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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겸 Jun 01. 2017

그때는 나만 몰랐었네


 최고의 IT 기술과 인프라를 보유한 나라의 국민들 답게 한국 사람들은 IT 기술 습득 능력이 높다. 단순히 습득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활용능력도 그에 못지않다. 새로운 IT 기술이 개발되어 보급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한 서비스와 플랫폼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즉각 쫒는다. 그럼 수요가 생긴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요자로서 서비스를 소비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를 하면서 공급까지 한다. 그렇다고 단순 공급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트렌드와 문화를 접목시켜 또 다른 수요를 창출해낸다. 공급자와 소비자라는 분명한 관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개인방송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와 달리 접근성이 무척 낮아졌다. 적정 사양 이상의 컴퓨터, 카메라, 마이크 그리고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방송을 할 수가 있다. 그 방송에 어떤 콘텐츠를 제공하느냐는 나중의 문제이다. 그리고 개인방송은 공급자와 소비자 간에 쌍방향 소통이 가능하다. 공중파 방송 또는 종합편성 방송은 일방적으로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라면, 개인 방송은 채팅방을 통해 시청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하다. 시청자가 참여하면 개인 방송자는 즉각 피드백을 해준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참여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개인방송의 시장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약 십오륙전에도 인터넷 개인방송 서비스를 꿈꾸는 벤처 회사가 있었다. 물론 현재처럼 실시간(real time) 방송이 아닌 사전에 녹화 편집한 영상을 송출하는 방식이긴 했지만, 당시에는 꽤나 신선했다. 윈도우 미디어 인코더와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를 기반으로 방송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회사였다. 나는 친구의 소개로 그 회사를 입사했었다. 나의 업무는 회사 사업 홈페이지와 방송 플랫폼 서비스 홈페이지에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 및 게시하는 일이었다. 가끔 간단한 모션 플래시나 포토샵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코딩을 하거나 개발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하는 일이 꽤나 재미있었다. 검증과 수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내가 기획한 콘텐츠가 제작되어 웹에 게시가 되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이 일을 오래 할 거라 생각했지만 1년이 채 되지 않아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당시 벤처 회사는 요즘 말로 스타트업 회사였다. 회사가 작고 권위적이지 않아 자유로운 분위기인 것은 맞지만, 역시 작다 보니 담당 업무 이외에 다른 업무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 야근이 잦았다. 야근을 한다고 그 작은 회사가 야근 수당을 더 주는 것도 아니었고, 연봉이 높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학업을 마쳐야 했다.



그러나 여기는 나의 첫 회사였다. 그래서 이 회사가 기억이 남을 수밖에 없다. 사장님, 상사, 동료, 업무, 직장생활 등이 내게는 전부 처음이었던 셈이다. 당연히 상사와 먹는 첫 식사도 처음이었다. 나의 첫 상사는 김 팀장이었다. 그는 서울대 대학원 박사 출신의 팀장이었다. 그는 키가 나보다 작았고 약간 곱슬끼가 있는 머리에 검은 안경을 썼음에도 쾌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는 가늘고 얇은 하이톤이었는데 한번 그가 웃으면 누가 웃었는지 굳이 알려하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평소에 잘 웃는 유쾌한 사람이긴 했지만 웃는 횟수만큼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배를 잡고 웃을 정도의 재미난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재미없게 하는지 놀라웠다. 하지만 그는 꽤 탁월한 팀장이었다. 내가 당시에 듣기로는 회사의 방송 프로그램의 핵심 개발에 참여했었고, 당시보다 더 나은 오퍼를 받았음에도 회사에 남은 사람이었다. 회사에서도 직원들 사이에서도 능력과 신망은 꽤나 두터워 보였다.


 내가 입사한 첫날, 그는 입사 환영 기념으로 나를 포함한 팀원 3명에게 점심을 사준다며 우리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우리는 회사에서 좀 떨어진 이태리안 음식점에 갔는데 나는 약간 움추러 들었다. 지금이야 파스타와 뇨끼라면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로 이태리 음식을 좋아하지만, 당시 나는 휴학생이어서 그런 음식을 접할 기회나 여유가 전혀 없었다. 참고로 당시에 나는 부모님께 경제적 부담을 드리기 싫어서 대학 등록금의 반과 용돈을 스스로 벌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때 일 년 대학 등록금이 360 ~ 400만 원이었고, 시간당 알바 임금이 3,000원 정도였다. 학교 학생회관에서 1,500원 백반을 먹는 학생에게 7,000원 파스타는 가당치도 않는 사치였다. 당연히 가본 적도 없고 먹어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몰라 당황해서 움츠러들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파스타란 오뚜기 토마토 스파게티가 전부였다.



