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1.
고3 때 '중앙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목표로 수능 공부를 했었다. 그 학과에 입학하면 책 병풍으로 둘러친 도서관의 사서가 되어 안온무사(安穩無事)하고 안한자적(安閑自適)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점수로는 어림이 없었다. 다른 대학의 문헌정보학과도 반푼이었다. 결국, 담임 선생님이 내 점수에 맞추어 골라주신 대학 3곳에 응시했었고, 그중 한 곳의 '무역학과'에 합격했다. 그것도 예비로.
기왕 이렇게 된 거 졸업하고 종합무역상사에 취업해 일하다가 오퍼상(Offer商)으로 독립해 돈을 크게 벌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입학한 그 해 12월, 외환위기가 터졌다. 쫓기듯이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뺑이를 치고 학교에 돌아왔더니 사정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결국 동기들보다 1년 반 뒤처진 채 졸업을 했고, 중소기업의 구매 사원으로 겨우 취업을 했다. 무역상사 취업을 위해 따놓은 무역영어 1급 자격증 및 기타 자격증 덕분이었다. 그래도 두 배로 열심히 일하고 자기계발을 하면 나름 녀석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야근을 하고 영어학원도 다녔다. 하지만 회사가 작으니 커리어 성장도 한계가 있었다. 다시 계획을 세웠다. 뒤쳐졌으니까 단숨에 따라잡을.
1년을 바짝 준비한 끝에 중견기업에 이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력은 인정되지 못했다. 2년 경력이 있는 신입이 되었다. 당연히 연봉도 그만큼 이었다. 오기가 생겼다. 기필코 구매 담당 임원이 되리라. 원대한 비전 아래에 미션을 구체화하고 장단기 목표를 열거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현실과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꿈만 높은 탓에 노력을 했음에도 신의 손가락은 나를 지목하지 않았다. 남은 건 쇠약해진 몸과 부서진 멘탈이었다. 하긴, 지금에서 생각하면 임원이 될 능력도 없었고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었다. 이런 게 인생인가 싶었다. 혹자가 그렇지 않았던가? 원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2.
일본의 PDCA 관련 서적들이 국내에 소개된 바가 있었다. 그 책들의 핵심 키워드는 '성장', 성공', '완벽'이다. 『PDCA』( Plan-Do-Check-Action)는 제조업에서 생산 및 품질을 관리하는 도구의 하나로써 4단계를 반복 수행하여 업무를 개선하는데 목적이 있다.
단순히 설명하면 이렇다. 계획(Plan)을 세우고, 실행(Do)을 하고, 결과물(Result)을 확인 및 평가(Check)하고, 문제를 사후 분석(After Action Report) 한 후에 확인된 피드백(Knowledge Feedback)으로 개선(Action)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구가 목표 달성을 이루는데 훌륭하다 보니 점점 적용 범위가 개인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한때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PDCA 바람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책들이 모두를 성공의 반열에 올려두지 못했다. 아니 모두의 목표와 계획을 전부 달성하고 실행하면서 성공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이미 말했다시피, 인생은 원래 계획된 대로 흘러가지 않으므로.
3.
2009년 NBC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자라 '공중파 토크쇼 호스트'를 금지당한 코난 오브라이언은 몇 개월 은둔하다가 2010년 4월부터 6월까지 자신을 따르던 멤버들과 함께 『법적으로 TV에서 웃기는 게 금지된 투어(The Legally Prohibited from Being Funny on Television Tour)』라는 이름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 그는 트위터로 코미디를 시작했고, 수염을 길렀으며, 가죽 바지를 입고, 기타를 쳤다. 그가 이전에 시도해 보지 않은 것들이었다.
공연 이후에 코난은 TBS 케이블 방송국과 계약하여 『코난 쇼』를 론칭하게 된다. 그렇게 복귀한 그는 2013년 백악관 만찬 행사에 초대되어 오바마 대통령 앞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인지 헷갈리는 연설 했는데, 이때 NBC의 투나잇 쇼의 진행자가 세 명이나 된다며 유쾌한 복수를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만찬 행사에 초대되기 두 해 전에 다트머스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 나섰는데 '데이비드 레터맨'처럼 되고 싶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실패가 있었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토크쇼를 변화시키고 도전하며 즐길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쓰라린 실패와 우연한 기회를 통해 그는 코난쇼를 훌륭하게 하고 있다.
4.
MZ세대 끝에 걸쳐 있는 나의 지인은 제빵사다. 그녀의 목표는 자신이 브랜딩 한 커피와 직접 구운 조각 케이크를 함께 파는 디저트 카페를 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제빵 일을 멈추고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했다. 그런데 바리스타 학원에서 만난 사람이 소개한 우연한 기회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제빵을 가르쳤다. 처음에 그녀가 강의 제안을 수락하기 전에는 고민이 많았다. 잘할 수 있을지는 둘째 문제였다. 그녀가 세운 계획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강의 4시간을 위해 다른 것들을 제쳐두며 준비한 그녀는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며 강의는 성공적이었다고 전했다. 학교에서도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고, 그녀도 제빵을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그녀는 결국 두 가지를 다하기로 했다.
나는 한때 상담심리사가 되려고 했다. 2년간 직장을 다니면서도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상담심리대학원 입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차이를 알고 나서는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공부 덕분에 나는 사람과 세상을 조금 더 깊게 바라보는 삐딱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때 마침 브런치 글쓰기 플랫폼이 생겼고, 브런치에 글을 잘 쓰면 '작가'로 뽑아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은 부지기수였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내 글을 그저 쓰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6년이 지났고 지금은 유튜브에서 책튜브를 시작하고, 네이버에서 직장인 투자자로서 경제 블로그도 하고 있다. 계획과 달리 우연의 연속으로 만들어진 삶이다.
5.
우리가 목표한 꿈이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속 가능하고 현실성 있는 계획은 필요하다. 하지만 계획은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수단을 목적으로 잘못 혼동하면 고통을 받기도 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과도한 반성을 하거나 화를 내기도 하고, 혹은 실패로 간주하여 좌절하고 우울해한다. 물론, 좋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완벽히 하면서 목표한 꿈을 이루는 것이 해피엔딩이지만 우리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분노하거나 슬퍼하면서 고통받을 필요는 없다. 계획을 세우고 도전하다 보면 새로운 가지를 타고 생경한 세계로 빠져들 수 있는데, 그때 계획 자체를 고집하면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내 주변에 성공한 사람들은 좋은 계획을 수립하고 잘 지키면서도 우연한 기회를 만나 다양성을 확장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성공은 물질과 부를 척도로 삼지 않는다. 그들 개개인마다 가치 있고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다.
계획이 망가져도 괜찮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 실패를 통해서 배운 경험으로 다시 계획을 세우고 나아가면 된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계획 없이 삶을 이어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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