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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의 화신 Nov 02. 2024

끝에서 청춘/박노해

귀한 줄도 모르는 젊은 날의 저주받은 축복




"왜 신은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을

귀한 줄도 모르는 젊은 날에

저주받은 축복처럼 던져준 걸까"




끝에서 청춘/박노해


시간, 쏜살이다

청춘, 순간이다


번쩍, 하는 사이에

내 젊음은 지나갔다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모든 것이 두근대던 시절

세상 모든 것이 나를 보고 있었고

세상 모든 것을 내가 보고 있던 나이


야수와 소년이, 해와 별이,

활화산과 칼데라가, 불꽃과 얼음이,

광인과 시인이, 칼과 꽃이,

수시로 몸을 바꾸며 술렁이던 나이


귀한 줄도 모르고 그냥 주어져 버린

그때, 그 짧은 영원의 순간에

내 운명의 지도가, 첫 마음이,

첫사랑과 상처가, 삶의 좌표가

내면에 빛의 글자로 새겨져 버린 나이


이제 와 생각하니

맨가슴엔 불안과 고뇌가 많아서

맨주먹엔 슬픔과 분노가 많아서

그래서 나, 생생히 살아있던 나이


다시 한번, 단 한 번만이라도

가닿고 싶어도 끝내 갈 수 없는

저 신화의 땅

찬란한 초원


왜 신은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을

귀한 줄도 모르는 젊은 날에

저주받은 축복처럼 던져준 걸까


가을 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하네

신은 청춘을 인생의 처음에 두었으나

나는 인생의 끝에 청춘을 두고서

푸른 절정으로 불살라갈 거라고


그래, 나는 시퍼렇게 늙었다

나는 번쩍, 푸르러가고 있다


<너의 하늘을 보아 p516 >












"내가 만약 신이라면 청춘을 인생 가장 마지막에 두었을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


아나톨 프랑스의 문장을 오래전 소설에서 스쳐간 적이 있었으나 당시엔 젊음이 흥청망청했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청춘의 푸름이 쇠락하는 가을이 당도한 지금에서야 "귀한 줄도 모르고 그냥 주어져 버린 그때"를 회상하며 자문한다.


시인이 말하는 활화산과 불꽃, 야수와 광인이 나에게도 찾아왔었나? 아니요..


쟁쟁했던 내 젊었던 날이었다고 포장하려 해도 비루한 껍데기만이 나뒹군다.


그랬는데..


이제는 젊은 날의 성공을 덜어냈느냐고 아프게 묻는다.


"태어나서 뭘 갖고 싶고, 의미를 부여하고, 열정을 갖고 뭘 하는 건.. 봄. 여름까지 그렇게 하는 거고, 가을. 겨울 되면 이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는 거예요.

어떤 시기에 그것을 탐착 할 수는 있지만 그다음 단계가 오면 반드시 덜어내야 된다는 것"

<고미숙 인용>



봄. 여름에 열정을 갖고 이뤄 낸 것 중에 덜어낼 무엇이 있긴 하나? 아니요..


때때로 신산한 삶을 견뎌오며 절로 긍정의 화신이 되었다는 것인데,


산 사람들 저마다의 사연으로 논픽션 작품의 주인공 아닌 사람들이 없으니 성취라고 이름 붙이기가 추레하다.


"신화의 땅, 찬란한 초원"으로 회귀는 불가능하기에

시인은 인생의 끝에 청춘을 두고 불사른다고 하는데


나에게 남은 불쏘시개가 있긴 할까?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 어느 곳에 배치하든 뭘로 불붙게 해야 하는지를 여태껏 미적거리는 나를 들여다보는데


아웃풋으로 나를 증명할 방법이 요원하던 차에 이철수 판화 작가의 글이 구원수로 등장했다.





         <내일이 와 준다면 그건 축복이지! 中>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를 게 없는 예사로운 하루를 사는 것이 인생이라 하니, 자기 개발서와 상충하는 내용이라 짜릿한데


행여나 무덤덤한 어제와 오늘에 내밀한 은유가 숨어 있어

어제의 나를 해체하고, 새로운 나의 시작을 알리는 능동성을 말하려 한다면


허허실실로 '내일이 와 준다면 그걸로 족해'라고 일격을 날리고 내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


밤하늘에 달이 이지러졌다 둥글어짐을 반복하는 규칙과 나의 일상이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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