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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잠옷 입고 모르는 사람과 술 먹으며

(4) 안동 풍경 북스테이 마지막 날, 모르는 사람과 술 먹기

by 라화랑

모르는 사람이 내 침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를 건넸다. 그 사람이 대뜸 날 보더니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저녁 드셨어요? 저는 이제 먹으려고 하는데, 안동 찜닭을 먹고 싶거든요. 근데 1인분으로는 안 팔아서, 혹시 안 드셨으면 같이 드실래요?"

앗,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요. 점심으로 윗층 침대를 쓰는 여자 친구와 함께 먹었다는 말과 함께, 나는 잠시 다른 일로 외출할 것이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다음 날 기분을 전환하여 입고 갈 옷을 사러 갈 터였다. 그 여자는 알았다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 주었다.

옷을 사고, 버스를 두 번 잘못 타고 돌아오니 늦은 밤이었다. 1층 북카페에서 일본 친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돌아오자마자 무슨 일이 있었냐며 바로 달려갔다. 하룻밤을 함께하고 반 나절을 교통편만 함께한 사이인데도, 나는 마음을 열고 활짝 웃기로 했으니 더없이 반가움을 표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며, 앞에 새로 들어온 분과도 소개시켜주었다. 몇 마디 말을 주고 받고, 몇 살인지 확인을 하고, 새로 온 여자가 물었다.


"저 오늘 저녁을 못 먹어서, 1층에 뭐 있나 볼 건데. 혹시 술 먹을 수 있어요? 내가 살게요."

술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나와 일본 여자는 콜을 외치고 1층으로 단숨에 내려갔다. 셋 다 잠옷 차림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안동 막걸리 2병을 나눠먹으며 즐거이 이야기했다. 1층이 문 닫을 시간이 되어,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새로운 여행객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혹시 술…"

-HELLO? SORRY, CAN YOU SPEAK ENGLISH?

동글동글한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중단발 검은 머리의 여자는 영어를 말했고 셋은 당황했다. 당연히 한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러고 보니 앞의 일본 친구도 일본 사람이긴 하지. 그제서야 여기가 게스트하우스임을 좀 더 직감했다.


"나 근데, 언니한테 궁금한 거 있어요."

-응? 뭐?

내가 질문한 일본 여자친구를 쳐다봤다.


"언니 우리 같이 있었는데 이름을 몰라요"

오 마이 갓,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글을 쓰며 일본 여자라고 했던 이유는 이름을 몰라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옆에 있으면 툭툭 치면서 "저거 예쁘다~"라고 말을 걸면 되었다. 또, 돌아와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눈을 맞추면 그것이 자기에게 하는 말인 줄 알았으니 굳이 이름을 물을 필요가 없던 것이다. 세상에나, 일본에서 온 지 3개월이 됐고, 세븐틴을 좋아해서 서울 강남에 있는 팬카페에도 다녀왔으며, 지금은 베트남 짝사랑남이 있다는 것도 알면서 이름을 모르다니!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내 마음 한구석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제서야 통성명을 했다. 미오. 참 예쁜 이름이라고 말해 주었다.
내 이름도.
술을 마시자고 한 언니의 이름은 지혜.
새로 온 외국인 이름은 패트라.

드디어 이름을 얻은 우리 네 사람은 한 시간 가량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인 요상한 말로 서로의 연애를 추억하다가, 잠이 들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술자리였지만 최근에 먹었던 술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편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더니 음식이 맛있어진다는 경험을 안동에서 하다니, 뜻밖의 수확이었다.

새벽 1시가 되어, 술자리가 파했다. 씻으려고 샤워실에 들어가 내 샤워 도구를 뒤적거렸다. 그 때, 내가 넣어둔 적 없는 종이가 한 장 나왔다. 이게 뭐지, 세수를 하려고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써보니 그건 노란 머리 여자가 놔두고 간 자신의 마음 한구석이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노란 머리 여자를 다슬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나, 나는 이렇게 또 준 것도 없는 내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간 다슬을 꼭 안아주지 못한 걸 후회한다. 고작 밤에 몇 시간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다슬은 나에게 작은 기쁨을 떼어놓고 떠났다. 편지 뒷편에는 1층에서 파는 고양이 모양 책갈피가 끼워져 있었다.

