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본인의 자식이 우울증 혹은 불안장애를 앓고 있다고 선고하는 딸의 심정이란, 이런 선고를 내리는 재판장같다.
"당신이 생산한 생명 하나는 잘못 제작되었소! 그건 모두 임신했을 때 커피를 한 두잔 홀짝인 당신 탓이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두 사람을(엄마, 아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죄책감의 나라로 인도하는 기분이다. 나는 수십 년간 나를 옥이야 금이야 애지중지 키워온 두 사람의 노고에는 아랑곳 않고, 1초의 잘못을 끄집어내 그들을 들들 볶는 사랑과 전쟁에 나왔던 시어머니가 된 것만 같다.
그렇게 어렵사리 부모님께 내가 정신질환자라는 고백을 하고 나면, 부모님은 죽음의 5단계마냥 자식의 고백에 대해 비슷하게 5단계를 겪는 듯 하더라고. 죽음의 5단계는 다음과 같다.
자식이 정신질환자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5단계 중 꼭 부정과 분노를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다. 당신들의 부모님은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허, 참, 내. 병원이랑 상담센터에서 엄마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디?"
미리 일러두건데, 최악의 반응 중 하나이다. 제발 우울과 분노는 정신질환환자인 자식 앞에서 표출하지 마시고 몰래 하시기를. 자식 앞에서는 꼭 타협 혹은 수용의 자세만 보여주시기를. 우울증과 불안 장애의 탓이 부모님 탓이냐고 묻냐면, 친절하게 자식된 도리로서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아드려야지. 슬프게도.
1) 병원에서
병원에서 "선생님, 저는 왜 이렇게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얻고 힘들어하는 걸까요? 제가 자라나면서부터 뭘 잘못했던 걸까요?"라고 물었다. 그럼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답해주시더라고.
[어, 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의 원인은 워낙 방대하고 넓죠. 그리고 개인마다, 같은 개인이라도 상황과 시기마다 다르고요. 그래서 우리는 이유를 찾기보다는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보려고 합니다. 당장 일상생활이 힘든 상태잖아요? 그럴 때에는 내가 왜 우울한가를 곱씹어 생각하기보다 그저 '아, 나 지금 우울하다-'하고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도움이 됩니다. 침대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안 해도 좋아요. 자꾸 우울하다, 왜 우울하지? 라는 생각이 들면 있는 그대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받아들이도록 해 보세요. 있는 그대로의 지금을요.]
그러니 병원에 간다면 부모님이 그간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기보다는, '지금' 부모님이 '지금 상태의 환자'를 어떻게 주변에서 돌보아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그 답도 저 말 안에 들어있다.
<억지로 밖에 나가네, 외식을 하자네, 산책을 해야 하네, 운동을 해야 하네 등 자신의 답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 상태를 부모님도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2) 상담센터에서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앞으로 우리 아이에게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있는 우리 딸에게 내가 어떤 행동을 했던 거지? 궁금하다면 여기다.
상담센터에서는 내담자와의 여러 차례 상담을 통해 무의식(꿈 이야기),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께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 등을 차분히 밖으로 끌어낸다. 그리고 내담자가 우울증에 걸린 환자이며, 어릴 적 부모님과의 일 때문에 어떤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해준다.
[지금부터 그 때 12살의 당신을 불러올 거예요. 그리고 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12살 당신의 어머니예요. 당신이 그 때 하고싶었지만 못 했던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거예요. (이야기를 다 끝마친다.) 자, 이제 당신이 12살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됩니다. 자리를 바꿔 볼까요? 이제 제가 하는 이야기 잘 들어요. 그리고 당신이 대답하는 거예요. (내담자가 방금 이야기했던 걸 똑같이 들려준다.) 자, 이제 당신이 어머니가 되어 이야기 해 보세요.]
마지막 말은 이거다. [현재 당신의 부모님과 당신 사이에는 상담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죠. 맞아요. 하지만 당신 안에 있는 부모님의 존재가 조금 바뀌기를 바라요. 우리는 같은 부모님을 품고 살지만, 당신이 방금 흘려보내고 새로이 받아들인 그 부모님이 당신 안에 새롭게 들어앉아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생각하는 부모님이 바뀔 수도 있죠. 그럼 당신이 앞으로 행동하는 게 조금 바뀔 수도 있을 거예요.]
상담센터를 엄마랑 같이 가고 싶다. 부모님과 함께 가면 우울증에 걸린 딸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일상에서 상처를 받은 딸 입장을 듣고 당혹스러워하는 부모님의 입장도 함께 이야기를 듣고 조율해준다. 서로 마음을 풀고 과거를 되짚어보는 과정에서 딸의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조금 풀릴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면, 어느 부모님이 이를 마다하겠는가.
결론은, 두 곳 다 부모님이 애를 잘못 키워서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하지는 않는단 뜻이다.
병원에 가면 '잘못이나 이유 생각들말고 지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나 집중하쇼'라는 말을 듣고, 상담센터에 가면 '이러이러한 사건으로 서로 오해가 생겨 힘들었군요. 그게 지금 당신의 삶에 영향을 크게 미쳤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걸 지금 함께 터놓은 지금부터 우리는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거예요.'라며 서로 노력 섞인 대화로 보듬어준다.
누구 한 쪽의 잘못이 명확하게 있다고 한들, 그걸 뿌리치고 제 삶을 튼튼하게 기워 나갈 개인으로 성장해야 하는 우울증 환자들은 어쨌거나 어떠한 힘이 필요해 부모님을 원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부모님들이여, 우울증에 걸린 게 다 부모님 때문이라고 딸이나 아들이 통곡을 한다면- 마음이 쓰라리다 못해 아리겠지만 그냥 받아주시길.
그것도 허물어져버린 마음의 장벽을 세우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