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GOLDEN IN INDONESIA

SUMMER, 2023 - (1) 이별이 사랑보다 쉬운 여자 이하양

by 라화랑

1.

아, 망했다. 또 만났어. 여기가 서울도 아니고, 대체 뭐람?



마음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여자는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보고 환히 웃는다. 웃음 끝에 걸린 낭패감을 미처 낚아채지 못한 남자가 의자를 드르륵 밀어 풀썩 앉는다. 서울이었다면 유행이 언제 지나갔을지 모를, 허리에 두르는 힙색 가방을 멘 채다.



“안녕하세요- 우연히 여기서 또 뵙네요?”



“아, 그러게요! 저 여기 같이 앉아도 될까요? 이 넓은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딱 다시 마주치다니, 이게 무슨 일이예요! 저 너무 신나요! 왜, 밖에 나가면 한국인이 그렇게 반갑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어제 새벽 산행까지 같이 한 사이니까, 너무 반갑다! 저랑 하양씨는 뭐가 되긴 되려나 봐요. 그쵸?”



저녁 6시. 하양은 어제 화산 등정 투어로 있는 힘껏 긴장해버린 허벅지와 종아리를 달래주려 마사지 샵에 들렀다.


‘노곤노곤해, 한국에서도 이런 가격이라면 매일 받을 수 있겠어-’



눈이 살살 감길 정도로 누르는 마사지사의 적절한 손기술과압력과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아로마향에 괜한 일정이었나 불평했던 마음까지 어루만져지는 기분이었다. 때문에 평소라면 절대 “no!”를 외쳤을, 갑작스러운 마사지사의 google 사진 리뷰 요청에 “okay”를 나지막히 내뱉고 인자한 미소로 사진까지 찰칵 찍어준 참이었다.



그랬는데, 이 사람이 다 망쳤어.



옛날 재즈 노래가 흘러나오는 칵테일 바, 인도네시아 발리라면 사람들이 생각할 딱 그런 시간- 마사지를 마쳐 반들반들한 피부의 싱글 여성이 칵테일바에서 리듬과 추억에 젖어 그 동안 한국에서 나 잘 살아왔다며 자기 위로를 건네야 할 고요한 시간- 을 만끽한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불청객이 하나 등장했다.



유광.


“안녕하세요- 혹, 혹시 동행 구하는 카페, 그 단체 메세지방 그 분 맞으시죠?”



“아, 네 맞아요. 유광님? 저희 말고도 다른 세 분은 이미 만나기로 한 스테이 장소에 계시대요. 거기서 샤워하고 기다리다가 새벽 1시 되면 다른 투어사들이랑 묶어서 같이 출발하면 되나 봐요. 일단은 제가 예약한 택시 번호가, 아, 검은색 닛산에 번호는 0000이래요. 같이 나가서 찾아볼까요?”



“아, 네! 저 발리에서 안 그래도 한국인 없어서 엄청 외로웠었는데 드디어 한국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니 엄청나게 반갑네요.”


[목젖이 보일랑 말랑, 별 것 아닌데도 크게 웃네. 두 번이나 강조할 정도로 엄청 외로웠거나 원래 입이 그냥 커서 웃음이 커 보이는 건가- ]라는 것이 하양이 유광을 보며 떠올린 가진 첫 인상이었다.



화산 투어를 함께 했다. 혼자 한 달을 내리 인도네시아에 다녀오겠다는 당찬 딸의 포부를 듣고서 하양의 부모님은 한 가지 조건부 허락을 내렸다. ‘100% 자유 여행은 안 됨. 중간 중간 현지 투어를 낄 것. 특히 화산이나 스노쿨링 같이 안전요원이 옆에 필요한 것들은 꼭.’ 반쯤 뒤집어진 눈동자였지만, 그나마 이게 어디냐 싶어 하양은 냉큼 오케이 사인을 받아 챙겼다. 그리고서 꼭 가고 싶은 여행지들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인도네시아 여행 카페에서 ‘7월 30일 00화산에 함께 오를 동행그룹을 구합니다. 5분 구해요.’ 라는 글을 쓰고 있었다. 비밀 댓글로 자신들의 메신저 연락처를 남겼고, 몇 명의 거부 혹은 약속 취소 끝에 만난 사람이 재즈바에서 엉겁결에 함께 앉게 된 남자- 유광이다.



