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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계단상

by 건우

아이들이 너무 예상한 대로 대답을 하면 이상하다. 사방팔방으로 튀어야 할 아이들 생각이 건우라는 틀로 콱 찍어버린 것만 같다. 국어 교과서에는 글을 읽고 내용을 확인하는 질문이 꼭 3개씩 나온다. ‘건우가 집에 왔을 때 동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와 같은 질문이다. 정답이 없는 질문도 나온다. ‘건우의 기분은 어땠을 것 같나요?’와 같은 질문이다. 정답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의 정답은 있다. 정답의 범주가 있다. 누가 봐도 무서운데 기쁘다고 말하면 아니니까. 대부분은 범주 안에서 대답을 한다. 그런데 내가 예상한 대답과 너무나도 동일할 때가 있다. ‘오 맞아!’하며 기뻐했다가 이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윤아가 집에서 학습지를 한다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자기가 쓴 시가 나온 문제를 자신이 틀렸다는 일화*가 생각이 난다. 그렇다고 해서 대답이 내 범주를 벗어나면 가차 없이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나는 딜레마에 빠져 산다. 하지만 그날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길 간절히 바랐다.


통합 교과 시간, ‘우리 반 시상식’이라는 이름의 수업을 했다. 친구 중 칭찬하고 싶은 친구 한 명을 뽑아 상을 주는 수업이었다. 직접 상 이름도 짓고, 상장도 만들어 보는 시간. 연말에 딱 어울렸다. 아이들은 각자 친구를 떠올리며 상장을 만들었다. 꾹꾹 눌러쓴 글자로 상의 품격을 알 수 있었다. 종이었던 게 단순히 종이가 아니게 되었다. ‘발표왕 상’, ‘그림잘그려 상’, ‘응원 상’. 상이란 상은 다 나왔다. ‘축드 상’도 있다. 축구 드리블 상이란다. 하지만 ‘최우수상’은 없었다. 그래서 멋졌다.


상을 다 만든 후, 우리는 시상식을 열었다. 나는 시상식에 어울리는 ppt 화면을 준비했다. 멋진 트로피 이미지 위에 ‘2학년 2반 친구 시상식’이라고 적었다. 시상식 음악까지 재생하니 제법 웅장했다. kbs 연예대상은 벌써 저리로 갔다. 나는 아이들이 쓴 트로피와 상장을 들고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이해해주는 상! 김유진 앞으로!”

아이들의 환호와 함께 유진이가 쭈뼛하며 앞으로 나왔다. 진짜 상도 아닌데. 아니, 이게 진짜 상이지.

“위 학생은 ‘친구의 말을 항상 이해해 주고 항상 친구를 이해해서 친구를 이해하’기에 이 상장을 주어 칭찬합니다. 2024년 12월 26일 00초등학교 2학년 0반 ‘너한테 응원받은 유림이가’”

상장과 트로피를 유진이 쪽으로 돌려 건넸다. 유진이는 두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 친구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골키퍼 상!”

말하자마자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이건 상민이 거네”

정답. 이건 상민이 상이었다.

“위 학생은 ‘축구할 때 골키퍼를 했을 때 공을 다 막았’기에 이 상장을 주어 칭찬합니다.”

이렇듯 어떤 상은 모두가 바로 그 친구를 떠올리게 했다.


“너무착해라 상! 송하이 앞으로!”

하이는 친구들에게 고운 말을 쓰고 선생님에게도 착해서 상을 받았다. 이 상은 하이 앞자리에 앉은 하윤이가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하윤이는 하이가 만든 상을 받았다. 고운말 상. 둘은 상을 핑계로 우정을 주고받았나 보다. 사실 둘만 그런 건 아니었다. 다들 그랬다. 우정을 넘치게 받은 아이도 있다. 지민이와 우민이는 2개를 받았고, 혁규는 4개나 받았다. 하지만 그 말은 누구는 받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상을 받지 못한 아이는 총 7명이었다. 교과서 부록에 더 이상 상장은 없었다. 다행히 트로피는 여분이 하나씩 더 있었다. 나는 상을 받지 못한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 냈다. 그리고 그 친구들만을 위해 트로피를 하나씩 더 만들자고 했다.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바로 트로피를 만들었다. 만들어진 트로피와 함께 우리는 두 번째 시상식을 열었다. 7명만 대상으로 했더니 중복 시상이 많았다. 승한이 2개, 진우 4개. 현지는 무려 6개나 받았다.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연수는 전혀 다행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연수의 표정을 계속 봤다. 내 바로 앞자리였지만 첫 번째 시상식 때 받지 못해 이미 기분이 상해 보였다. 어색한 눈꼬리. ‘왜 나는 안 줄까?’하는 실망감이 담긴 눈동자와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짓는 괜찮아 미소. 나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 두 번째 시상식에서 트로피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제발 하나만. 한 명만 써라. 하지만 마지막 트로피에도 연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실망한 연수를 그대로 집에 보낼 수 없기에 나는 재빨리 빈 트로피를 손에 들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연수는 특별히 선생님이 직접 상을 줄 거라고 말했다. 조금 크게 말했다. 그리고 머리를 굴렸다. 고민을 했지만 마음에 드는 이름이 빨리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지만 흔한 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나는 네임펜을 들고 트로피에 적기 시작했다.


연수가 좋아하길 바라며 상을 건넸다. 상 이름과 이유를 말하니 아이들이 환호했다. 예상을 빗나가버려 세 번째 시상식을 해야 했지만 동시에 예상 밖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기지를 찾았음에 감사했다. 집에 갈 때 나는 연수에게 다시 물어봤다. 선생님이 준 상 어떻냐고. 연수는 좋다고 말했다. 진짜였다. 그래서 나도 좋았다. 세 번째 시상식은 이랬다.


“연수! 앞으로 나오세요! 연수에게 주는 상 이름은 ‘황금계단상’입니다. 연수가 학기 초에는 글씨도 막 쓰고 연필도 제대로 안 잡고 일기도 적게 쓰고 그랬는데, 지금은 글씨도 예뻐지고 연필도 제대로 잡고 일기도 멋지게 써내거든요. 계단처럼 하나씩 하나씩 성장해서 황금계단상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너를 언제나 응원하는 우다쌤이. 박수!”


*‘북어’, ‘대설주의보’를 쓴 최승호 시인의 일화.(2009년 11월 21일 중앙일보 [토요인터뷰] 최승호 시인 “내 시가 출제됐는데, 내가 모두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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