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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남해, 택시 타지 말라는 택시기사님

(1)남해 몽도 - 저는 뚜벅이인데, 택시 타지 말라고요?

by 라화랑
최고의 북스테이는 계획이나 마음을 텅 빈 채로 가져가서 가득 찬 채로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내린 최고의 북스테이에 대한 정답이며, 나는 남해에서 정답을 맞이했다. 사람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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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먹었다. 버스 출발 15분 전에 시켰는데, 5분 안에 계란이 풀어진 라면이 뜨끈한 냄비에 그대로 담겨 왔다. 불지도 않고 뜨거움을 함께 삼켰다. 내가 라면을 5분 안에 먹고 화장실까지 다녀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 날 알았다. 여긴 서울 남부 터미널이다. 서울에서 남해로 가는 유일한 대중 교통은 시외 버스이다. 프리미엄 버스도 있지만, 출퇴근하는 직장인에게는 전혀 시간대가 맞지 않다. 오랜만에 타는 시외 버스에 대학 시절 늘 집을 떠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아주 오래된, 현대적이지 못한 아날로그가 주는 여행의 설렘.

와이파이가 되지 않고, 핸드폰 충전을 할 수도 없어 절전 모드로 설정해야 하는 긴 버스 여행은 5시간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퇴근길 시간이 겹치기도 했고, 갑자기 많은 비가 쏟아내린 까닭에 앞에서 사고난 차량이 길을 막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난 초조해졌다. 이번에 묵을 북스테이 '몽도'는 철저한 규칙이 있어, 여행객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분명 아침에 보낸 내 메세지는 이랬단 말이다.

안녕하세요, 나화랑님. 몽도입니다. 오늘 몇 시쯤 입실 예정이신지, 동선이 정해지면 문자 부탁드려요. 입실은 오후 4시 - 밤 10시까지 가능합니다. 사진은 주차시 주의사항이에요. 차를 가져오실 경우 꼭 살펴봐주세요.
몽도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터미널에서 4시 30분 출발하여 밤 9시 30분이면 도착할 듯 합니다! 도착하면 택시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며, 혹시 더 늦어져서 10시 가까이 도착 예정이면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밤 9시가 넘어가도록, 버스는 남해에 도착할 생각이 없었다. 이렇게 막힐 줄이야- 괜히 유명세를 믿고 멀리까지 와서 민폐를 끼치는 상황을 만들다니, 스스로가 밉고 버스 기사님은 더욱 밉고, 사실은 날씨가 제일 미웠다. 갑자기 왜 비가 이렇게 세차게 쏟아지냔 말이야! 밤 10시가 지나면 혹시 가차없이 문을 닫아버리시고는,


"이런 손님은 예의가 없어 받지 않아요. 환불해드릴테니 가세요."


라고 하면 어쩌지? 불안이 날개를 달고 훨훨 상상의 나라로 떠나버리고, 나는 초조한 마음에 핸드폰을 들어 조심스레 메세지를 한 번 더 남겼다. 시간은 이미 약속한 9시 30분 딱 10분 전인 9시 20분이었다.


몽도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늘 밤 9시 30분 체크인 약속드린 나화랑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인데, 지금 네이버 지도로 남은 시각을 쳐보니 남해 공용 터미널에 도착하는 시간이 오후 10시나 되어야 할 것 같아서 죄송하여 문자 드립니다.
체크인 시간을 제가 어길 것 같은데,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만 양해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기대하던 몽도행이라 더욱이 조심스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제발, 저를 쫓아내지 말아주세요. 저는 진상 손님이 아니랍니다,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메세지는 곧 6분 만에 답장을 받았다.


비가 와서 차가 많이 막혔나봐요. 예정대로 소요시간 4시간 반이라도 힘들텐데, 오늘은 시간이 더 걸리는군요. 터미널 앞에 택시들이 있을 거예요. 남해터미널에서 몽도까지는 20-25분쯤 걸릴 겁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해는 지금 비가 그쳤습니다. 조심히 오세요. 저는 그리 일찍 자는 편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따스한 답장, 이해한다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나니 까득까득 손톱을 매만지던 오른손이 무릎으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다행이다- 도착해서 택시를 타면 다시 연락드리겠다는 메세지를 남기고 나니 오후 10시쯤 남해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이 꺼진, 축축한 남해 터미널은 아주 음산했으며, 택시 정류장에는 휑한 도로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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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서울에서 온 초짜 여행객? 당연히 이 시간에 택시 없지롱!'


시꺼먼 도로가 나를 조롱하는 듯 했다. 나는 이제 이깟 시련쯤 극복할 수 있는 프로 북스테이 숙박객으로, 당당히 카카오택시를 잡았다. 1분만에 빠르게 택시 하나가 잡혔고, 곧 택시 기사님 전화를 받았다.


[지금 @#$@#$#%#@%@#$@#$ㅏㅇ{요? @#$@#$@#%@#인데?]


-예.예…? 기사님 혹시 뭐라고 하셨….