먼지를 풀썩 뒤집어쓰고 새벽에 끙끙거리며 이 산길을 내가 왜 가자고 했을까- 후회의 한 발짝씩 내딛다보면 맞이하게 되는 일출, 그리고 유황 화산을 함께 겪은 사이. 그렇다고 같이 손잡고 팔짝팔짝 뛰며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단란한 다른 나라의 그룹 투어객들과 달리 어느샌가 사진기를 들고 사라지는 유광과 이에 질세라 공책을 들고 위태로운 바위덩이에 풀썩 앉아 자신만의 화산 등정 감상기를 써내리는 하양은 각자의 시간을 충분히 즐긴 뒤에 서로를 찾는다는 점에서 꽤 괜찮은 여행 파트너였다. 물론, 목적이 같을 때에만.


눈 앞에서 어떻게 식당 종업원을 영어로 불러야 할지 몰라 버둥거리는 남자는 지금 하양이 혼자 즐겨 마땅할, 지역 재즈 가수가 건네주는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 괜히 심통이 난 하양은 손짓 발짓으로 감자 튀김과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하는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유창한 영어 실력과 꽤 오래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며 주워 들은 몇 가지 여행자용 인도네시아어로 주문을 쉽사리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문을 겨우 마친 유광을 향해, 하양이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얼굴에 손을 괴고 물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래요? 유광씨는 반대쪽 발리로 간다고 하셨잖아요. 여긴 더군다나 유광씨가 좋아할 만한 사진 찍을 명소도 없는, 한적한 바닷가와 스노쿨링이나 하는 게 전부인 외국인들의 가족 여행지 같은 곳인데?”



아, 그게 말이죠- 입을 뗀 유광이 하양의 고까운 눈빛을 못 읽은 채 해맑게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여길 떠나기 싫었거든요. 하양씨랑 제가 어제 오후 한 시 쯤에 헤어졌나요? 다른 분들이랑도 다같이 빠빠이- 하고 헤어지고 나니 갑자기 외로움이 확 덮쳐오더라고요. 그, 사실 워낙 혼자 잘 못 살고 남에게 의지해요, 제가. 그래서 연약한 습관 바꿔보자며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와 놓고서는 말입니다. 그러면 잘 이겨내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지는 못해도 견디려고 노력이나마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전 그게 또 비싼 돈을 주고 인도네시아에 와서도 실패했습니다. 하하하.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한국에서 친구들이랑 이 돈 가지고 투다리에서 술이나 진탕 먹을걸, 그러면 행복하게 집에서 드러누워 유튜브나 몇 개 더 보다가 잘 수 있었을텐데. 그러면 이렇게 썰물처럼 누가 없어지는 기분을 안 느껴도 됐을텐데, 했죠. 어쨌거나- 어쩌겠습니까. 하양씨도 다른 분들도 모두 제 갈길이 있는 걸. 제가 무턱대고 따라가겠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각자 택시나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진 뒤였는걸요. 저도 빌린 오토바이로 한국에서 다음 여행지로 꼽은 곳이나 가자- 거기 가면 사진 찍기 좋은 계단식 논이 있을 거다- 그 계단식 논에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되지, 하고 오토바이에 탔죠.


아, 그런데 제가 가기 싫다는 걸 눈치라도 챈 건지 오토바이를 타고 5분만에 비가 내리는 것 아니겠어요? 아- 아 오케이. 히얼. 땡큐 어 랏.”



질문은 하난데, 대답은 여러 문장- 많은 시간이 필요하네- 간단히 요점만 말해주지. 저 가수 목소리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시간 아깝게스리. 흩날리는 하양의 시선 속에 섞인 힐난을 위해서 베푸는 서비스인듯 종업원이 마침 유광의 음식들을 가지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양은 잘됐다 싶어 말을 끊고 한 곡이 끝난 가수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래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여기로 왔다고요? 일단은 알겠으니까 상황 설명은 나중에 하고, 미안한데 내 앞 가로막지 말고 차라리 옆으로 와줄래요? 저 가수가 지금 부르기 시작한 노래- 나 진짜 좋아하거든요. 재즈 버전으로 나왔는지는 미처 몰랐어서. 집중해서 듣고 싶은데.”



