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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Mar 23. 2020

명문대생이 자살 하는 이유

고등학교 시절, K 대학총장은 학생들의 학업을 촉진하고자 한 정책을 만들었다. 모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제도에서 일정 학점을 넘지 못하면 장학금을 주지 않는 제도로 바꾸었다. 


정책은 의도한 바와 다르게 흘러갔다. 학생들이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고, 명문대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에서 몇 명의 학생들이 성적이 나온 이후에 자살했다. 그 대학의 명성은 떨어졌고, 많은 학생들이 기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학금 정책은 바뀌었다. 


고등학생 당시 이런 소식을 접할 때 느끼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분노. 역시 대한민국의 교육은 너무도 문제투성이다. 중고등학교에서 그렇게 강조하는 좋은 대학, 사실상 중고등학교 모든 교육의 목표, 에서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하늘로 날려버리다니. 그럼 대체 한국의 교육은 무엇을 위함인가? (당시에는 조금 더 과격한 언어로 표현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둘째, 혼란스러움. 그렇게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서 무엇이 아쉬워서 스스로 이 세상을 저버릴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끝까지 몰아갔는가? 



조금 생각이 큰, 그리고 운이 좋게 서울대학교에 들어간 지금, 그때의 감정을 다시 돌아본다. 나는 2018년부터 불면증이 생겼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위의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와 결을 같이한다. 정도와 맥락은 조금씩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 


나를 키운 8할, 아니 그 이상은 “성취”다.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중학교 때 이후로 언제나 “공부 잘하는” 학생 이었다. 중학교 때 선생님들은 나를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보았다.  그냥 “학생”이 아니었단 말이다. 당연히 친구들도 나를 공부 잘하는 친구로 본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아직 개인에 대한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기 어려운 시기다. 주위에 시선이 곧 나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주위에서 나를 웃긴 사람으로 보면 웃긴 사람이고, 양아치로 보면 양아치가 된다. 주위의 시선이 나를 이루는 한 요소가 아니라, 나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는 “공부 잘하는” 내가 되었다. 그게 내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청소년기에 확립된 정체성은 해를 지날수록 점점 더 강화 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내 그릇 속에는 계속 “공부 잘함”이라는 열매만이 들어와 포화된 상태였고, 그 외에 다른 열매가 들어올 틈은 없었다. 


그렇게 2018년 복학 후 첫 중간고사를 치렀고, 숨만 쉬고 공부만 하던 복학생의 의지는 꼴지에 가까운 성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했다. 충격은 컸다. 


이는 단순한 숫자요 점수가 아니다. 정체성이다. “공부 잘함”이라고 꽉 차 있던 열매들이 순식간에 모래바람처럼 스르르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텅 빈 그릇을 받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정의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로 내 정체성을 잃은 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처음의 k 대학의 학생들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당시에 어른들은 너무도 비통해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어림(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혀를 끌끌 찼다. 

“시험점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그렇다. 시험 점수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은 정체성의 증거였고, 본인의 뿌리였다. 


처연하게 텅 빈 정체성의 그릇과 뿌리부터 흔들리는 본인을 이미 사춘기가 지난 시점에 고민하는 것은 사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좋은 대학에 다니는 너희들이 무슨 고민이 있냐는 사회의 묘한 차가운 시선은 덤이다. 그런 벽을 한번, 두 번 느끼고 나면, 마음의 벽은 깊어진다. 한 계단, 두 계단 지하로 내려가는 걸음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너무 깊게 내려가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점점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이 보이지 않게 된다.


핀란드.


그렇다면 핀란드는 어떻게 학생들의 정체성을 부여하는가? 모든 한국의 문제를 써놓고, 핀란드를 앵무새 마냥 가져오고 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경험한 것이라고 해봐야 한국과 핀란드의 교육밖에 없으니. 핀란드의 평가 방식은 상당히 새롭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성과 목표를 세우고, 그 성과를 얼마나 잘 달성했는지에 따라서 등급을 매긴다. 


그러니 학업의 성취도에 의해서 개인의 정체성이 결정되지 않는다. 그릇에 더 다양한 열매를 담을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러니 직업을 선택할 때도 더 자유롭다. 성적에 따라 자신의 길을 한정 지을 필요가 없어진다. 


다시 한국.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당장 한국을 핀란드로 바꿀 수는 없다. 


선생님과 부모님들은 학생들에게 “공부 잘함”이라는 정체성을 함부로 부여해서는 안 된다. 빠르면 초등학교 진학 이전부터 받게 되는 “공부 잘함” 혹은 “똑똑함”이라는 열매는 해롭다.  열매 위에 농약처럼 켜켜이 발려 있는 “남들보다”라는 독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부 잘함”은 그냥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남들보다 얼마나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니 남들은 못해야 하고, 내가 하는 노력에 절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는 노력에 좌지우지 된다. 


(비지니스에서는 당연히 상대적 노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성장하는 학생시기에는 건강한 정체성을 부여 받기위해 좋지 않다는 의견이다.)


평생 1등만 할 수 있는 학생들은 극소수다. 언젠가는 그 정체성이 깨지게 되어 있다. 역설적으로 공부를 잘해 그 정체성을 오래 유지하는 학생일수록 그 정체성이 깨질 때 타격이 크다. 그래서 오히려 고등학교 전교 1등, 명문대생 들이 갑자기 정체성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보다는 그들의 노력, 과정에 칭찬을 해주는 정체성을 부여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꾸준한” , “언제나 성장하는”등의 정체성을 주어야 한다. 이 정체성은 상황이 바뀌어도 내가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 어렵겠지만 평가 역시 위를 바탕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보아야 한다. 


캐롤 드웩교수의 정의를 빌리자면 고정형 사고방식(Fixed mindset)보다는 성장형 사고방식(Growth mindset)을 학생들에게 부여 해야 한다. 고정형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자신에게 닥칠 시련이나 방해요소로만 보아 기피하는 반면, 성장형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들은 같은 상황을 넘어서야 할 도전으로 받아드린다. 


우리가 자녀들, 학생들을 성장형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기른다면, 앞으로 한국의 인재들이 스스로 이 땅을 저버리는 비보를 더 이상은 접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함께 보면 좋은 자료: 

https://www.ted.com/talks/carol_dweck_the_power_of_believing_that_you_can_impr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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