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첫 북스테이 - 안동 풍경 게스트하우스
다음 날, 미리 예매해둔 기차표를 확인했다. 오늘은 안동으로 가는 날이다. 누가 그렇게 정했냐고?
아주 힘들었던 5월의 화랑이가 미리 연휴에 혼자 있기 싫다며 정해 놓았지. 무기력한 몸을 이끌고 가방에 무엇을 넣었는지 정확히 기억 나지 않은 채로 KTX에 올랐다. 뭐, 될 대로 되라지. 지금 난 심신미약자란 말이야. 모자란 게 있으면, 돈으로 때우지 뭐.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준 사람은 지갑에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안동에서의 계획은 이랬다.
북카페에 가기
숙소에서 조용히 자기
다음 날 책 읽기
얌전히 세상의 가시에 자극 받지 않고 돌아오기
여행이라면 한 달 전부터 어떤 교통 수단을 탈 건지, 맛있는 음식이 뭐가 있는지 계획부터 짜던 건강한 화랑이가 주최한 여행이 아니다. 마음이 병약하고 내일 어찌할 바 몰라 버둥거리는 화랑이가 마지못해 떠나는 여행이다. 계획이 필요가 있을 리가.
고양이들이 많을 것이라는 숙소의 홍보가 무색하게, 내가 처음 1층 카페에 들어섰을 때에는 고양이 대신 고양이 모양을 딴 굿즈들만 가득했다. 카페이자 1층 게스트하우스의 체크인 장소는 책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2층에는 넓은 창도 있었다. 음, 너 합격. 체크인을 하자마자 1층에 다시 내려와 내가 있을 자리를 탐색했다.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으면서, 오래 글씨를 쓰거나 노트북을 하기에 적절한 높이의 책상, 답답할 때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곳. 1층 좌식 책상 자리가 나에게 당첨되었다. 나는 그렇게 앉아서 다이어리에 지난 며칠간 호모북커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었다. 확실히 글자를 적는 것은 꽤 많은 시간이 걸렸고,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오후 3시 반 쯤 자리에 앉아 쓰기 시작했는데 시간을 보니 오후 6시 반이었다. 배가 고파진 나는 주변 지도를 켜고 무작정 음식점이 있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도보 10분 거리에 아파트 주변 상가가 있었다. 그 중 혼자 앉아 먹을 수 있는 곳은 중국집 뿐이었다. 내가 들어가 짜장면을 시키고 10분 뒤에 다른 손님이 왔고, 사장님이 말했다.
"우리 이제 문 닫는데, 그냥 짜장 말고 간짜장은 안 돼?"
깜짝 놀랐다. 깨작깨작, 아-먹기 싫다며 음미하고 있던 짜장면이 갑자기 맛있어졌다. 5분만에 점심시간이 되어 급히 급식을 먹던 것 마냥 빠르게 면을 삼켰다. 급격히 빨라진 먹는 속도에 사장님이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 카드 말고 계좌 이체를 원하시길래 원하는 대로 해 드리고 밖에 나왔다.
-아, 이제 어디 가지.
터덜터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가는 길, 'BOOK AND CAFE’라고 써 있는 가게를 발견했다. 슬쩍 안을 보니 책장에 책이 많이 꽂혀있었다. 가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딱 한 팀이었다.
보물을 찾았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 1층 북카페에 실망하던 차였다. 지금 내가 필요한 건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책이 넘치는 곳이다. 빵빵한 배를 부여잡고 에이드 한 잔을 시켰다. 책장의 책은 모두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찬찬히 책을 살펴보았다. 옛날 소설 책, 요리방법책, 한 시절에 유행했던 공부 관련 에세이, … 업무 관련책.
업무 관련 단어를 발견하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더 없이 조용하고 널찍한 카페가 답답했다. 공기가 무거웠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해 왼 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아, 큰일이다. 나는 가방 안에 있는 비상용 공황, 불안 약을 꺼내 탈탈 털어먹었다.