[아니, @#$@#$@#$라고 #$@#$, 냐고!#$@$#$]


일본어인지, 사투리인지, 내가 뭘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어찌됐건 어디 있냐고 물으시는 것 같다고 상황상 판단을 했다. 진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강한 억양이 익숙지 않아 나는 지레짐작한 대로 냅다

'저 지금 택시정류장 앞에 있어요!'

라고 이야기하고 끊었다. …이게 맞길 바란다. 나의 상황판단력이 맞았기를.

다행히 웬 택시 하나가 30초 후에 휘리릭 서고, 나는 타자마자 확인했다.


"이거, 몽도로 가는 카카오 택시 맞죠?"


"어어, 맞아요. 간다잉? 근데, 여자 혼자 이 시간에 여행을 왔어?"


택시 기사님은 짧은 머리의 중년 여성분이셨고, 목소리가 허스키한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셨다. 나는 흔쾌히 택시 기사님과의 대담에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여성분이셔서 그런지,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사실 나도 남자 기사님과 밤늦게 외딴 곳인 몽도까지 가는 것이 껄끄러운 참이었다.


"네, 저 혼자 왔어요. 여기는 여자 혼자 여행을 잘 안 오나요?"


"하이고, 겁도 없다! 하긴, 서울이나 경기도 여자들은 혼자 이렇게 잘 와요. 근데 이 시간은 위험하지. 여기가 터미널이라 다행이지. 앞으로 남해에서는 택시 타지 말아요."


뜻밖의 경고에 나는 머리가 어질해졌다. 엇, 저는 그저 택시 타고 돌아다닐 생각만 했는걸요? 이유를 묻자 열성적으로 택시 업계를 까내리기 시작하셨다.


"여기는, 서울이랑 달라서 택시가 많지도 않아. 그리고 이렇게 구석으로 들어가면 #$%요금을 받아. [예? 뭐라고 하셨어요 방금?] 잘 모르지? 공구리. 공구리요금.

공구리가 뭐냐면 이렇게 안으로 구석으로 들어가면 나올 때 빈 차로 나와야 되잖아. 그래서 그 돈을 다 받는다고. 미터기로 가면 이런 데는 훨씬 비쌀 수도 있어. 그래서 여기는 대부분 전화로 예약을 해. 아는 택시기사한테 데려다 달라고. 그러면 바로 타는 것도 아니고, 언제쯤 나와라- 하면 그 때 얼마라고 흥정하고 타. 여기 사람들은 다 그래. 시내가 아닌 이상 택시 타고 내리기 힘든 곳이야. 그러니까, 내가 팁을 알려줄게요. 내가 이런 말 하면 손님들이 다 그래. 아이고- 사장님은 그러면 땅 파서 장사하냐고. 손님한테 이런 걸 알려주면 어떡하냐고. 근데 나는 그래. 그래도, 여긴 택시 타고 돌아다니기 불편하다고- 크하하하 웃기제?"


유쾌한 택시 기사님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약점이 될 법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놓는 사람에게 큰 친밀감과 전문성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택시 기사님이 웬만하면 택시를 타지 말라니, 나 같으면 초짜 여행객인 이 어린 애한테 어떻게 돈을 더 받을까 고민하면서 살살 꼬실 것 같은데 말이지. 대쪽같이 남해는 택시가 별로다! 라며 선포하시는 이 패기. 믿음직스러운 분이다, 판단한 나는 이것저것 더 여쭤보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기사님? 그리고 혹시 몽도 주변에 추천하실 만한 여행지가 있을까요? 남해에 유명한 여행지는 뭐가 있을까요? 저 사실, 아무것도 검색 안 하고 그냥 몽도가 좋아서 왔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어디보자, 그 주변에는 독일마을이 유명해요. 그리고 스카이워크도 있고. 근데 내가 팁을 하나 주자면, 택시 타지 말고 인터넷에 버스를 검색하면 나와요. 뚜벅이 버스라고. 그거를 검색해봐요. 시간을 잘 맞추면 웬만한 관광지는 다 가. 그러니까 택시 탈 생각 하지 말아요. 하하하하. 근데, 거기는 뭐 하는 덴데? 그 마을회관 앞에 있는 숙박집 아니야?"


"네, 맞아요. 거기가 북스테이라고, 제가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해서요. 그런 걸 전문으로 하는 게스트하우스로 유명하거든요. 그래서 왔어요. 오고나니 멀긴 하지만, 이렇게 좋은 분도 만나니 좋네요. 남해가 참 좋은 것 같아요, 저는."


나의 입바른 칭찬에 택시 기사님이 흡족한 듯 껄껄 호탕하게 웃었고, 나는 [카카오 네비보다 자기가 더 아는 길로 가면 훨씬 빠르니 이리로 가겠다]며 엄숙하게 선포하신 기사님에게 [믿습니다!]를 외쳤다. 정말 네이버 지도보다 5분 더 빨리 도착했다.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마지막까지 기사님이 외쳤다.


앞으로 여기에서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게요! 남해 좋아!
잘 관광하고 놀다가 가요!


네, 그러게요. 정말 남해 좋네요.

따스한 마음의 택시기사님을 뒤로 한 채, 나는 10시 20분 경 조심스레 몽도 문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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