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겨울방학 숙제를 내지 않으려 했다. 우리 학교는 공사 관계로 봄방학 없는 겨울방학을 가졌다. 무슨 말이냐면 졸업식을 먼저 하고 겨울방학을 한다는 뜻이다. 개학을 3월에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방학 숙제를 내도 검사를 못하니까. 처음에는 ‘그래! 실컷 놀아라!’ 했다가 마음이 바뀌었다. 일기를 안 쓴 것보다는 쓴 게 낫고, 책을 안 읽는 것보다 읽는 게 나으니까. 너무나 당연한 명제가 나를 움직였다. 너희는 미웠겠지만 말이다. 물론 내가 내는 방학 숙제는 자율이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하지만 지난 여름방학에 나는 숙제를 해온 아이에게 깜짝선물을 주었다. 무려 동반1인급식1등권, 숙제면제권 그리고 자리선택권까지. 그때 쿠폰을 손에 쥔 아이들은 어깨가 귀만큼 올라갔다. 1,000원 크기의 종이 쪼가리에 이름이 적히고 유효기간이 적히자 당장 사용할 것도 아니면서 늘 필통에 넣어 다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쿠폰도 줄 수 없었다. 학교로 돌아오고 나면 이제 내가 담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스불재. 방학 숙제를 안 냈으면 이런 고민도 안 했을 테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사용할 상품권을 줄 생각을 했다가 정이 없어 보여 그만뒀다. 대신 문구점에서 문구를 가득 담았다. 너희가 매번 쓰는 연필 두 자루, 너희가 사용하는 캐릭터 그려진 지우개 말고 내가 아는 잘 지워지는 지우개 1개, 이제는 공책 정리도 해야 하니 볼펜 3자루, 볼펜은 지우개로 안 지워지니까 수정테이프 1개 그리고 형광펜과 작은 포스트잇까지. 노트북으로 편지도 짧게 썼다. 하나씩 포장하며 선물을 받는 아이들을 상상했다.
하지만 상상과는 다르게 첫날 숙제를 들고 온 아이는 딱 2명이었다. 준우와 은정이. 다른 아이들은 안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왔단다. 하긴! 나도 내가 체육 전담을 그것도 부장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루하루 지나며 아이들도 하나둘씩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늘어난 아이들만큼 질문도 늘어났다. 나는 잘 지내고 있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왜 체육쌤이 됐냐고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전만 해도 2025를 적을 때 정말 어색했는데, 이젠 2024가 옛날처럼 느껴진다. 학교는 3월이 시작이라 2025학년도를 이제 막 출발했지만 익숙해진 2025와 덜 익숙해진 2024는 1보다 더 멀어진 것 같다. 그래. 내가 이걸 좋아했었지. 아홉 살과 나누는 대화. 그 시시콜콜함. 말이 너무 많아 기겁할 때도 있었지만, 정말 순수해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대화. 순수가 하얀색이라면 아이들 덕분에 내 마음이 꽤 하얘졌을 거다. 이제 와서 그 작은 대화들이 참 그립다.
나는 아직 이름 모를 아이들과 수업하고 있다. 한 반에 2~3명만 이름을 부르고, 20명은 손바닥을 펼쳐 가리키고 있다. 이름을 모르니 계속 머뭇거린다. 기억해야 할 이름이 많아지니 관심의 밀도가 줄어든다. 정을 나누기가 쉽지 않다. 늘 불렀던 이름을 뒤로한 채 새로운 이름을 맞이해야 하는 요즘이 낯설다. 하지만 해내야지. 편지에 적은 문장처럼 걱정하지 말고 새로움을 즐겨 봐야지.
2025년 너희는 3학년이 되었고 나는 체육부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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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첨 [2-0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
안녕!
2학년 0반 친구들! 방학 잘 보냈나요?
선생님은 아-주 바쁜 방학을 보냈답니다.
친구들이 이 편지를 읽을 때엔 아마 선생님은 체육쌤이 되어 있겠죠?
올해 선생님은 체육을 가르치게 되었어요!
낯설고 새로운 일이라 조금 걱정도 되고 떨려요.
3학년이 된 여러분도 아마 그렇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잘 해낼 거예요!
걱정 말고 새로움을 즐겨 봅시다 :-)
방학 때도 열심히 성장한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멋져요 정말!
3학년이 된 친구들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며 선물을 골랐어요
잘 사용하길 바라요!
2025년도 즐겁게 지내봅시다!
오며 가며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기 :-)
-2024학년도 2학년 0반 담임 이건우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