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욕 : 내가 공부를 하게 만든 원동력
세상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본격적으로 게임에 취미를 붙인 것은 중학교 2학년때였다. 그당시에 학교를 마치면 매번 친구들과 함께 피씨방으로 달려갔다. 10년 전, 2010년대 초의 피씨방들은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고 시설은 열악했다. 구석에서는 아저씨들이 고스톱을 켜놓고 담배를 벅벅 피웠다. 먹을 것이라고는 컵라면이 다였고 기름때 쩐 마우스는 미끌미끌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게임을 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게임을 지면 함께 아쉬워하고 이기면 함께 희희덕거렸다. 학원에 가기 전 1시간 동안 저녁도 먹지 않고 시간을 쪼개가며 게임을 돌렸다. 학원에서 내준 숙제는 당연히 문제집의 답지를 베껴서 해결했고 학교에서는 계속 게임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게임에 처음 끌렸던 이유는 간단하다. 게임은 그 전까지 내가 해왔던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짜릿하고 자극적이었다. 영어단어 암기하기, 수학 문제 풀기, 피아노 연습하기 등은 금세 질렸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았다. 게임의 세계는 항상 긴장감 넘치고 흥미진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픽도 별로고 작품성도 떨어지는 게임이 많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너무나도 혁신적이었다. 게임은 지루한 현실보다 더 와 닿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 때문에만 게임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만약 게임을 하는 것 자체만 즐거웠다면 그 정도로 열정을 쏟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기는 것이 좋았다. 승부의 세계에서 승리하는 것이 좋았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내 실력과 등급, 점수를 보며 뿌듯했다. 오랫동안 이기지 못했던 친구를 상대로 승리를 이뤘을 때, “최근 전적 1승 0패”라고 놀릴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친구들이 나의 실력을 인정할 때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중학교 1학년 말 처음으로 갔던 피씨방에서 서든어택 실력의 한계를 느꼈을 때의 좌절감보다 중학교 3학년 때 반 대표로 반 대항 리그오브레전드 게임을 승리했을 때의 짜릿함이 더 컸다.
나는 패배하는 것이 싫었다. 승리했을 때의 성취감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상대가 나 대신 그것을 누리는 것이 억울했다. 지고는 못 살았기 때문에 항상 나의 실수를 자책했고, 실수를 한 다음날에 다시 피씨방을 가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나는 항상 어제보다 더 완벽하고 우수한 게이머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게임에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적은 노력을 들인 친구들이 게임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서 나의 등급을 추월할 때, 나아가 그 지역에서 고수로 이름을 날릴 때 나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들만큼의 순발력과 게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에 즈음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썩 괜찮은 공부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게임을 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에 투자했던 공부가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냈고, 무엇보다도 피씨방과 게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던 것은 2학년이라 그 전 1년간 쌓아놓은 성적이 있었다. 2013년 2월, 나는 턱걸이로 민족사관고등학교라는 기숙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민족사관고등학교, 줄여서 민사고는 전국의 영재들이 모이는 학교라는 대내외적 평가를 받고 있었다. 정말 그런지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친구들 중 중학교 때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누구는 경시대회에서 입상을 했고, 누구는 대학교 과정까지 선행을 하였고, 누구는 영어토론대회에서 이름을 날렸다 하는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러한 영웅담이 더욱 돋보이게 하는, 나와 같은 절대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중학교 때 성적이 남들보다 조금 좋았기 때문에 입학한 것인데, 이미 엄청난 성취를 이룬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수업은 대부분 그들에 맞추어 정규 교육과정에 비해 어렵게 진행이 되었다. 당연히 나는 수업 내용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수업 내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어쩌다가 입학한 학교에서 공부에 대한 흥미가 딱히 없었기 때문에 구태여 외계어처럼 들리는 수업 내용을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나의 열정은 리그오브레전드, 줄여서 롤로 향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은 중학교 때의 연장선이었다. 지켜보는 부모님도 없고, 각자 노트북이 한 대씩 있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주말에 일어나자마자 하루종일 게임만 해서 거의 10시간을 채우던 것은 매주 하는 일과였다. 차이점은, 친구들에 비해 게임을 더 잘하게 되었지만 그만큼 성적은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등급과 점수에 보람을 느꼈다. 리그오브레전드를 잘 한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었다. 게임을 통하여 나는 내가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나는 게임을 통하여 내 자신을 증명해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 목표가 허무하다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입학한지 몇 달만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중학교 동창들과 달리 게임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은 머리가 비상하거나, 성적이 좋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노래를 잘 부르거나, 친화력이 매우 좋거나, 마음이 아주 넓은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생각하였으나, 게임을 잘하는 사람을 보고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게임에 흥미가 많이 떨어졌다. 여전히 게임이 주는 원초적인 자극은 좋았지만 게임에 이기고 점수가 올라도 예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동떨어진 느낌이었고 가슴이 허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을 시작할 무렵에 자존심을 챙기기 위하여 공부하기 시작했다. 운동, 노래, 친화력과 배려심을 보이는 것 모두 내가 두각을 보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나마 한때 중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나마 잘했었던 공부라는 분야에서 남들의 주목을 받고 싶었다.
