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석의 황홀

by 로아 할아버지

‘아빠, 로아 어르는 말 그만하세요.’


자기 사무실 방에서 업무를 보던 아들이 문틈으로 말을 내민다. 처음에는 아들의 말이 문틈에 걸렸는지 내게 도달하지 않았다. 반응 없는 아빠를 향해 재차 던진 것을 보면, 신경이 쓰였음이 틀림없다. 당시 나는 거실에서 로아의 투정에 열심히 반응해주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아는 내 품에서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울먹인다. 마치, ‘나 좀 달래주세요’ ‘내 마음 좀 알아주세요’ 하듯 애타게 흐느낀다. 어느덧 눈가에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더니 뽀송뽀송한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배고프거나 잠이 올 때의 울음이나 표정 하고는 전혀 다르다. 조금 전 우유를 정량 먹고 잠도 자고 일어난 상황이었다. 기저귀도 아직 괜찮다.


우선은 무조건 순발력 있게 맞장구쳐준다. 생리적 욕구에 의한 투정 때도 필요한 조치를 해주기 전에 우선 얼굴을 마주하고 맞장구를 쳐준다. 내게는 로아와의 일종의 공감 방법이다. 육아 시작 처음부터 그랬다. 로아의 투정에는 여전히 이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다.



로아의 투정에 눈을 가깝게 마주하고 맞장구를 쳐주는 일은 육아 지침서에서 배운 것은 아니다. 대단할 것은 아닐지라도, 내 나름의 경험에 의한 학습효과 때문이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첫 응석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테다. 다만, 아내나 나 모두 짧게 호흡하며 살아가던 시절이라 알아차리지도 못했던 것 같다. 가족에 대한 나의 공감학습은 아이들이 아닌 아내로부터 비롯되었다.


결혼 후 가족모임은 아내의 마음을 반복적으로 속상하게 만들었었다. 그 세대가 그렇긴 해도, 아들 편애가 심하셨고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셨던 우리 어머니셨다. 며느리 입장에서 속상한 순간들이 왜 없었을까. 결혼 전 아들딸 차별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내다 보니 더욱 그럴 만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의 대응은 아내를 향한 공감보다는 대체로 어머니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변호하거나, 내 나름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아내를 설득하려고만 했다. 정작 아내의 속상함이나 화는 가라앉기보다는 오히려 더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아내의 속 좁음을 탓해보기도 했다.


아마도 결혼 5년 차쯤 되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번에는 자칭 ‘착한 아들’의 입장을 버리고 속상해하는 아내의 입장을 편들었다. 오히려 아내보다도 더 강하게 우리 어머니의 태도를 성토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란 책이 나오기 전으로, 나의 태도변화의 이유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간 어머니의 태도에 나도 내심 신경이 쓰였던 것은 분명하다.


기본 심성이 착해서 속상해도 어머니의 입장을 되도록 이해하려고 노력해왔던 아내가 나의 ‘돌변한’ 태도에 오히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물론 우리 어머니는 그 점만 빼놓고는 당신 며느리를 많이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는 것을 아내도 잘 알고 있다. 조금 후 감정이 가라앉은 아내는 마음이 편안해진 모습이 역력했다.

그때 분명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 아내는 나의 판단이나 설득이 아니라 우선은 자신의 편에서 속상한 마음을 그저 들어주고 알아주고 공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내의 마음에는 내가 불만의 이유를 따져주고 판단해주는 일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는데 왜 5년여의 세월이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 공감의 감성이 100여 일 된 손녀의 투정에 즉각 적용될 줄이야! 이유 있는 투정만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던 이번의 첫 ‘응석’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이 로아가 태어난 지 101일째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주기적으로 응석이 심해지는 시기가 있다는 점은 자료를 읽어서 알고 있지만, 영유아 발달단계에서 첫 응석이 언제 시작되는지 자료로는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로아가 이 할아버지를 상대로 부린 첫 응석이 분명하다는 믿음이 있다. 내 품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내 품에서 펼친 로아의 응석은 그 자체로 내겐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일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저~런, 로~아~야.’ 나는 자동반사적으로 감정과 리듬을 실어 로아의 응석에 맞장구쳐주었다. 로아의 표정과 울먹임의 응석 강도는 점점 커지고, 나의 맞장구도 커진다. 아니, 사실은 달래기보다는 부추기고 있었다. 어느새 내가 앞서서 부추기고 로아가 이에 맞장구치는 형국이다. 이 정도면 누가 아기인지 구별이 안 된다. 아들이 제지에 나선 것도 충분히 이해될만한 상황이다.