이 약을 사용하는 날이 오다니-
이렇게 조용하고 다른 자극이 없는 더 없이 평화로운 공간에서, 사람들 때문이 아닌 단어 몇 개 때문이라니
미친듯이 내달리는 심장을 아기처럼 고이 붙들고 티나지 않게 자리에 앉아 심호흡을 크게 했다. 지금 나에게는 평안이 필요하다. 안정이 필요하다. 무언가 집중을 돌릴 무언가.
'알퐁스 도데'의 '별'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양산을 쓴 귀부인과 이를 쳐다보는 소년이 수채화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책을 넘겨보았다. 예쁘고 고귀한 신분의 소녀와 이를 보고 퐁당 마음에 그녀를 담아버리는 목동이 그려졌다. 아름다운 광경이야. 순수한 순간이고. 그렇게 별을 두어 번 읽으며 머릿속에 두 사람이 함께 볼 밤하늘을 그렸더니 심장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약이 돌기 시작했나 보다.
다이어리를 쓰려던 마음을 접고, 책을 덮었다. 잠시간 멍하니 앉아있다 카페를 나섰다. 밤 9시였다. 이제 씻고, 침대 안에서 책을 읽어야지- 다짐하며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3시에 가장 먼저 자리를 선점했을 때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문을 조심히 여니 낯선 여자 3명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고, 침대에 스르륵 누웠다.
잠시 뒤, "안녕하세요오~"하는 밝은 목소리와 함께 노란 머리 여자가 들어왔다. 뽀얀 얼굴에 중단발의 편안한 차림이었다. 곧이어 화장실에서 샤워를 한 여자가 나왔다. 이로써 6인실이 꽉 찼다.
엇, 저는, 먼저 씻으실래요?
아, 언제 씻고 싶으세요?
내일이요, 아니면 오늘이요?
몇 가지 확인 절차를 서로 거친 뒤 암묵적인 샤워 순서를 정했다. 내 차례가 되어 깨끗이 씻고 침대에 앉아 짐을 정리했다. 아, 이제 뭐 하지 - 가지고 온 책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 읽기 싫은데, 밑에 내려가서 책 한 권을 사야 하나…
저기, 혼자 오셨어요?
노란 머리 여자가 나에게 물었다.
[엇, 네. 혹시, 그쪽도 혼자…?]
아, 네! 보니까 위에 침대 분도 혼자 오셨더라고요.
나 안 그래도 위에 분 봤어요!
오는 길에, 빵모자를 쓰고 열심히 돌아다니던데, 엄청 어린가봐.
너무 예뻐서 기억했잖아요.
어느 지방 사투리지, 낯선 말투에 고향이 짐작가지 않았지만 밀려오는 친절한 정보들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내 마음의 경계를 불현듯 넘어선다고?
잠시만- 난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단 말예요. 이건 내가 원하던 북스테이가 아니라고요!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누군가와 대화를 한 번은 해야 6인실 도미토리지- 하는 숙명같은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몇 살인지, 무얼 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고보니 내 윗층의 늘씬한 여자는 스물 한 살의 일본인이었다. 한국에 온 지 3달이 되었으며, 세븐틴을 좋아해 교환 학생으로 서울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 "여기 샤워실 완전 크다 아니에요?" 라며 곰살맞게 말을 먼저 걸어오는 탈색 머리의 조금 무서워보였던 여자는 나와 동갑이며, 남자친구와 싸워서 홧김에 운전을 해서 여기까지 달려왔다고 한다. 옛날부터 게스트하우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여행을 온다는 생각을 하다기보단, 보란 듯이 화냈다는 것을 표시하려고 선택한 여행이라고 한다.
