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풀니스>를 읽고
며칠 전에 한 크루분이 '수영님은 우선순위 설정을 어떻게 하세요?'라고 질문을 해왔다. (처음엔 슬랙을 보냈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답장을 못 하자 메일까지 보내서 나를 쪼았다.. 멋진 어그레시브함이었다 ㅋㅋ) 덕분에 내가 보통 어떻게 여러 일들의 우선순위를 나누고 의사결정을 하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분명 더 좋은 방법이 있겠지만, 아무튼 현재는 이렇다.
1) 왠지 해야 할 것 같은 것들을 무작위로 나열한다. 가능하면 '~하기'보다는 '~라는 문제 해결하기' 같은 식으로 쓰려 노력한다.
2) 그 중 왠지 중요할 것 같은 것들을 직관적으로 골라낸다. 아무리 많아도 옵션은 다섯을 넘기지 않으려 한다. 인간은 보통 옵션이 다섯 개가 넘어가면 그것들을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 (직관적으로 선별된) 옵션들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분석한다. 대개는 각각의 옵션 별로 짧은 글을 써보는 편이다. 이 옵션은 이래서 중요하고, 이래서 급하고, 이래서 할 수 있고, 이런 점이 위험하고 등등. 구체적인 일정이나 숫자를 최대한 많이 집어넣으려고 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보통은 우선순위가 대체로 정리되는 편이다.
4) 그래도 정해지지 않으면 다시 직관에 따른다. 이번에는 '왠지 좋을 것 같은'보다는 '마음이 당기는' 또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걸 기준으로 삼는다. 매사에 너무 호오에 휘둘리면 좋지 않지만, 아직 인격 수양이 충분하지 않아서 그런지 이왕이면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을 해야 성과도 잘 나오는 것 같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직관으로 시작해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석을 거친 다음, 내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셈이다. 무언가를 잘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둘 다 필요한 것 같다. 직관은 의사결정에 필요한 시간을 줄여주고, 분석은 정확도를 높여준다.
컴퓨팅 파워의 증가로 인해 분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직관의 중요도가 시간이 갈수록 낮아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복잡하고, 또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의사결정을 할 때 고려해야 하는 변수와 충돌하는 가치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시간은 더 부족해진다. 직관은 점점 더 중요해지게 될 것 같다.
다행히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직관으로 인한 정확성의 부족과 분석으로 인한 시간(또는 인내심)의 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덕목을 제시해 줬다. 겸손과 호기심이다.
”겸손이란 본능으로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기존 의견을 기꺼이 바꾸는 것이다. (…) 호기심이란 새로운 정보를 마다하지 않고 적극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아울러 내 세계관에 맞지 않는 사실을 끌어안고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직관을 다른 말로 하면 편견이다. 우리는 편견이라는 렌즈를 통해 시간적 여유를 확보한다. 편견의 문제는 만들어진 시점에는 얼추 현실을 잘 반영했을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조금만 업데이트를 게을리하면 순식간에 우리를 과거로 안내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인지하고, 필요할 경우 보정을 하지 않으면 시간을 아끼려다가 기회 자체를 날려버릴 수 있다. 한스 로슬링은 이걸 '겸손'이라는 우아한 단어로 표현했다.
호기심도 중요하다. 누군가가 나를 쫓아다니면서 '너 이거 이러이러하게 틀렸으니까 고쳐'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수동적으로 겸손해서는 소용이 없다.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걸 깨우쳤을 때에는 이미 기회가 떠나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나의 오류를 찾아나서는 게 습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인한 세상이다.
우선순위로 시작해서 직관을 거쳐 겸손과 호기심으로 끝난 글. 한 달에 한 번은 독후감을 SNS에 올리려다 보니 (나와의 약속이다) 뭐랄까 약간 무리수 같은 글이 나오곤 한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