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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여덟살을 보다보니 하고 싶어-작가

(3) 파주 모티프원, 여덟살 아이도 꿈이 있는데- 나라고 못할 쏘냐!

by 라화랑

"안녕하세요- 뭐 그리는 지 물어봐도 돼요?"


"고양이. 강아지. 근데 저는 강아지를 더 좋아해요.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는 강아지를 키우거든요."


"아, 그렇구나! 강아지 이름은 뭐예요? 참 잘 그렸다-"


"응, 강아지 이름은 뽀로예요. 근데 우리 오빠가 그림 더 잘 그려요. 우리 오빠는 만화가예요. 나도 만화가가 될 거예요. 웹툰 작가. 근데 우리 오빠는 고등학생이에요. 그리고 엄청 그림을 잘 그려요."


오빠에 대한 존경이 연필심에서부터 차오르는 듯, 꾹꾹 그림을 눌러 그리며 아이가 답했다. 아, 그렇구나. 정말 대단하네- 하는 칭찬을 해 주는 동시에 긴 생머리의 태닝을 한 나시와 청 반바지 차림의 여자가 나왔다. 엄마인가 보다. 선글라스를 나시에 걸친 채다. 참 멋드러진 한 쌍이다- 생각했다. 호스트가 두 명에게 말을 붙이고, 둘은 곧 핸드폰을 호스트에게 맡긴 채 멋진 포즈를 지어 보인다. 사진을 찍고 찍히는 게 익숙한 듯 포즈가 남다르다. 자연스럽되, 가장 이 공간을 잘 드러내는 곳인 베란다에 나가 문을 열고 닫는 행동을 계속하며 깔깔 웃었다. 저것이 저 모녀의 소통 방식이구나. 신세대 엄마와 아이일세, 생각하며 멀거니 쳐다보았다. 둘에게서 흘러나오는 행복에 가만히 미소지었다. 가방을 다 싼 후, 두 모녀가 떠났다. 거실에는 나와 호스트 둘만 남았다.

"혹시, 지금 여기 저만 연박이에요?"

[네! 원래는 연박 손님이 많은데, 오늘은 유달리 손님밖에 없네요.]

"어머, 잘됐다. 저 그러면 여기 어차피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니고, 오로지 이 공간에서 글 쓰려고 온 거거든요. 제 글 메이트가 되어주시면 안 될까요?"

컴퓨터 앞에 앉은 호스트를 보며 내가 태블릿과 키보드를 들고 거실의 큰 탁자에 얼른 내려놓았다.

"아, 좋아요! 지금부터 오후 3시까지 제가 청소 시간이거든요. 제가 지금부터 손님이 글 잘 쓰고 계신지 오며가며 봐드릴게요. 안 쓰고 있으면, 제가 잔소리해드릴게요!"

바라던 바다. 옆에 사람이 없는 채로, 나는 이 공간을 오롯이 쓸 수 있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선전포고를 날렸으니 나는 무엇이든 써내야 한다.

내가 말을 뱉어놓고 나도 놀랐다.

내가, 글을, 무얼, 쓰겠단 거야?


최근의 나는 무언가 쓰고 싶은 사람이었다. 다만, 무엇을 쓸지 정하지 못했을 뿐. 어떤 이야기가 재미있겠다며 스토리 라인을 죽 세우다가도- 끝끝내 글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황급히 상상했던 대로 글이 나오지 않는 나의 능력에 한탄하고.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미숙한 나는 겪어내지 못한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글로 써내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이 이야기가 재미 있을까, 과연.'

'내가 독자라도 이 정도면 첫 문장에 벌써 책 덮겠다'


는 자기 검열을 몇 번이고 1인 소파에 웅크려 겪어낸 뒤였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마음의 소리에 모르는 누군가의 기대감이 더해지자, 나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파주에 온 이유를 만들어내자. 이거다.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망작을 하나 만들어내자.

그리고 그걸 낯선 이에게 보여주자.