하양의 말 끝에서 거부할 수 없는 힘을 느낀 유광이 아, 에- 엉거주춤 의자를 들고 일어나 하양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떨결에 옆에 앉게 된 두 사람에 비친 같은 장면은- 꽤나 로맨틱한 찰나였다. 마침 시작하는 노래에 드럼이 얹어지자, 유광이 더 이어서 말할 타이밍을 놓친 채 재즈 밴드의 공연에 귀를 기울였다.



들려오는 노래는 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였다.



I waited 'til I saw the sun. I don't know why I didn't come
I left you by the house of fun. I don't know why I didn't come
I don't know why I didn't come



와인 목을 붙잡고 자신도 모르게 엄지 손가락으로 하염없이 문지르며 상념에 빠져버리는 손의 주인은, 하양이었다. ‘I didn’t know why I didn’t come’을 연달아 들으니 떠오르는 누군가. 유광의 반대쪽 팔걸이에 팔을 괴고 가만히 생각에 잠긴 하양의 머릿속에 이제 재즈 음악은 없었다. 귀에 들리는 건 그 남자의 목소리 몇 가닥 뿐.



[내가 왜 그 남자한테 안 갔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가사에 파묻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은, 하양이 불청객이 불편해 홧김에 시켜버린 와인 한 병을 거의 다 비워서일까. 아니면 옆 사람과의 새로운 추억거리를 쌓는다는 것조차 불편해서일까. 사라져가는 음악 소리에 그 남자의 목소리가 대신 하양의 귓가에 거짓말처럼 잠시 머문다.



하양씨는,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시에 이루지 못한 감정의 후회만 가득하네. 그게 참 나 같아서, 어떤 평을 내릴 수가 없어졌어요.
…담배가 피고 싶어 지는 글. 나를 자꾸만 똑바로 보게 하는 글. 하양씨는 그런 글 전문이야.



앞에 하양이 카페 의자에 곧 앞으로 쏠려 넘어질듯이 앉아있음에도 등받이에 등을 고정시킨 채 내뱉는- 공기가 한껏 섞인 말투.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그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남자. 삐쳐버린 단발과 숏컷 그 언저리의 머리 스타일에 뿔테 안경과 찡그릴 때면 자연스레 자리잡는 주름이 잘 어울리는 - 30대 중반의 - 언젠가 스무살 언저리에 등단에는 성공했으나 이후로 다른 곳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만이나마 시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생계를 위해 택배 상하차 일에서 다부진 몸을 갖게 된 그는 하양이 그토록 마음 한 켠 제대로 갖고 싶던, 짝사랑남이었다.


이 예쁜 발리에서, 온 몸으로 새로운 경험을 겪을 수 있는 이 고생길을, 당신과 함께했다면 어땠을까. 1절이 끝나 발을 동동 구르며 박수를 치는 유광의 옆모습을 확인한 하양은 거슬린다는 듯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커튼을 만들어 그를 자신의 시야에서 가려버렸다. 아- 이 사람 대신 만약에, 만약에 말이지.




남몰래 쉬는 한숨을 알아챈 유광이 하양을 툭툭 치며 물었다.


“어, 하양씨 혹시 졸려요? 아니면 벌써 취한 거예요? 하긴, 혼자 와인 한 병 다 먹을 때부터 알아봤어요. 괜찮아요?”



[안 괜찮다- 이 자식아. 네가 입만 다물어준다면 아주 괜찮아 질 것 같다. 사실은 네가 벌떡 일어나서 사라져주면 더욱 좋고.]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꾹꾹 누르고, 하양이 대답했다.


“저 괜찮아요. 그냥 이 노래에 사연이 좀 있어서. 끝까지 혼자 일단 들을게요.”