아들의 제지에 일단은 ‘그래, 알았다’로 대답해 주었지만, 그 순간 나의 응석받이는 그칠 수 없었다. 다만, 목소리는 낮추고 표정만큼은 더 크고 더 다양하게 지었다. 이런 식으로 10여 차례 더 지속하고 나니 로아의 응석, 아니 로아와 이 할아버지의 듀엣 응석은 마무리되었다.



로아의 이번 응석이 특별한 이유는 욕구 발달 단계에서 규정하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에 대한 욕구의 다음 단계인 애정과 관계성에 대한 욕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로아의 반응은 먹고, 자고, 싸는 생리적 욕구와 간간이 안전에 대한 욕구가 대부분이었다. 이 응석을 통해 로아는 이제 이 할아버지를 친밀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나의 사랑을 요구하며 나와의 친밀한 관계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로아의 인지발달을 직접 경험하니 특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판단이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은 나의 착각에 불과해도 말이다.


로아 육아에 가담하면서 나는 주양육자인 현아와 수현의 육아관을 무엇보다도 존중해주고 따르기로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밝혔다. 다만 이번의 경우처럼, 나의 로아 격대 육아에서 아들 부부와 서로 생각을 달리하는 일들은 종종 일어날 것이고 내가 고민하고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지점도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아들의 경우 나와 세대 차이보다는 성장한 사회문화적 배경이 그의 육아관에 적지 않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아정체성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사춘기 시작 시점부터 미국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던 아들은 식성이나 겉모습과는 달리 미국식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있다. 로아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로아의 양육 방식과 방향은 아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담아내고 있었고, 로아가 태어나서는 실천에 옮겨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자아 주체성과 자립심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인 만큼 미국 사회에서는 영유아 육아에서부터 적용되고 중시된다. 영유아 시기부터 응석에 고의로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물림이란 생각으로 손주의 격대 육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는 우리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워내고 이제는 그 결과를 반추하며 손주 육아에 임한다. 내 경우처럼 문화적 이유에서건, 아니면 세대 차이나 생각 차이에서든 자식들의 양육 방향과 태도에서 간격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간격의 정도는 조부모가 격대 육아에 가담하는 정도에 비례할 것이다. 주 양육자가 손주의 아빠와 엄마임을 분명히 해두면서 두 세대 간 신뢰와 대화를 바탕으로, 상호보완적 관점에서 현명한 판단을 고민하는 점 역시 필요하다.


그 현명한 판단의 단초는 미국의 발달심리학자인 에릭 에릭슨에게서 찾아진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적 생명력의 근본적인 선행조건은 영유아 시기 양육자와의 신뢰감 형성이라고 한다. 인생 첫해에 양육자와의 신뢰감 형성을 통해 배운 세상에 대한 태도는 이후의 자아 신뢰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신뢰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에릭슨은 강조한다.



로아가 다시 내게 응석을 부린다면?



아들은 몸에 밴 생각을 쉽사리 바꾸기는 어려울 것이고, 나는 아들 몰래 라도 응석을 받아줄 것이다. 적어도 로아와 나 사이에 에릭슨이 말한 신뢰가 형성될 때까지만이라도. 로아가 이 할아버지에게 신뢰감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로아의 응석에 이 할아버지의 적극적인 응석받이를 통해 애정과 관계성에의 욕구를 채워주어야 할 테니까.


이 할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쌓이게 되면, 로아는 ‘그만~’이라는 이 할아버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까?


로아에게 보내는 이 할아버지의 견고한 신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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