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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데이트 명소 혼자 산책하다 우울해서

(2) 파주 모티프원, 이른 아침 맞이한 우울과 귀여움의 공존이란

by 라화랑


"혹시, 어떤 책 읽는지 여쭤봐도 돼요? 책 가져오셨어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요. 책 좋아하세요?]

"보시다시피, 어쩔 수 없이 책을 좋아하게 된 환경이에요."

[아, 그건 저도 그래요. 이런 집에서 자랐거든요.]


진짜요? 하며 해사하게 웃는 여자는 마치 새 친구를 만난 귀 달린 푸들 같이 참 귀여웠다. 눈빛이 반짝반짝-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는 말랑한 사람이라는 게 내가 몇 번 말을 섞지 않았지만 금방 그녀를 향해 내릴 수 있는 평가였다.


"어떤 거 좋아하세요? 저는 소설은 안 읽고 에세이를 읽거든요? 요새 손님들이 MZ가 다녀갔는데, 제가 믿고 장바구니에 넣어놓은 게 … "

책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에세이는 싫어한다, 하지만 어떤 에세이는 좋더라. 그 분은 나는 어떤 유명한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알랭 드 보통의 그 책이 에세이인 줄 알고 읽었는데, 소설이었느냐!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은 조금 어려웠다.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결이 맞는 사람과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즐겁구나. 내 나이, 직업, 그 사람의 배경같은 것 하나 없이도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말을 섞으며 웃을 수 있구나. 마음이 확 풀어졌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아, 이제 방해 안 할게요. 편하게 독서 하세요."

하고 내가 책 읽을 시간을 배려해주었다는 것.


따스한 사람에게 받는 자연스러운 친절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두어 시간 있다가, 그 여자분께서는 먼저 퇴근하셨다. 가시며 나에게


"여기 새벽까지 계속 있다 가셔도 돼요. 그런 분들 많아요. 그냥 거실에서 나가실 때 책장 밑에 있는 저 불 있죠? 저것만 꺼주세요. 그러면 돼요.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라는 당부와 굿나잇 인사도 덧붙였다.


완전히 혼자다. 책과, 넓은 책장, 많은 의자, 나무 냄새, 책 냄새, 그리고 밖에는 파리나 다른 어떤 생명체들이 우는 소리. 밤이라 보이지 않는 풀들이지만 그림자로도 나를 평안하게 한다. 집중하기 더없이 좋은 공간이야-


책 읽는 공간이라 하면 다들 조용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책을 읽는 사람에게 호의적인 공기다.


종이 냄새, 나무 책장에서 풍기는 냄새, 밤 풀잎이 스며들어오는 자연의 냄새 모두 책 읽는 사람에게 호의적이었다. 그 곳에서 밤까지 꽤 책을 많이 읽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수첩에 적다가 방에서 잠들었다.

오전 6시에 눈이 떠졌다.

통창이라 그런가, 블라인드를 끝까지 쳐 놨는데도 밝은 햇살이 모든 걸 뚫고 들어온다. 눈을 꼭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가, 결국 7시부터 침대에 뒹굴거리고는 7시 30분 정도에 거실로 진출했다. 어제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거실까지 가는 작은 현관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들, 그리고 LP들이 있었다.

뭐야, 감동이야. 자고 일어나서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어떤 장소에서건 책과 가까이할 수 있는 곳. 두 달 전에 이렇게 힘들 줄 모르고 예약한 내가 기특했다.


그 땐, 스스로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사실 난 이미 집이 싫기 시작했던 거고, 그건 내 자신이 싫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는데 날 너무 몰라줬다. 지금 병원에 다니면서 느끼는 건, 4월부터 그냥 인정하고 병원에 일찍 갔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울먹거리면서 가방을 꼭 붙들고 겨우 발자국을 옮길 때만이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려야 할 시기가 아니라는 걸, 그 때의 나는 왜 몰랐을까. 떨리는 손으로 책만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든 내가 괜찮아 질거라고 생각했던 게지.


