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4
은수는 어머니와 함께 다시 입원수속을 하는 곳으로 내려가 수속을 했다. 6인실은 전부 차 있었다. 그래서 입원을 하려면 1인실과 2인실 중 하나로 들어가야 했다. 은수는 그나마 저렴한 2인실을 택했다. 모든 수속을 하고, 계속 대기하다가 입원실로 들어가서 시간을 보니 6시 이었다. 은수는 침대에 눕자마자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5시간 동안 엄청나게 긴장을 한 상태였다. 겨우 긴장이 조금 풀리자 잠이 쏟아진다. 은수는 잠에 든다.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은수는 홀로 있다. 힘차게 달려가 멋지게, 자발적으로 다이빙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비가 방울이 아니라 바구니 채로 쏟아진다. 은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물로 인한 공포감을 느낀다. 물에서 나와 다시 땅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은수는 끊임없는 빗방울에 물을 먹고 허우적거린다. 괴롭다. 그러다 보니 더 깊은 물속으로 빠졌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니 벌써 칠흑 같은 바다 속이다. 이제 어디가 위인지, 어디로 가면 빛을 볼 수 있는지 방향도 잘 모르겠다. 힘을 빼면 몸은 뜬다고 해서 힘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뜨지 않는다. 점점 더 가라앉고 있다.
은수는 놀라며 잠에서 일어난다. 주위를 보니 어머니가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왼쪽 눈의 물방울이 더 크게 보인다. 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왼쪽 눈의 물방울이 잠에서 일어나자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눈곱을 띠지 않았을 때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이를테면 물에 녹는 색연필로 그림을 그린 다음 붓에 물을 지나치게 먹여 모든 그림이 흐릿하게 나온 것 같다.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 눈으로 살펴보면 시야의 절반 이상이 물방울에 번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은수가 시간을 살피니 밤 10시다.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이미 잠은 깨버렸다. 은수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눈을 하나만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 길다고 더 고귀하고 짧다고 가치 없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성취를 이룬다고 큰 가치가 있는 삶도 아니다. 그 삶의 가치는 하나의 삶으로서 각각 동등하다.
은수에 헛웃음을 지었다. 억지로 자신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려 노력해보았지만, 시니컬함이 발작적으로 튀어나왔고 그것을 얼굴에서 가릴 수 없었다. 작은 아이가 수영장에서 무거운 킥판을 수영장 아래에 억지로 집어넣으면, 어느 정도 까지는 온 몸의 신경을 곤두 세워 잠시 동안 물속에 억지로 잡아 놓을 수 있겠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물속의 킥판은 물위로 폭발하듯이 올라간다. 그것이 킥판의 성질이다. 은수에게 시니컬함이 그렇다. 세상에 자기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은수는 스스로를 비웃는다. 은수는 이번엔 왼쪽 눈을 꽉 감아본다. 오른쪽으로 본 세상에는 물방울이 없다. 일단 최악의 경우 오른쪽 눈으로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은수의 눈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겼단다. 다른 사람에 비해 눈이 크다, 그로 인해 망막은 얇다. 또한 망막이 완벽한 구 모양이 아니라 타원체의 모양이기 때문에 장력에 문제가 생겨 쉽게 눈에 구멍이 생긴다. 오른쪽도 언제든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은수는 억울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고 느꼈다. 그리고 평생 언제든 눈의 시력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은수는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소설을 읽기만 하고, 단 한 줄의 써본 적이 없었다. 소설이란 특별한 사람들이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쓰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었다. 그러나 왼쪽 눈의 절반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은수는 처음으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억울함을 느끼자,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소설을 써야만 하겠다는 느낌을 함께 받았다. 은수 안에 있는 무언가 커다란 대리석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은수는 휴대폰을 꺼내 떠오르는 생각들을 마구 적었다.
북두칠성
따듯한 추상
빗방울
색연필
번짐. 퍼짐, 안약
억울함
그렇게 떠오르는 막연한 단어들을 적고 있었는데, 어머니와 의사가 입원실로 함께 들어왔다. 의사가 수술 일정이 잡혔고, 보호자분께 어떤 수술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다 설명했으니 지금 바로 수술을 하러 가야한다고 했다. 바로 수술용 침대에 옮겨 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은수에게는 이 수술, 그리고 이 상황을 부정할 기회도, 분노할 여유도, 협상할 여지도, 우울할 시간도, 수용할 여력도 주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수술용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하며 병원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하얗고 복잡한 천장을 보게 되었다. 은수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망막 속으로 들어온 물방울에 화가 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수술이 결정된 상황에 무기력했고, 그 와중에 소설을 쓰겠다고 메모를 하며 키워드를 적던 자신이 너무도 우스웠다.
***
은수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수술실에 들어갔다. 티비에서 보던 것처럼 정발 의사들이 초록색의 옷을 입고 있고, 수술실의 곳곳에는 알 수는 없지만 비싸 보이는 장비들이 보인다. 오른팔의 놓은 링거에서는 물방울이 다시금 방울, 방울 떨어지고 있다. 은수는 지금 이 현실이 드라마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가 현실을 잘 고증한 것이 아니라, 현실이 드라마를 참 닮았다고 느꼈다. 오른팔의 놓은 링거에서는 물방울이 다시금 방울, 방울 떨어지고 있다.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김은수요”
“환자 분 오늘 어디가 불편하세요?”
“눈이요”
“어느 쪽 눈이 불편하세요?”
“왼쪽이요”
은수는 갑자기 야릇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은수는 실제로 수술실이 참으로 잘 재현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갑자기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모든 주변 인물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집중하고, 수술실의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가 산소마스크를 은수에게 씌워주며 말했다.
“환자 분 크게 숨 세 번 쉬실 게요. 한 번... 두 번......”
갑작스럽게 한 문장이 떠오른다. 은수는 그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방울이 왼쪽 눈에 들어갔다.’
<물방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