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이 어려운 모든 딸들에게, 가족도 예외 없다. 내가 먼저다!
착한 딸 콤플렉스. 대부분 대한민국 장녀들이 앓는 요상한 병이라고. 하지만 나는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그 병 환자다.
교육학에서는 말한다. 성인 자아가 형성될 시기인 사춘기 때 부모를 이겨먹어야 아이가 훗날 자립심 있는 어른으로 자란다고. 하지만 난 그 시기를 깨나 놓친 서른살이고, 사춘기가 없다며 부모님이 자랑할 만한 딸로 자라났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난 자립심 없는 마음의 골병이 크게 든, 몸만 큰 어른으로 자라났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내가 합병증으로 앓고 있는 병은 ‘거절 못해!’ 병이다. 거절하는 법을 몰라 색 웃고만 있다.
마음 속에 언짢은 중생이 들어앉은 줄도 모른 채 상대방은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보는 거다?’하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선택지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월요일에 내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도적으로 까먹은 척 하고 그 자리에 안 나가는 것. 일명 회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 장소에 나가는 것. 그러면 상대방은 또 묻는다.
“너, 뭐야. 너가 하고 싶어서 나와놓고 왜 이렇게 반응이 별로야?”
그야, 진짜 하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너랑 노는 게!
...그동안 나는 이 말을 못해 많이도 끌려다녔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연인 관계를 꽤나 오래 지속했으며(친구들은 삼 년 정도면 너도 모르게 좋아한 거라고 인정하라고 성화다. 하지만 좋아하는 남자였다면 내가 그렇게 헤어질 때 상쾌했을 리가 없다.) 친구들과의 약속에서도 하기 싫은 총무일을 나도 모르게 떠맡게 된 적이 일쑤.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되도 않는 머리 굴려가며 총 2박 3일 경비가 얼마였는지 하나씩 다시 되짚어가며 두 세 번 계산기를 두들겨대는 게 얼마나 귀찮고 짜증나는 일인지, 친구들에게 말하면 될 것을 난 그 한 단어를 못 말한다.
“싫어.”
어느 날, 남자친구와의 어떤 일로 내가 마음이 상했던 주에 상담 선생님께 갔다. 쪼르르 달려가서 남자친구와 내가 이렇게 서로 서운한 일이 있었다 고했더니 선생님께서 별 희한한 애 다 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며 가만히 물었다.
“근데, 화랑님이 싫다고 하면 되잖아요. 싫다고 하는 게 어려워요?”
그렇죠, 이론 상은 완벽합니다. 라고 말을 하고는 왜 내가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내 거절이 무시당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꼭 그 지점을 찾아내 보라고. 상담 선생님께서는 최면 걸 듯이 조용히 말씀하셨고 나는 선생님과 몇 번의 주거니 받거니 대화 끝에 결국 하나의 장면을 찾아냈다.
역시, 원인은, 애석하게도, 사랑하는 우리 엄마에게서부터다.
중학교 1학년, 자타공인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학원에서 다녀와 양치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치카푸카를 하고 있는 나를 엄마가 지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순간도 놓치기 싫은 듯, 팔짱을 끼고 문에 기대서 아예 라화랑 직캠을 감상하듯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나를. 치기 어린 질풍노도의 어린 영혼은, 부모의 눈초리가 무조건 싫은 나이였고 나는 치약을 퉤 뱉어내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엄마가 그렇게 쳐다보는 거 나는 엄마가 감시하는 것 같아서 싫어. 양치하게 엄마는 비켜줬으면 좋겠어.”
이 말을 들은 전국의 어머니들이여,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첫 번째로는 “응, 알았어.” 하고 수긍하기가 있을 것이고, 두 번째로는 “아니 이게 어디서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해?!” 라고 화를 벌컥 낼 수 있으며 세 번째로는 “너무 속상해, 엄마가 사랑해서 쳐다본 건데!” 하고 슬픔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선택지로는 “너, 안방으로 따라와.” 등등의 시리즈가 있다. 우리 엄마는 2번을 택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사춘기인 나보다 더 크게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나의 용기낸 ‘관심에의 거절’이 거절당하는 경험을 한 뒤부터, 나는 엄마를 무조건 이해하려 들었다.
[엄마가 저러는 건 날 사랑해서일거야. 엄마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겨. 몇 번 경험해 봤잖아?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건 좀 참자. 조용히 있어보자.]
그 결과는, 짜잔! 나이 서른에 우울증 약을 최대치로 달고 다니면서 부모님께 멀쩡한 척 거짓말을 하는 대한민국 여성이 완성되었다. 슬프게도 말이지.
상담선생님께서는 박수를 짝 치며 말씀하셨다.
“그게 열쇠네요. 화랑님, 지금부터 가족에게 작은 거절을 시작해보세요.
너의 모든 것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지금, 내가, 이 행동이, 당장은 힘들어. 하고요. 평생 거절하라는 게 아니에요. 잠시 화랑님이 불편한 지점을 찾는 것, 그리고 내일은 그 불편한 지점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 화랑님은 그 불편함을 매일 표출해도 된다는 것. 이 사실을 기억해 보세요.
어렵겠지만 그래도 우리 노력해 봐요.”
그래서 난 거절을 당장 실행했다. 어떻게 하냐고? 엄마가 때마침 전화가 와서 강원도 본가에 들르는 건 어떻냐고, 긴 휴가가 있지 않냐고 은근슬쩍 물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용기 내, 라화랑. 넌 할 수 있어. 하고 숨을 훅- 몰아쉰 것을 엄마는 모를 것이다.
“엄마, 나 이번 휴가에 내 계획이 너무 바빠서 못 가겠네. 하루도 안 비어. 내 일정이 꽉 차서 미안한데 이번에는 강원도 집 못 가겠어.”
사실 거절에서 가장 힘든 것은 이 다음 일이다. 상대가 아쉬워하는 걸 견디기. 난 그동안 상대의 감정조차 내가 끌고와서 내 책임으로 달고 살았다. 그러니 제 감정을 속일 수 밖에. 하지만 이제는 내 감정을 손 떨리지만 꼭 쥐고 내밀려고 한다. 그 시작은, 역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엄마, 앞으로 무수히 많을 내 거절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