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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건 May 09. 2020

똑바로 얘기해봐. 코로나가 문제니, 게이인 게 문제니?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뀌었다. 다들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다. 2달이 넘게 우리는 일상을 잃었었다. 그 일상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기대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용인에서 다시 한번 슈퍼 전파자가 나왔고, 이로 인해 현재까지 18명의 새로운 신규 확진자가 나왔다. 높았던 기대가 있었던 만큼, 국민들의 실망은 크다.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만남과 가벼운 나들이를 계획했던 야심 찬 꿈은 다시 다음 기회로 미뤄야 될 것 같은 상황이다. 


일상을 다시 잃게 되었으니, 그리고 거의 손에 잡혔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 일상이다. 속상하고, 화가 날 것이다. 당연한 감정이다. 


그러나 그 화의 방향성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다. 코로나가 증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행, 클럽 방문 등은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막 그와 관련 없는 이상한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한 원색적인 비난이 너무 많다. 댓글에 익명이라는 이름을 빌려 아무렇게나 자신의 분노를 배설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심지어 굵직 굵직한 신문사의 정식 기사, 티브이 뉴스에서까지 성적 정체성에 대해 이상한 보도를 날리고 있다. 


지금은 한국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고 있는 손흥민 선수가  2월 3일 당시 인터뷰 중 기침을 했다. 해당 인터뷰 댓글에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냐고 댓글을 달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많이 없었다. 더군다나 손흥민 선수는 최근 들어 한국에 들어온 적도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중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 똑같아 보였고,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한 농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분히 악의적으로 차별적 댓글을 달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liMae_qSKg


당시에 유럽에 있는 동양인이라는 소수자였던 나는 해당 기사를 듣고 정말 크게 화가 났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짐에 따라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해지고 있다. 뜬금없이 지하철에서 아시아인에게 소리를 지르고, 마트에서 쫓아내고, 어처구니가 없는 동양인에 대한 현지 기사가 나오곤 했다. 


무서워서 그렇다.  Fear instinct(공포 본능)이다. 코로나라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에 겁을 먹은 것이다. 

Inexperienced, and in an emergency situation for the first time, my head quickly generated a worst-case scenario. (skip) There’s no room for facts when our minds are occupied by fear. <Factfulness, p 110>
경험도 없고, 처음 위급한 상황에서 내 머리는 재빨리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중략) 우리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무엇이 진실인지 생각할 여지는 없다.

무서워서 어떤 것이 옳은 행동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일상이 무너지면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무너진 것이다. 평소에 속에 숨겨 놓았던 차별, 혐오를 상황의 기대어 마음껏 분출하는 것이다. 


서양 사회에서 동양인은 소수자이고 약자다. 그러면 우리들은 별거 아닌 일에도 예민해지고 괜히 속상해 지기 마련이다. 당시 핀란드에 있을 때에는 바이러스는 걱정이 안 되지만, 그 차가운 눈빛과 차별에 걱정이 많았다. 


세계 전역에서 바이러스가 심각해지고 있고, 합당한 격리 조치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생긴 것이 중국인의 잘못도 아니고, 비슷하게 생긴 아시아인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우리는 손흥민이 겪은 일에 대해,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억울할 것이고, 분기탱천할 것이다.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오니 내가 차별을 당할 일은 없다. 아쉽게도 내가 유럽에서 존재하는 인종차별을 전부 바꿀 수는 없다. 그래도 어이없는 차별을 겪어보니 그 기분을 알겠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돌아오는 차가운 눈빛과 모욕적인 용어들. 그런 사람은 일부일 지라도 이 사회 전체가 나를 배척하는 기분이다. 그럼 적어도 내가 한국사회로 돌아왔을 때는 다른 집단들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성 소수자 집단에 대한 분노가 과연 옳은 방향인가? 왜 성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가? 이게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인가? 


그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가 얼마나 살기 편한가는 이 사회의 성숙도를 보여준다. 존 롤스의 개념 "무지의 장막" 을 생각해보자. 대표자들이 그들이 대표하는 시민의 재능과 능력, 젠더, 종교 또는 신념체계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약자도 살만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도 살만한 사회를 만들면 모두의 행복도가 올라갈 것이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태수(유해진)가 게이인 것에 준모(이서진)가 분노를 하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었냐!" 면서 분노를 쏟아내자 태수가 이야기한다. 

"너 똑바로 이야기해봐. 내가 너한테 얘기 안 한 게 문제니, 아님 내가 게이인 게 문제니?"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묻고 싶다.  지금 코로나가 문제인가요? 아니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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