다슬, 너도 외로운 한 사람이었구나.

마음을 열지도 않은 나와 말도 잘 안 통하는 미오와의 몇 시간이 다슬에겐 평안한 시간이 되었다니, 뭉클함이 밀려왔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착한 사람들은 이렇게 마음이 연결되어 가는구나.

혼자라서 외로웠을 안동 여행길을 나와 미오가 같이 떠나는 걸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슬은 우리를 버스 역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자신은 바로 출발할 시간이 아닌데도. 그 짧은 시간만큼이나마 사람과 함께 친밀함을 나누고 싶었던 연약하고 착한 아이의 편지를 나는 오래 기억하기로 했다. 가방 안에 편지를 꼿꼿이 펴서 책 안에 소중히 넣었다.

다음 날, 가기 전에 꼭 인사하겠다며 깨워달라고 했지만 괜히 미안해 조용히 가방을 메고 나왔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깬 지혜 언니가 눈짓으로 잘 가라고 웃어주었다. 나는 왼 손을 들어 안녕-하고 인사했다.


고마워요, 다들. 이제부터 함께 누군가와 섞여서 살고 싶다 생각했을 때마침 선뜻 눈 맞추고 인사해주고, 즐겁게 이야기까지 나눠 주어서.
당신들이 한 일이 나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선물이라는 걸,
자고 있는 세 여자는 모르겠지.

서울 청량리로 가는 안동 KTX는 8시 30분 출발이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걸어서 20분가량 걸리기에, 혹시 몰라 7시 50분쯤 길을 나섰는…데 눈 앞에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정말 희귀한, 시간이 되어서야만 나타나는 그 마을 전용 버스가 나타났다. 너무 놀라 발딱발딱 뛰며 헉헉 거리며 버스를 잡고 물었다.

"이 버스, 안동역 가요? 언제 출발해요?"

버스 기사님이 날 보며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가씨 와서 타면 바로 출발하제- 그러려고 이제 출발하쟈- 그챠?"

뒤의 승객들이 무언의 미소로 동조했다.

아, 날 기다린 거구나. 무거운 가방을 이고 호스텔에서 내려오는 여자애가 안동역을 꼭 가겠거니, 하고 나를 알아준 거였구나- 깨달았다.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간질간질, 따뜻했다. 미처 졸음이 가시지 않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내 삶도 이랬을 수도 있겠구나- 이제서야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운, 나의 혼자만의 노력이라고 버둥거렸던 그 모든 세월과 시간들이 사실은 이렇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기다리는 버스에게 난 헐레벌떡 쫓아가 물어보면 된다.

이 버스, 거기 가요?

그럼 그 버스는 말하겠지.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


난 내가 탈 버스를 잘 기다리다가, 왔을 때 냉큼 타면 되는거다. 무한정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병산 서원에서처럼 결국 버스 시간을 놓쳐 택시를 타며 속상해할 때도 있겠지만 이렇게 흔치 않은 기회로 생각지도 못한 버스를 탈 때도 있다. 나는 내가 더욱 혼자여야 어른이 된다고 생각했고, 스스로의 노력만이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라 믿었다.


혼자 싸워왔던 세상은 사실 나에게 이미 손 내밀고 있었다. 수 없이 많은 끈이 나에게 내려지고 있었고, 나는 그 끈을 잡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오늘 버스처럼.


가뿐히 안동역에 도착하니 시간이 남았다. 서울로 가는 발걸음이 행운의 징표같다. 오늘은 가뿐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의 하루는, 또 다시 시작이다.

오늘 나의 하루는, 누구에게 마음을 한 폭 기대어 볼까. 설레인다.


10월의 중순에, 갑자기 추워진 날씨를 탓하며

두꺼운 옷을 꺼내기 시작하면서도

잠옷은 반팔을 고수하는 계절입니다.


안녕하세요- 일랑입니다.

안동에서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북스테이를 통해 엮은 마음 조각 중,

지금까지 가장 애정하는 글모음들이었습니다.


다음 편에는,

처음으로 일기 외의 다른 글을 쓰기로 결심한

수습 글쓴이로서의 결심이 담긴 여름의 파주 헤이리, <모티프원>에서 뵙겠습니다.


평안하시고, 화창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만큼 아름다운 하루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여기까지 마음을 좇아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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