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서 못 가는 대신에 응원하고 싶습니다.
1.
제법 큰 눈을 가진 범이는 안경을 벗으면 눈이 작아졌다. 그 상태로 웃으면 녀석의 눈은 더 작은 반달눈이 되어 우리를 푸근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선한 표정을 짓고 있던 99학번 동아리 후배가 범이였다. 요즘 말로 하면 녀석은 인싸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동기들 뒤에서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어주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매번 방학이 되면 동아리 모임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새 학기가 되면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과 구레나룻 수염을 기른 채 우리 앞에 나타나곤 했다. 앳된 소년의 얼굴을 이제 없고 등이 넓고 단단한 성인 남자의 얼굴이었다.
범이는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것도 해외여행을. 그 시절의 나로서는 감히 여행을 꿈꿔 본 적이 없었다. 여행은 내게 사치였다. 당시 나의 최대 지상과제는 좋은 학점을 얻고 필요한 자격증을 따서 원하는 기업에 취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와 동기들은 방학기간 (또는 휴학을 하면서도)에 대기업 또는 경제 산학기관의 인턴에 지원하거나 그곳에서 주최하는 이벤트에 참가하곤 했었다. 그마저도 어려우면 입사지원서 자격조건인 영어 공인점수(Toeic 또는 Opic)를 충족하기 위해 학원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늦은 밤까지 불을 밝혔었다. 외환위기가 터져서 쫓기듯 군대에 다녀온 이후에도 집안의 경제사정은 좋지 못했기에 더더욱 녀석이 부럽기도 하면서도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듯했다. 속으로 혀를 세 번 차면서도 부러움의 눈흘김이었다. 따라서, 내게 투영된 성공의 척도로 보면 녀석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2.
과거의 혁신이 그러했듯이 혁신은 인간에게 생산성 향상과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왔다. IT혁신도 마찬가지었다. 자연의 거미줄보다 더 복잡한 실타래 연결망 기반 위에 세상을 정복한 인터넷은 다양한 사업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했다. 그중에 하나가 소셜미디어와 플랫폼이었다. 기존의 매체와 시장의 판을 뒤집은 이 혁명은 새로운 매체와 트렌드를 만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고, 거대한 창고 속에 기괴한 열을 뿜어내며 연산만 했던 슈퍼 컴퓨터에서 내 손안에 들어오는 단말기 속에서 세상을 들여다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인터넷, 맥북 그리고 백팩만 있으면 세계를 누비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누릴 수 있는 노마드 라이프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 중에 유튜브를 통해 대중 앞에 등장한 1세대 여행가들이(원지, 메이, 빠니보틀, 희철리즘 등) 있었다.
그들은 덕업일치의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행을 하면서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그것 말이다. 이는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넘어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입시, 진학, 취업, 결혼 등으로 이어지는 정해진 루트에서 과감히 이탈해도 괜찮은 인생의 출구전략이었으며 블루오션처럼 보였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촬영하고 편집을 해서 업로드는 하는 것을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장시간의 편집 작업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2세대, 3세대 여행 유튜버 등이 많이 등장했고 지금도 등장하고 있다. COVID-19 팬데믹 동안 억눌렸던 여행 욕구를 누군가의 여행 영상으로 해소한다는 것은 어쩌면 여행을 함께 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요즘의 그들에게는 전혀 새롭거나 놀랄 일이 아니다.
물론, 모든 여행 유튜버의 콘텐츠가 좋은 것만 아니다. 가끔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문구와 무모한 여행 콘셉트로 보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몸을 움츠리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가들은 오로지 수익을 목적으로 여행을 한다기보다는 여행이 어떻게 인간의 삶을 변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실시간에 가까운 수준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바가 더 큰 것 같다. 어쩌면 20년 전의 범이도 형용할 수 없지만 여행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희열에 중독된 것은 아니었을까?
3.
나도 이제는 여행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알고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읽으면서 홀로 나선 몇 차례의 제주여행을 통해 그 기쁨을 흠뻑 누렸더랬다.
그것은 단순히 염증에 곪아 터진 일상의 고단함이나 무료한 일상의 단순함에서 벗어나는 기쁨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행지는 마치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낯선 세계 혹은 이국스러움이 만연하는 곳이 되어버린다. 그곳에서 나는 완전히 '새로운 나'가 된다. 기존 세계에 속해있던 나는 잠시 머리 한 켠으로 밀려나고 긴장과 흥분으로 충만된 채로. 여행에서 나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우연 속에서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용기와 열정을 다시 발견하곤 했다. 그 연속된 과정을 통해 나의 가치를 새로 마음에 새기기도 했다.
여행지에 가면 인간의 위대한 역작과 자연의 장엄한 풍광 앞에서 경외심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한낱 자연 앞에 가벼운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삭막한 도시의 삶에서 누릴 수 없는 오묘한 자유와 평안을 낯선 곳에서 느낄 때는 신비한 감정마저 마음을 휘감는다.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내가 속한 곳으로 회귀한다는 안도감과 함께 다음 여행을 꿈꾸는 기대감에 마냥 행복하다.
4.
20년 전의 범이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청춘의 초입을 잿빛으로 그리기보다는 여행을 통해 천연색으로 채우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그때 그 시기만큼은 자기 인생의 어엿한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여행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여정인 셈이다. 그래서 응원하고 싶다. 지금 세상 밖으로 나선 모든 여행자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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