자, 이제 내 차례다. 나는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저는, 스물 여덟살이에요. 서울에서 왔고, 경기도에 살아요. 북스테이를 돌아다니면서 글을 쓰고 있어요. 여기에 책이 많다고 해서 책을 읽으러 왔고. 그래서 안동 어떻게 여행할지 계획이 전혀 없어요. 오늘도 그래서 일찍 도착해서 주변 북카페에 있다 왔어요. 여기보다 더 좋던데요?]
와아! 책 좋아하는 구나! 그럼 나 책 하나 추천해 줄래요?
어, 무슨 책 읽어요?
에세이요!
엇 나 에세이는 잘 안 읽는데…? 음, 슬픔의 방문이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어때요?
하는 노란 머리 여자와의 대화를 타고, 일본 여자와의 대화도.
와, 일본에 와본 적 있어요?
네 있어요. 후쿠오카에 가 봤어요.
어떤 일본 음식 먹어봤어요?
엇, 저 거기 가서 스시랑 오코노미야끼랑 라멘이랑 이런 것들이요. 나 거기 먹으러 갔나봐-
나도 나도! 나도 일본 가서 타코야끼 먹었는데, 그 오사카 앞에 한국인들 사진 찍는 곳 알죠?
알아요. 그 팔 벌려서 남자가 운동복 입고 있는 거기 간판 아래!
깔깔거리며 본격적으로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주 간단하고 소소한 것들. 일본과 책과 안동과 내일에 대한 것들. 마음이 아프기 전과 다르지 않게 대응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평범한 대화들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 그만큼 아파도 멀쩡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여행지라고 느껴질 법한 판에 박힌 이야기들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힘껏 있는대로 손을 휘저었다. 상대방도 맞잡은 두 손을 편안히 흔들었다.
됐다. 나는 괜찮다-
일본인 친구가 안동 하회 마을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노란 머리 여자가 내게 말했다.
"같이 가줘요~ 어차피 내일 계획도 없다면서~ 나는 내일 안동 소주 사러 가려고. 혹시 안동 소주 사러 가려는 사람 없죠? 아 나도 시간만 되면 같이 따라 가고 싶은데, 남자친구랑 사실 오면서 화해해가지고. 내일 바로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요? 오면서 어떻게 화해를 해?
"생각해보니 내가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전화하면서 내가 먼저 미안하다 했어요.
그렇게 화 내서 미안하다고."
아니, 그렇게 화가 빨리 풀리나. 내가 연애를 안 한지 오래돼서 모르는 건가. 뭐 어쨌거나, 안 그래도 버스를 혼자 타기 무서웠다며 나를 초롱초롱 쳐다보는 일본 친구의 눈을 봤다. 음, 나는 여행이 아니라 혼자 틀어박혀서 책이나 딥따 읽고 글이나 쓰러 온 건데…에라 모르겠다.
"그, 제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기분을 좀 보고. 어, 그리고 같이 가고 싶으면 같이 가요."
잘 생각했다며 나를 토닥여준 노란 머리 여자는 다음 누가 씻을 거냐며 자연스레 샤워 순서를 정했고, 나는 꽤 빨리 샤워를 했다. 노곤노곤- 몸이 피곤한데 카페에서 많이 먹은 카페인 때문에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이불과 몸이 부딪치는 소리를 얼마간 멍하니 듣다보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7시 30분. 사람은 출근을 안 해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같은 시간에 눈이 떠진다. 출근 날에는 그렇게 위로 올라가기를 거절했던 눈꺼풀이, 휴일인데 잘 됐다 하며 빠른 가게문을 개장했다. 참, 이렇게 답답할 때가 있나. 내 몸도 내 편이 아니라니. 허탈해하며 이미 밝아버린 밖을 커튼 밖을 통해 어렴풋이 느꼈다. 아침을 먹으러 함께 내려가자는 약속을 한 터라 두 명을 순서대로 깨웠다. 일본인 친구는 바로 일어나서 치장을 시작했고, 노란 머리 친구는 벌러덩 누워있다가 우리가 간단한 치장을 끝낸 후에야 비척비척하며 1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아침을 먹으며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