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이별이 사랑보다 쉬웠던 여자, 이하양의 사랑 회고록
2.
[그 사람 이름은 윤건제였어요.
지금은 몰라요. 이름을 바꿨을지도, 원체 그런 양반이었으니까.
어느 날 자신이 느껴지는 그 무언가의 확신을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사람.
그러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물렁하고 약해빠진 남자.
그래서 강하지만 유약한, 나의 짝사랑.]
하양은 건제와 만난 첫 날, 제 딴에는 열심히 신입 회원을 챙긴답시고 자신에게
"하양씨라고 했죠. 시는 많이 읽어봤는지 모르겠네요. 시 보는 거 좋아해요?"
라며 말을 붙이던 그를 보며 생각했다.
아- 또 시작이구나. 이하양.
서른한 살 정도가 되면, 대책없이 아무 정보도 모르는 남자를 보며 가슴이 뛰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었다. 지금까지 얼굴이나 목소리, 등장하는 찰나의 공기에 매료되어 쉽사리 인연을 맺고 끊기를 반복하던 20대의 하양을, 스스로 경멸했다. 때문에 29살의 마지막 연애 뒤 치근덕대던 가볍고 은근한 호감의 표시들을 모두 모른 척 지나치는 30살의 유하양을 누군가는 '서른 되더니 결혼하려고 눈이 높아졌나보다.'며 빈정거렸고 하양의 엄마는 '니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남자 직업을 보기 시작했구나.'라며 박수를 짝짝 쳤었다.
그랬다, 그랬지. … 그랬는데
윤건제를 보고 나서 심장이 대책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모임 개설글에서 본, 자기소개글과 실제로 만난 그는 무척이나 달랐기 때문일까.
[시인이 되고자 평생을 노력하였으나, 실제로는 남의 일상을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놓기를 반복하는
모순된 인간입니다.
다만, 할 수 있는 일은, 부끄러워 차라리 모르는 인연들에게 내 글 한 자락을 겨우 이거라도 내어놓는 밤.
그리고 그런 밤 안에서 찾는 한 숨을 함께 노닐며 쉬고 싶은,
시와 글자 사이에서 고통스러움을 기꺼이 함께할 무명의 누군가가 되어주시렵니까.]
하양의 마음속에 무척이나 부끄러워 얼굴을 못 들 정도의 소심한 양반이겠거니 싶었던 건제는 다른 층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스타벅스 3층에서 하양을 맞았다.
"어, 이쪽입니다. 여기가 시 모임입니다. 반갑습니다."
새 것은 아니지만 나름 패션에 신경을 쓰는 것 같은 회색 후드티와 무언가 태가 나는 청바지, 그리고 컨버스 운동화의 색 조화가 주는 영향이란- 하양같이 글 안에만 파묻혀 사느라 거적때기를 걸치고 다니는 남자일 이라고 철썩같이 믿는 여자들에게 꽤나 잘생겼다는 인상을 풍긴다는 것.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름에 하양이 버퍼링이 걸린 채로 다가가기를 주저하자, 성큼 다가와 악수를 건네는 그의 손에서는 시인이라기보다 운동인으로서의 태가 느껴졌다. 그 단단함, 돈을 주고 일부러 만든 것 같지 않은 굳은살과 약간의 텁텁함. 핸드크림을 챙겨 바르지 않아 살짝 갈라진 근육질의 손.
몇 번 흔들렸을까. 하양의 손이,
아니면 두근거림같은 간지러운 무언가가,
그도 아니면 어떤 여자의 새로운 설레임이.
무엇인지 모를 하양의 어떤 것이 그렇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옆 사람한테 들킬 것 같으니 괜히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리며 괜한 심호흡만 열댓 번을 하는 하양을 보고 건제는 글쓰기 클럽 신입 회원이 자신의 습작을 처음 남들에게 보여주어 부끄러운가보다며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
눈맞춤.
마주친 둘의 시선과 그 온도의 차이.
"근데, 짝사랑 아니잖아요. 사귄 거 아니에요"
불쑥 인도네시아 발리 숙소의 주방으로 하양을 불러오는 명랑한 목소리. 유광의 질문에 하양은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맞아요, 사귄 거. 남들은 사귀면 다 쌍방인 줄 아는데, 그거 아니에요.
