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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지 않기

by 건우

교실에 쏟아진 우유를 그대는 본 적이 있는가.


뜯은 우유는 다 마셔야 한다고 누누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중에 먹을 거라며 다시 접어놓은 꾸깃한 우유는 어김없이 화를 자초한다. 아이가 우유를 쏟으면 나는 얼른 휴지를 가져오라고 말한다. 아이는 화장실에서 돌돌 말아온 휴지로 바닥을 닦는다. 그리고 물티슈로 한 번 더 닦는다. 그리고 또 휴지로 물기를 닦는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만 본다. 놓친 우유 자국을 발견하면 저기 있다고만 말한다. 일단락을 지을 때까지 나는 한없이 매정한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돕지 않는 게 돕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일을 대신하지 않는 것. 해주지 않기는 여러 배움의 시작이니까.


재운이는 눈을 많이 비빈다. 눈 주위가 빨개질 때까지 비비곤 한다. 눈을 비벼서 빨개지는 건지 눈물이 나서 빨개지는 건지는 재운이만 안다. 지난 국어 시간, 재운이의 얼굴은 또 빨개졌다. 글을 읽고 뒤에 이어질 이야기를 상상하는 수업이었다. 모둠마다 이야기를 소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운이네 모둠만 빼고. 거긴 조용했다. 5 모둠에 가니 은정이와 진우는 재운이를 보고만 있었다. 재운이도 처음에는 이야기했단다. 하지만 마스크 때문인지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진우는 재운이에게 말했다.


“재운아, 다시 읽어 줄래?”


평소 재운이가 발표를 힘들어하는 걸 알고 있는 듯한 아주 정중한 요청이었다. 감탄하기도 전에 재운이는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빨개질 때까지. 나는 재운이 옆 빈자리에 앉았다. 한번 발표해 보자며 열심히 독려했다. 하지만 재운이는 눈을 비비기만 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니 조금 화가 나더라.


“손 내리세요. 눈 비비지 말고.”


이겨내라고 말했다. 읽을 수 있다고. 재운이는 내 말 때문에 손도 못 올리고 훌쩍이기만 했다. 한참 훌쩍이던 재운이가 숨을 들이켜더니 드디어 단어 두 개를 내뱉었다. 하지만 들이켠 숨은 기껏 참은 울음을 데려왔다. 또다시 눈을 비볐다. 그렇게 손을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는 사이에 다른 모둠 아이들은 다 했다며 말을 걸어왔다. 반 아이들이 손을 씻으러 간 후에야 재운이는 발표를 끝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채은이와 진우를 보내고 나는 재운이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눈물이 났는지 물었다. T스러운(?) 질문이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다. 재운이는 망설였다. 또 훌쩍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한 마디가 들렸다.


“부끄러워서”


진짜 아이 같은 이유다. 재운이는 발표가 너무 부끄럽다. 학기 초부터 그랬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칠판 앞까지 나가야 할 때면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어렵게 시작한 발표는 끝부분에 갈수록 잘 안 들렸다. 재운이에게 발표는 높디높은 산이다.


“재운아, 너 발표 잘 해냈어. 처음에 기억나? 발표 잘 안 했잖아. 근데 요즘은 스스로 손도 들고, 감정 발표도 하고. 맞지? (재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성장했지. 잘한 거야~”


나는 굳이 기다렸다. 내가 재운이 글을 대신 읽어도 됐지만. ‘다음에는 꼭 발표해 보자~’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짜증이 나긴 했지만, 굳이 기다렸다. 재운이가 나중에 3학년이 되고, 4학년이 되고. 5학년, 6학년 그리고 중1이 되어서도 발표는 재운이가 해야 할 일이니까. 해주지 않는 것. 그게 그때 내가 할 일이었다.


의미가 흐릿한 대신을 경계해야지. 예전에는 하이가 사람을 못 그린다고 하면 내가 대신 그려주곤 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확연히 부드럽게 그려진 사람을 본 하이는 좋아했지만 딱 거기까지다. 기분만 좋아지고 배움은 없다. 학교가 진정 작은 사회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우여곡절이 필요하다. 우여곡절이 있다면 성장도 있다는 뜻이니까. 반대로 편하기만 하다면 의심해 볼 필요도 있겠다.


사실 나도 우유 자국을 발견하면 닦는다. 쏟은 아이가 일 처리를 끝낸 다음에 한다. 어릴 적 내 설거지를 다시 하는 엄마처럼. ‘으이구!’ 하면서 허리를 굽힌다. 근데 우유를 뜯었으면 다 마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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