침대는 푹신하고 안락했지만, 역시 내가 평소에 자던 곳이 아니라 그런가 몸이 찌뿌둥했다. 기지개를 크게 켜고 하품을 쩍쩍 하며 거실에서 잠시 녹차를 끓였다. 어제 밤 늦게까지 알랭드보통과 마주했던 방석에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 옆을 바라봤다. 초록의 나뭇잎들이 옅은 물기를 털어내고 나를 향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안녕- 어제 덕분에 잘 잤어.
밤 늦게까지 내 옆에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


혼자 익숙해진 마음속 인사를 남긴채, 잠옷 그대로 신발을 신었다. 산책이다!

관광객이 없는 헤이리 마을은 조용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가게는 문 열 준비조차 않은, 문을 꼭 닫은 모습이었다. 어디로 갈 지도 모르는 채, 발이 이끄는 대로 터벅터벅 걸었다. 축축히 내려앉은 비 온 다음 날 공기에 숨을 후- 하고 쉬어보았다.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혼자 숨을 쌕쌕거리는,
잠옷 차림의 여자.

갑자기 여기에 서 있는 나 자신이 낯설어 핸드폰을 켜 나를 바라보았다. 말간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너는, 어떤 사람인 거니.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거니.


스스로에게 말을 붙이는 게 몇 달 새 익숙해진 나는 물음표를 가슴에 꼭 붙인 채 다시금 핸드폰을 쥐고 걷는다.


관광객이 없는 관광 명소,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꾸며졌으나 텅 빈 공간, 그게 지금까지의 내가 아니었을까- 불현듯 생각이 머릿 속에 꽂혔다.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고자 했던 노력, 남들이 시기할 정도로 빛나는 젊은 시절을 보내기 위해 온갖 것을 경험하고자 했던 욕심, 연애를 하고자 발버둥쳤던 모든 나의 시도들은 모두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관광하고자 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기대치에 맞춘 적절한 놀이공원이 되었던 게지.

내부 정비를 하려고 시도조차 않은 관광명소란 결국 인기가 시들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들은 점차 떠나가기 마련이다. 불안한 마음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나, 리모델링을 하면 사람들이 다시 찾아줄까, 어떤 점이 모자란 걸까, 자책으로 점철된 나의 고통에 내가 아팠다.


생각이 생각을 물고 늘어진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지는 순간, 어딘가에서 '야옹'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휙 들어 나 말고 다른 생명체를 바라본다. 황토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고양이다. 나는 무릎을 꿇어 말을 건다.

"안녕? 넌 헤이리 마을의 주인이니? 어디서 왔어?"

'먀아옹'

"어쩌지? 난 음식이 없어. 미안해! 난 이만 가볼게!"

'먀아아아옹'


나를 얼마간 따라다니던 귀엽고 따끈따끈한 생명체가

떠났다.

정신을 번쩍 차렸다. 나는 착실히 내부 정비 중이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이보다 더 노력할 수 없을 정도로 내 마음을 잘 돌아보는 중이다. 정신건강의학과도 갔고, 꼬박꼬박 약도 챙겨먹고, 그러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책과 북스테이를 찾아 유명한 이 곳, 파주까지 온 것 아닌가.

나를 그만 때리자, 그만 질책하자고 다짐했다.


산책을 끝내고 신발을 갈아신으니 거실에서 나를 보며 말을 붙이는 여자가 보인다.


"어, 벌써 일어나셨어요? 산책 다녀오셨구나."

-네. 주변이 참 예쁘더라고요.


공용 거실에 털썩 앉아 녹차를 마시고 있자니, 큰 테이블에 여자 아이 하나가 쪼르르 앉는다. 주인이 준 종이에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한다. 여덟 살, 아니 아홉살 남짓인가. 긴 생머리에 앞머리가 일자인,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귀여운 꼬마다. 리본 머리띠를 한 여자애에게서 단호한 연필 움직임이 느껴져 괜히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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