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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Mar 09. 2020

부먹이냐 찍먹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 개인의 고민거리 중 가장 유명한 대문호 셰익스 피어의 햄릿의 고민이다. 그리고 집단으로서 부먹이냐 찍먹이냐는 유사한 깊이의 고민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함께 중국음식을 시켜먹는 행의는 의미가 있다. 더군다나 탕수육을 함께 주문했다니, 이것은 유비 삼 형제의 도원결의 못지않은 탕수육 결의다. 오래갈 사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함께 오래갈 사이라면 미리부터 서로의 철학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한참 일을 함께한 후 서로 다른 철학을 가졌다는 것을 알면 그것만큼 피곤한 일이 없다. 철학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이 있으니 이는 바로 부먹파냐 찍먹파냐,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왜 부먹이냐 찍먹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는 다른 사소한 음식 취향과 다르기 때문이다. 짜장면을 좋아하냐 짬뽕을 중요하냐는 취향이다. 개인 음식이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개별적으로 시키면 된다. 라틴어 격언에 “취향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격언이 있다. 이에 대해 논쟁은 큰 의미가 없다. 


그러나 부먹과 찍먹은 다르다. 이는 개인 음식이 아니다. 한 공동의 집단에 돈을 걷어 만든 소중한 공통 음식이다. 모두가 같은 양만큼 공헌했고, 같은 만큼 의견을 제시할 권한이 있다. 물론 그 집단에서 다수결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가장 민주적인 방법이다. 


그럼에도 정치처럼 좌우가 갈라져 서로 미워하기만 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짓밟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탕수육에서도 부먹파와 찍먹파의 서로 다른 견해를 이해해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먼저 각각 찍먹파와 부먹파의 견해를 살펴보자. 부먹파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탕수육이란 모름지기 중국집에 가서 먹는 것이 진정한 탕수육의 맛. 기본적으로 중국집에서 먹을 때의 탕수육은 소스가 부어서 나온다. 매번 찍기 위해 한 번의 젓가락질을 더 하는 것은 동선과 인력 낭비다. 


이에 비해 찍먹파는 주로 음식을 천천히 먹는 경우가 많다. 탕수육이 너무 소스에 오래 있어 바삭한 맛을 잃게 되고, 탕수육을 혹시라도 다 먹지 못했을 경우 찍먹으로 남겨 놓은 소스와 탕수육은 다시 보관하고 다시 데워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법.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면 찍먹을 선택한다. 


한 사회나 집단이 더욱 건강해 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가장 주된 잣대로 생각하는 것이 약자에 대한 배려다. 상대적으로 찍먹파가 약자다. 같은 돈을 냈을 때 더 많이 먹는 사람과 더 적게 먹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더 적게 먹는 사람이 약자다. 그리고 주로 천천히 먹거나 양이 작은 찍먹파가 약자다. 그 약자의 의견을 조금 더 들어줄 필요가 있다.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들어가는 추가적인 한 번의 젓가락질은 충분히 그 사회를 따듯하게 만들기 위해 가치가 있다. 


다른 관점으로는 복원 가능과 복원 불가능성이다. (Reversible vs Irreversible) 복원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당연히 우리는 복원 불가능성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 차와 사람이 부딪혀 차가 망가지는 것과 인간이 망가지는 것 중, 차가 망가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복원하기 쉽다. 최악의 경우 새 차를 사면 된다. 사람은 새 사람을 살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또한 찍먹을 선택해야 한다. 이미 눅눅해진 탕수육은 다시 담백하게 만들 수 없으나, 찍먹이 혹시 남긴 탕수육은 다시 눅눅하게 만들 수 있다. 


심지어 부먹파에게는 다른 대안이 있으니, 바로 “담먹”이다. 탕수육 소스에 흠뻑 취해 모든 쏘쓰를 빨아들여 헐렁하고 말랑한 탕수육의 맛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면 찍먹파에게 딜을 요청할 수 있다. 바로 일부 탕수육을 미리 소스에 담가 먹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찍먹파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부먹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 


더 좋은 사회는 사회적 강자보다 사회적 약자를, 복원 가능한 것보다는 복원 불가능한 것을 더 사려 깊게 생각할 때 만들어진다. 심지어 완벽하지 않지만 대안책까지 있는 경우라면 우리는 당연히 부먹파보다는 찍먹파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물론, 반만 소스를 붓는 탕평책이 더욱 현명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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