나만 진심이고 무겁고 애닳아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상대방은 무덤덤하고 나를 왜 받아줬나 싶고. 난 사귀는 사이에서도 짝사랑할 수 있다고 봐요. 그래서.]
가벼워서 떠난 거지.
먼저 사귀자고 한 것도,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모두 하양이었다.
다만 둘의 헤어짐을 촉구한 것은 건제라고 그녀는 굳건히 믿었다. 매 번 보고싶다고 메세지를 보내면
'나도, 곧 보자. 이번 주는 볼 수 있을 거야-'
라는 답조차 몇 시간 뒤에 오는 남자.
그래서 하양의 시간을 전체 다 비워내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기다리게 해 놓고서는 결국에 만나기로 한 3시간 전에
'미안, 갑자기 마음이 힘들어져서 못 나가겠다. 정말 보고싶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밖에 나갈 용기가 없어졌어.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살고 있어. 내가 보고싶다는 건 진짜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라는 메세지 하나로 하양의 화장을 고치던 손을 우뚝 멈추게 하는 사람.
생계를 위해 새벽부터 택배 물류 승하차 일을 하고, 잠시 부족한 잠을 잤다가 밤 열두시까지 등단하지 못한 예비 시인들과 박 터지게 작금의 문예 현실을 개탄스러워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시를 쓰고자 부단히 노력하던 사람.
스스로를 깊은 내면의 늪에 가둬놓고 할퀴어내어 토하듯이 시 하나를 쓰고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핸드폰을 내던져 버리던 사람.
이런 부족하고 뭣도 없는 남자 뭐가 좋아서 붙어있냐고, 그런 자신을 사랑해주어 고맙고 미안하다고 약속 취소에 화가 난 하양이 지하 자취방에 찾아오자 무력감 섞인 손으로 부끄러워하며 자취방 문을 열어주던 이.
맨 눈으로 자취방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멋지게 큰 식칼로 채썰기를 해내던 모습에 의아해하는 여자친구를 보고는, 세상이 주는 경제적 임무와 배고픔에 굴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사실은 진짜 도수는 없는 안경을 끼고 다닌다는 고백을 건네며 울어버리던 남자친구.
그러면서도 하양이 좋아하는 로제 스파게티와 감자 수프를 내놓고 맛있다며 잘도 먹는 하양을 귀엽게 쳐다봐주던 다정한 남자.
그릇을 싹싹 긁어먹고 나자마자 정말로 하양이 보고싶었다는 듯 꼭 안는 두 팔목에서 배부름보다 하양을 마음으로 더 꽉 채워지게 만들었던 그.
그
뜨거운
몸의 온도.
[뭐라고 표현을 더 할 수 있을까요-
아, 제 친구들이 객관적으로 사실 확인을 해주겠다는 문장 속에서의 그 사람도 말해줄까요?
서른 중반이 되었는데도 번듯한 직업 하나 없고, 이유가 무엇이건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제 멋대로 바꾸거나 취소해버리고는 오히려 죄책감에 휩싸이게 불쌍한 척 하며, 시인이랍시고 말은 또 청산유수라서 우리 착하고 마음 여린 하양이를 포기하지도 못하게 기다리도록 만드는 꼴사나운 인간.
메세지도 전화도 제 멋대로에다가 데이트다운 데이트 단 한번이라도 안 해주는 남자.
매 번 시 공모전에 보낼 글 쓸 시간은 있으면서, 하양에게 메세지로 지금 뭐 하고 있다 알려줄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사람.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못해 포스트잇에 하트를 그려넣어 하양의 가방 안에 넣어놓는 초등학생 같은 발상의 남자.
여자친구보다 자신의 정신 상태가 중요한, 지가 뭐 잘났다고 이별할 때도 언젠가 풀어줄 비밀 운운하며 여자를 안달나게 하는지 가스라이팅의 표본을 보여주는 최악 중의 최악의 남자 라던데요.]
"그래서, 하양씨는 그 건제라는 분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하지만 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예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 먹은 듯 부러 쾅 소리나게 나무 식탁에 맥주캔을 내려놓는 유광을 향해 처음으로 하양의 눈동자가 흘러갔다.