그러니, 너 조용히 좀 해라 제발- 하양의 2차 무음 압박에 유광은 오른손으로 입을 닫는 시늉을 합- 하며 끄덕였다. 그리곤 이내 다시 가수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상념에 빠진 사이 노래는 그 새 2절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My heart is drenched in wine. But you'll be on my mind Forever


Something has to make you run. I don't know why I didn't come


I feel as empty as a drum. I don't know why I didn't come


I don't know why I didn't come. I don't know why I didn't come





하양은 지금 자신의 상태가 가사와 똑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적절히 와인에 취해버린 마음, 그래서 자꾸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 사람. 사랑이 비워진 텅 빈 육체, 하지만 왜 그 사람을 먼저 떠났는지 스스로도 모르겠을 회피의 한 기억.


좋아한다고 먼저 말해놓고, 떠나는 것도 제 맘대로야 하양씨는.
어쩐지 나 같은 남자 뭐 좋다고 그렇게 안아주고, 이해해주고, 기다려주나 했어.
이 시간들에게서 떠날 자신이 있었던거야, 당신은.
알면서도 당신이 다가왔을 때 처럼, 꼭 똑같이 나는 밀어내지도, 붙잡지도 못해.
난, 가진 게 누군가가 언젠가 풀어주기를 바라는 비밀 말고는 없는 사람이니까.

혹시 당신이 되려나 하고 고민했던 모든 시간들이 내게는 어마어마한 고통이었어.
그러니까 하양씨가 이렇게 모임에서 날 끊어내듯 모든 걸 도망쳐도,
난 아무것도 안할 거예요.

나를 떠나야 하양씨가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사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니 마음 편히 떠나요. 가요.



이제는 옆 사람이 누구인지도, 앞의 가수가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하양은 생각했다. 과거와 관념의 세상에 빠진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연 건, 'STAY GOLDEN’이라는- 오늘 예약한 숙소의 게스트용 주방에서였다. 유광이 특유의 넉살을 떨며 자신은 예고도 없이 하루하루 떠도는 여행자이기 때문에 같은 숙소에서 좀 자자고 부탁을 했었던 것도 같고, 질색팔색하지만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하양의 숙소 이름을 그새 인터넷에서 검색하고는 남성용 도미토리 자리가 휑 비어있다며 웃었던 것도 같고, 이 숙소는 아침 식사도 준다며 흥얼거리고는 이제 같은 숙소 사용자로서 택시 타고 함께 돌아가자는 말에 수긍했던 것도 같다.


[…그런 것 같다. 그랬지, 내가 그랬었나?]



하양의 자조섞인 말은 무턱대고 하양의 숙소에 자신의 한 몸 누일 곳을 찾아낸 유광을 향해서가 아닌, 윤건제를 향했다. 안 그래도 하양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유광이 드디어 말을 시작한 하양의 눈에 눈맞춤을 시도하였지만, 그는 하양의 눈에 담길 수 없었다. 유광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뭐가요? 하양씨가 뭘 그랬는데요?"


라며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붙이는 것과, 하양의 손에 들려있는 맥주캔을 따 주는 것, 마지막으로는 모든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도록 스스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이 어색한 시간을 견디는 것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일랑입니다.


인스타에 봄과 사랑, 지우개를 섞어 아주 웃기고 부끄러운 단편 소설 연습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누군가 여름도 해주세요! 라는 댓글을 가벼이 달아주셨고,

저는 그 때 이후로 아주 마음 무거운 여름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여름 단편을 가을이 되어서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북스테이 글은 언제든지 상시 대기중이지만, 너무 무겁고 어두운 글만 올리다보니

저도 글을 쓰는 재미 대신 스스로를 깊이 파고드는 시간이 늘어나 산뜻하게 사랑과 이별에 관한 글을 써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지게 글이 안 써질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사랑과 이별에 목매달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한 달간 무척 즐거운 괴로움이긴 했습니다-!



혹여나 봄 단편이 궁금하신 분께서는, 부끄럽지만 인스타로도 놀러와 주세요.


@geul.illang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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