한동안 공부를 손에서 놓았었기 때문에 적응하기 쉽지는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것이 중요한지 잘 알지 못했다. 이해만 하고 넘어가도 될 사소한 부분들에 집착했고 꼼꼼히 봐야 할 부분은 그냥 넘겼다. 하지만 단순히 눈앞에 주어진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적화된 나만의 공부 방식 자체를 세우려고 노력하다보니 점차 효율이 올라갔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전략을 짜듯이 과목마다 그 과목의 특성, 선생님의 교육 및 문제 출제 방식, 그리고 나의 습관과 부족한 점 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느냐에 대한 훌륭한 다른 글들이 이 책에 많이 실려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이만 줄인다. 어쨌거나 2학년 1학기 때 나는 처음으로 상위권의 성적을 받았고 그 덕에 2학년 2학기에는 학교에서 수여하는 장학금을 받았다. 비록 금액 자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계기로 내가 주변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조금은 달라진 것을 느꼈다. 모르는 문제에 대해 나한테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어머니께서 학부모들 모임에 나가면 다른 학부모들이 내가 어느 학원을 다녔기에 성적이 그렇게 올랐냐고 물어보곤 했다. 수업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졸던 학생에서 수업의 흐름을 정확히 짚고 질문을 하는 학생이 되니 선생님들도 나를 달리 보는 것 같았다. 학업적인 분야에서 내 재능과 노력을 인정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보다 더 대단한 성과를 낸 친구들도 많았다. 성적이 많이 올랐지만 학년에서 최상위권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성적으로 다 드러나지 않는, 특정 분야에 대해 번뜩이는 영재성을 가지는 뛰어난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지는 것이 싫었다. 게임에서 지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이유와 정확히 같은 이유로 나는 내가 생각한 경쟁자들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자신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못했기에 그들과의 비교에서 항상 공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차츰 주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몇몇 아이들은 나를 재수 없다고 생각했고, 공공연하게 내 뒷담을 하였다. 너희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 했으나 자존심은 깎여만 갔다. 얄궂게도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한 욕구가 너무나 컸기에 그들의 인정을 못 받게 된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이루려 했다. 게임에서든 공부에서든 최고가 되어 인정을 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쫓기며 살면서 마음엔 여유가 없었고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러던 중 2학년 2학기에 한 과목을 듣게 되었다. ‘AP Physics C’라는, 대학교 1학년 난이도의 일반 물리학을 두 학기에 걸쳐서 배우는 과목이었다. 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께서는 한 문제를 내셨다. 중력과 좌표계에 관한 문제였는데, 이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들은 연립방정식으로도 풀 수 있는 것이었지만 선생님이 주신 것은 꽤나 복잡해서 매우 헷갈렸다. 문제를 풀 시간을 조금 주신 후 답을 알려주셨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선생님이 알려주신 답이 내가 보기에는 틀린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그 답이 맞겠거니 하고 넘어가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수업이 끝난 후 기숙사에 돌아가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보고, 책도 다시 읽으면서 내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수업시작 전에 조금 일찍 선생님을 찾아뵈어 왜 선생님의 답이 틀린 것 같은지 설명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그 이의제기를 수용하셨고 수업시간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시고 답을 정정하였다. 그때의 성취감은 그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렵게만 보였던 문제를 마침내 정복했다는 것에, 그것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에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비록 하나의 작은 문제였지만 그것을 풂으로써 더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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