나를 좀, 평해주세요 -

혼자 겪은 수모를 엉망진창인 글로 함께 겪어주세요-

부지런히 방과 방 사이를 돌아다니며 이불이며 갖가지 쓰레기를 든 곱슬머리의 귀여운 여성분에게 나는 나를 내보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타자기에 손을 들었다. 자, 이제 천재 피아니스트같이 뭐라도 써 져야 할 시점이야. 경건한 마음이었다. 타자와 나의 손 사이의 간격은 딱 1mm, 그만큼 가깝다.


………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뭘 쓸지 모르면서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만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환상이었다.

'일기라도 써 볼까.'

'어제 읽다 만 책 독후감이라도 써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 하는 나를 호호호 하는 살풋한 웃음으로 한 번 눌러준 호스트가 다시금 거실을 한 번 더 지나갔고, 나는 결심했다. 내 이야기를 쓰기로.

내 마음을 터놓아야겠다.


내가 제일 잘 하는 건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답하는 것, 그리고 책을 무지하게 읽는 것. 두 가지였다.


적절히 소설인 척 하지만 사실은 내 이야기인 듯한 에세이. 소설과 현실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지금 내 마음과 정신 상태를 책을 소개하는 여자의 편지로 표현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퍽하고 내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


이거다. 역시 난, 처음부터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판타지적인 이야기꾼이 될 수 없다. 내가 동경하는 작가는 아름다운 동화나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이야기꾼이다.


하지만 내가 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내 상태라도, 정확히, 솔직해지는 것이다.



내가 놀랄만큼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 무척 예민해도 그만큼 환영받는 공간은 이 글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터놓지 못할 내밀하고 찌질한, 사랑의 실마리가 될 지도 모를 티끌같은 가능성. 내가 최근에 겪고 있는 애매모호한 갈팡질팡함과 알랭 드 보통은 아주 쿵짝이 잘 맞는 상대였다. 한 번 내가 처음부터 답답한 속을 풀어놓듯이 지금 있는 파주 헤이리 마을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더니, 글이 쉬지 않고 써졌다. 그제서야 한 번 더 깨달았다.


나, 진짜 터 놓을 데가 아무데도 없었구나.


대중이나 다른 사회적인 관계에 놓인 사람들이 내 글을 전혀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점점 과감해졌다. 얼마나 답답했던 속이었는지, 한 시간만에 빈 칸을 빼고서라도 7000자 남짓한 넘는 성토가 이루어졌다.


다른 이에게 기대고 살 걸, 이렇게 응어리지고 아플 정도로 꼭꼭 뭉쳐놓지 말고 슬금슬금 흘리면서 살 걸, 하는 후회와 더불어 이렇게 드래곤볼처럼 뭉쳐진 내 감정통이 내가 원하던 형태로 표현됨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요동쳤다. 글을 다 쓰고 만족하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같잖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도 참 귀여웠다. 오랜만에 나에게 만족한 한 시간이었다. 마침 오후 한 시 정도가 되어, 글을 마무리하고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다.

파주 헤이리마을이 데이트 명소, 근거리 가족 여행 코스였지 하고 단박에 깨달았다. 문을 열고 보니 혼자 거리를 떠도는 영혼은 나와 고양이 뿐이었다. 다들 손에 손을 잡고


이건 뭐야,

어머 저 카페 예쁘다,

우리 이번에는 저거 구경하러 가자,

너 저기 멀리 뛰어다니면 안 돼지,

용호 엄마 쟤 좀 잡아봐,


하는 소란스럽고 다정한 장면들이 내 앞에 훅 다가왔다. 어지러웠다. 그저 한식을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 기념품 가게에 들러 나도 물건 구경을 몇 차례 했다. 그 속에 끼어 관광을 하러 잠시 들른 청춘인 척 하고 싶었다. 세계에 나도 포함되고 싶었다. 괜히 뒤적거리던 천가방 따위를 내려놓고, 2층 한식집에 들어가 육개장을 시켰다.

낭만의 성지인 헤이리 마을까지 와서 육개장이나 설렁탕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유일한 손님으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유쾌하게 웃는 어린 아이와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따스해보였다.


그 때였다. 심장이 덜커덩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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