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어제 첫눈이 내렸다. 첫눈은 여운이 남지. 멀리 산속 나무들에 켜켜이 쌓인 눈은 스위스를 떠올리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출근길에 많이 녹은 눈이 아쉽긴 했지만. 학교 앞 횡단보도에 도착했다. 출근할 때마다 종종 만나던 승한이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한이에게 말을 걸으려고 손을 뻗는 찰나에 초록불이 켜졌다. 승한이와 나는 멀어졌다. 그러다 승한이 손에 눈길이 갔다. 승한이는 장갑을 들고 있었다. 스키를 탈 때 끼는 두꺼운 장갑. 어제는 윤아가 들고 왔던 장갑. 나는 눈이 왔다고 스키 장갑을 들고 오는 너네들 심보가 좋다.
어린이와 자라나는 어린이
“선생님. 6살로 되돌아가고 싶어요. 6살은 숙제도 없고 공부도 안 해도 되잖아요.”
“…”
“선생님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현지의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급식 먹다 말고 생각에 빠졌다. 언제로 되돌아가면 좋을까. 중학교를 떠올렸다가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갈 것 같다. 고등학교를 떠올렸다가 다시 쎄빠지게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래. 대학교가 낫겠다. 한참 지나서야 현지에게 대학생이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이 무심코 건넨 말이 나를 자꾸 멈추게 한다. 하지만 아이들 말은 가볍게 여겨지곤 한다. 화자가 아이라는 이유로 작게 여기곤 한다. 말이 아니라 글자였다면. 영화 자막처럼. 그러면 다들 나처럼 멈칫하겠지. 최승호 시인의 말처럼 어린이가 덜 자란 어른이 아니라 어른이 자라나는 어린이일 뿐이다.
탕수육
“탕수육 좋아해?”
“네”
(안 먹고 있는 걸 보고 있다.)
“파는 거요.”
아직 모르는구나. 너도 나중에 남이 해주는 밥은 다 맛있다는 걸 알 거다.
줄넘기
점심시간마다 줄넘기를 하자고 했다. 우진이와 하람이는 좋아했고, 하이는 꼭 해야 하냐고 물었다. 자기는 줄넘기를 못 한다면서. 한 개도 못 한다면서. 설마 한 개도 못 할까. 하이도 나도 표정이 안 좋았다.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하이는 줄넘기를 못 했다. 진짜 한 개를 못 넘었다. 나는 줄넘기 레슨을 시작했다. 하이에게 너가 줄을 넘길 때 쌤이 ‘지금!’이라고 말할 건데 그때 뛰라고 했다. 하이는 줄을 돌렸다. 나는 돌리자마자 외쳤다.
“지금!”
하이는 내가 그렇게 빨리 부를 줄 몰랐던 눈치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지금”을 외쳤다. 반복하니 한 번은 넘을 수 있었다. 줄넘기 한 번에 칭찬 한 번. 줄넘기 한 번에 칭찬 한 번. 줄넘기와 칭찬은 비례했다. 옆에서 쌩쌩 줄을 넘던 아이들은 부러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우리는 연속 4개까지 성공했다. 원래 50개를 해야 하지만 하이는 봐줬다.
웃으며 배우도록 돕습니다. 내 교육 모토다. 나는 저 문장에서 돕는다는 단어가 좋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사실 돕는 사람이다. 가르친다고 가르쳐지던가. 결국 자신이 배워야 하는 법. 나는, 교사는, 아이가 그렇게 배울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줄 뿐이다. 기왕 배우는 거 웃으면 더 좋고.
그날 하이는 웃었다. 이제는 130개도 거뜬히 해낸다.
100만 원
“어! 아빠가 만든 우유다!”
“아빠 서울우유 다니셔?”
“네!”
“(조금 있다가) 아빠 100만 원 넘게 받는대요. 못해도 100만 원은 넘는대요.”
숫자에서 느껴지는 순수가 있다. 아이들이 10만을 말하는 건 많이 못 봤다. 100만을 썼다면 꽤 현실적인 아이라고 본다. 억과 조는 사랑받는다. 경을 사용하는 게 진짜다. 해도 쓰더라. 9도 좋아한다. 예를 들면 구천구백구십구억. 나랑 반대구나.
자리 바꾸기
매월 마지막 금요일 5교시는 아이들이 고대하는 날이다. 자리를 바꾸는 시간. 아이들에게 정말 큰 이벤트 중 하나. 그래서 ‘자리 선택권’ 쿠폰도 가치가 높다. 자리를 바꿀 때는 전자 칠판에 있는 뽑기 버튼을 아이들이 직접 클릭하는데, 클릭할 때마다 환호성이 장난 아니다. 잠재우지 않으면 교실은 떠나가고 없다.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다들 각자가 원하는 자리가 있다. 왼쪽 앞자리에 가고 싶고, 중간이 좋다고 하고. 사실 더 중요한 건 아마 자기 주변일 거다. 내 짝꿍이 누군지, 내 모둠에 누가 있는지. 다들 속으로 친하게 지내는 단짝이 내 근처에 있는 걸 원하고 바란다.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면, 친하지 않더라도 같은 모둠이 되고 나면 “와! 나 너랑 같은 모둠!” 하면서 서로 좋아라 한다. 그렇게 둘이 새로이 친해지곤 한다. 괜히 돌아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말이다.
반대로 짝꿍이 이성이라서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행위는 옳지 않기에 나는 작전대로 두 가지 대응 조치를 취한다. 첫 번째,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 반대 입장이라면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두 번째가 중요하다. 눈싸움. 나는 자리 바꾸기가 끝나면 짝꿍과 눈싸움 시간을 가진다. 서로가 어색할 그 시점에 긴장을 풀어버릴 놀이를 해버린다. 한국 사람들은 눈을 못 마주친다는데, 얘들은 한국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서로 눈을 잘 본다. ‘준비’를 외치면 어색하던 공기는 사라지고, ‘시작!’과 동시에 서로가 눈을 쳐다본다. 그리고 교실에는 웃는 소리가 가득해진다.
작전 성공이다.
선택 인사
출근을 하면 아이들이 내 책상 옆에 우루루 서 있다. 아침마다 하는 선택 인사 때문이다. 6개의 인사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인사를 말한다. 그냥 안녕하세요, 악수, 주먹 인사, 하이파이브, 포옹 그리고 원하는 대로가 있다. 여학생은 포옹을 많이 선택한다. 나는 여학생에게는 몸을 조금 뒤로 뺀 채 포옹을 한다. 남학생은 하이파이브를 좋아한다. 가끔은 손이 아플 때가 있다. 자신의 강함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말이다. 하지만 우근이는 꼭 포옹을 선택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포옹을 선택할 때면 마음이 조금 시리다. 그래서 나는 우근이를 꽉 안는다. 아주 세게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