 나의 역할로 삼는다. 나의 보조적인 역할이 주 양육자인 수현이와 현아의 역할을 대체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었다. 자칫 선을 넘지 않기 위한 장치다.


내가 격대 육아를 실천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고, 수현이와 현아가 나의 격대 육아에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할아버지다. 마음은 있더라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격대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조부모도 많을 것이다. 직접 양육에 참여할 수 없는 경우에도, 격대 육아는 조부모로부터의 손주에게로의 대물림이란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버님, 저 어머니한테 혼날 것 같아요.’


오늘 저녁 식사자리에서 내 튼 입술을 보고 현아가 농반진반으로 말을 건넨다.


그래, 육아에 공짜가 어디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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