 나는 약간 긴장한 채로 메뉴판을 보면서 주문하는 친구를 곁눈질하며 겨우 파스타를 주문했다. 식사를 주문하자 마늘바게트 빵 4조각이 나왔는데 꽤나 맛이 있었다. 파스타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김 팀장은 내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교생활이나 친구와의 관계 등의 일상적인 질문을 하다가 점점 무게가 있는 묵직한 질문을 했다. 글은 언제부터 썼는지? 주로 무슨 글을 쓰는지? 글을 잡지에 실어본 적은 있는지? 글을 왜 쓰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나와 김 팀장만 계속 문답이 오갔고 나머지는 듣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질문이 날카롭기도 했지만 점심을 먹는 자리가 최종 면접장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주문한 음식이 제때에 나와줘서 더 이상의 질문은 받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내 앞에 놓인 파스타는 기름과 마늘에 범벅이 된 파스타였다. 그때는 이것도 파스타인지 긴가민가 하면서 먹었다. (지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태리 음식 중에 하나다)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맹숭맹숭하게 식사를 다 하고 자리에 일어나려고 하자 팀장이 말했다.


파스타 가격이 7,500원인데 제가 5,000원을 부담할 테니
각자 2,500원을 내주세요.
 


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아니, 이 회사는 직원에게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가? 점심을 팀장이 사주는 건가? 왜 다른 두 사람은 2,500원을 당연스럽게 내고 있지? 여기서는 이게 당연한 건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현금이 일전 한 푼 없었다. 지갑에 주민등록증, 학생증 그리고 교통카드가 전부였다. 정말로 머리 속은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 뿐이었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눈치챈 친구가 나 대신 2,500원을 내줬다. 나는 다급히 갚겠다고 했지만 녀석은 친구에게 이 정도도 못해주냐며 한사코 거부했다. 나는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화가 났었다. 이러 상황에 놓이게 된 나의 무지에도 화가 났지만, 이런 상황을 만드는 김 팀장에게도 화가 났었다. 그렇다고 정말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그는 나의 입사를 위해서 환영 기념으로 밥을 사지 않았나? 게다가 나머지 두 사람은 당연하게  2,500원을 지불하지 않았나? 여기서 내가 화를 내면 나만 이상한 놈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말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찜찜했던 직장에서의 첫 점심이 지나갔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근속 1년을 앞두고 회사를 그만두고 복학을 했다. 복학을 했지만 여전히 회사 몇몇 분들과 연락을 간간히 하고 있었다. 워낙 같이 고생을 하면서 다닌 회사라서 서로에게 잔정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그러나 회사가 결국 다른 회사에 흡수합병이 되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중에 한 명이 내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며  새까맣게 잊고 있던 상사와의 첫 점심의 내막을 이야기해줬다. 나의 직감대로 그 점심은 최종 면접이었다. 사장님과의 나의 채용 면접이 최종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종 면접 관문은 그 김 팀장이었다. 게다가 그날 점심은 김 팀장이 산 것도 아니었다. 점심 계산은 김 팀장이 개인카드로 긁었지만 나중에 회사에 비용처리를 따로 했더란다. 그리고 그건 나만 몰랐었다. 정말 뒤통수를 크게 맞은 듯했다.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쓴 맛이 올라왔다. 하지만 직장생활 15년 차에 들어서니 충분히 그런 일이 당시에도 지금에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 맞는 인재를 구하는 것이 어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아마도 사장님이 김 팀장에게 최종면접을 지시했을 수도 있다. 또한 면접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개인카드를 사용하고 추후 비용처리를 하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 전혀 다른 전개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 회사를 다닌 덕분에 나는 다음 직장생활을 좀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먹고사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도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학교 졸업하기 전에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겸손한 마음과 동시에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 fin -


# 표지 사진 출처 : 나무 위키 "알리오 올리고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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