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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ul illang Jun 22. 2024

섹시하고 위험한 왕위를 뺏긴 야수같은 남자 어떤데

(5) 하일, 말도 안 되게 특이한데 이런 남자 처음이야

[옛날 팝송, 좋아합니까?]



안녕하세요를 보냈는데, 이게 웬 대답이냐. 제 핸드폰을 잘못 봤나 싶어 무화가 눈을 잠시 감았다 뜬다. 여전히 같은 내용의 메세지다. 이 사람은, 또 뭐야?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면 대부분은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나. 안 하는 것보다는 두 명의 남자와 어쨌거나 연락을 한 다는 것에 의미를 둔 무화가 대화에 맞장구를 쳐 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둘의 메신저 대화는, 마치 집요하게 누군가가 바라는 미로를 빠져나가면서도 무슨 길인지 전혀 알 길 없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시험을 통과하고 있는 기분. 마치 이런 대화들.

[네, 좋아해요. 엄마랑 같이 옛날 영화들을 자주 보곤 해서요. moon river 카롤라 브루니 버전 잘 때 자주 들어요. 로마의 휴일같은 영화 분위기도 좋아하고요.]

나름 진지하게 대답을 해 주고 나면, 아주 짧은 자신의 답변 후에 주제가 휙 바뀌고 만다.

[그렇다면 카사블랑카도 추천합니다.좋아하는 철학자 있습니까?] 라는 식.

질문도 참신했다.  [삶에서 중요한 가치관이 뭡니까.], [인생이 아팠던 적이 있습니까.] , [바다를 좋아합니까.] 같은 것들.

무화는 남자가 비겁하다 생각했다.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대답도 않고 자신은 질문만 던지는 사람인 양 면접관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놈의 일주일 지옥에 갇힌 무화는 가끔 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 동안 몇 번 이상의 연락을 해야 교체 요청을 할 수 있어서다.


 그리고, 사실 어떤 질문들은 좀 재미있기도 했다. 어떤 남자가 자신에게 좋아하는 철학자를 묻고, 삶의 가치관이 무엇이냐며 궁금해 하겠는가. 메세지가 오고 가는 시간 간격도 제멋대로다. 어떨 때는 1분 만에 읽고 새로운 질문이 오는가 하면, 어떨 때는 다음날 새벽에 질문이 띡하니 올라온다. 초반에는 불쾌했지만 무화는 점점 길어지는 그의 답변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소개팅이었다면 이런 질문이 오가지 않았을테지. 이 사람도 저도 익명이라는 규칙에 사실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궁금한 것들을 묻고 답하는 건 아닐까- 제멋대로 넘겨짚으니 무화는 하일과의 문자 문답이 기다려졌다. 그러던 어느 날, 4일째가 되던 어느 날, 남자가 묻기를



[사실, 이렇게 제 질문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을 못 만나봤습니다. 그래서, 혹시 전화를 해도 될까요?]



당연히 무화의 대답은 YES! 였다. 몇 번의 신호음, 그리고 맞닥뜨린 그의 목소리는

-여보세요.

참으로 낮고 단단해서,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말해주는  인생은 참으로 다채롭고 대단했다. 

스킨스쿠버 자격증이 있어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는 질문의 의도, 어렸을 적 유명해지고 싶어 모델을 하다 친한 형 몇 명과 함께 힘을 합쳐 모델 회사를 운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다 그 형들이 따오는 광고 프로젝트라는 게 사실은 여자를 끼고 위스키와 골프를 섞은 각종 로비에 인한 것들이었다는 걸 알아서 크게 실망하고 화를 냈다던지, 그런 동생을 초기 자본금도 회수하지 못하게 막아놓고 하루아침에 자기 자리를 뺏어버렸다는 것,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모님이 유명한 성우셔서 벌어들인 돈으로 카페를 하나 내 주셨지만 삶을 다시 열심히 살기 어렵다는 현재의 상황까지.


 무화의 평범하고 안온한 일생과는 정반대의 모험이었다. 그가 들려주는 따스하고 강직해보이는, 하지만 약간의 패배기가 젖은 한숨 섞인 목소리를 무화는 전적으로 믿었다.


-아, 이렇게 제 속을 다 비친 여자는 화님이 처음이에요. 이러면 안 되는데.


전화 통화로 접한 하일은 한마디로 왕위를 뺏긴 사자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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