[날 사랑했다고 믿고 싶어요. 그래서 내 마음 속에서만 살게 할래요.
보고 싶어도 난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는 나쁜 여자가 되면서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이기도 하고요. 절대-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이 남자를 다시는 만나선 안 되겠구나- 했죠. 내가 그 사람의 일상에 들어갈 수 없었던, 무력한 순간들의 비참함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거든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 옆을 어떻게든 기웃리다가 끝끝내 놓기로 결정한다는 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일인지 유광씨 같이 밝은 사람은 죽어도 모를 감정이예요.
사실 고백하자면, 나 매 번 남자들한테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고 돌아서는 쪽이거든요.
조금이라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기미가 보이면, 할리갈리 종을 먼저 치는 사람처럼 빠르게 말해 버려요. 우리 이만 딸기 다섯 개가 다 모여 이별 종을 칠 때가 되었다고. 그러니 헤어지자고.
나 안 그러면 너무 상처 받잖아요. 끝까지 붙어있는 게 무슨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싫다거나 관심없다는 남자 곁에 내가 있으면 그 사람들은 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 그래서 늘 먼저 돌을 맞기 전에 피하는 쪽이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이별할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였어. 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말았어.]
"그거, 제가 보기엔 그 남자분도 진심으로 하양씨를 사랑한 것 같은데요."
하양이 기가 차 옆에서 두 번째 맥주캔을 까는 남자를 째려보았다. 역시 이런 뭣도 모르는 대책 없는 인간에게 뭘 기대하고 제 연애사를 공개했던 건지, 하양은 여행지라는 특수성과 재즈바에서 옮아온 낭만이라는 밤공기가 원망스러워졌다.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하양이 유광에게 물었다.
[대체 어디가요? 지금까지 뭘 들은 거예요?]
"그 남자, 우울증인것 같은데 맞나요? 저- 사실 저도 우울증이거든요. 다른 느낌이죠? 하하. 그래서 제가 듣기에는 모든 행동과 말이 그 남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었을 것 같은데. 같은 환자로써, 좀 와닿는다고나 할까요."
사람이 놀랄 만한 이야기를 동시에 들으면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양은 아무 말도 더하지 못한 채 합-하고 입을 다무는 편이라는 걸, 그러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려 나중에 켁켁거리는 편이라는 걸, 자신도 그제야 알았다. 이번에는 하양의 차례다. 하양이 어쩔 줄을 몰라 맥주 안주라며 자신의 방에 황급히 들어가 언젠가 마트에서 산 과자를 두어 개 들고 나왔다. 그리고서는 과자 봉지가 잘 뜯기지 않는다며 미끄러지는 손을 탓하자, 유광이 웃으며 과자를 받아들었다. 팡- 경쾌하게 과자가 세상 밖으로 꺼내지는 소리와 더불어, 유광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 제가 하양씨 말을 잘 주의깊게 안 들었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거든요. 오히려 엄청 집중해서 들었는걸요- 하양씨는 참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하는 재주가 있구나, 그리고 그걸 자신의 입장에서 충분히 소화시켰구나- 하는 느낌도 들고요. 하양씨, 말 잘한다는 이야기 많이 듣죠? 저는 말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요. 저는 이야기를 잘 하는 재주가 없어서,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이유를 말 안하기에는 하양씨가 너무 절 째려봤으니까 얘기해 볼게요. 어, 제가 중간 중간 끊기거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이어 하고 있거든 꼭 말해줘요. 알았죠?
어- 일단 제가 우울증이라고 말하면 다들 못 믿더라고요. 대부분의 우울증은 하양씨가 말씀하신 그 남자분처럼, 아 성함이 뭐였죠? …아 네 맞아요. 건제님. 건제님같은 느낌으로 알고 있어요. 저도 그랬고요. 제가 왜 그렇게 느꼈냐면요 제 마음이랑 비슷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서, 남자들은 다 비슷한 게 바닥에 깔려 있기도 하니까요. 어, 그게, 남녀 차별이나 그런 단순한 이야기는 아니고요, 아 제가 말주변이 진짜 없죠. 제 연애 얘기를 좀 같이 하면 그나마 이해가 빠르실 것 같으니까- 어 저는요! -
제가 어떻게 전 여자친구들을 만나고 헤어졌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