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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고양이가 살려준 나, 모티프원

(4) 파주 모티프원, 내가 왜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대답

by 라화랑

"육개장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내 앞에 음식들이 착착 놓여졌고, 나는 애써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지금 이 순간만 버티면.


왜 나는 응급 약을 가방에 놓고 온 걸까. 모티브원 밖의 세상도 책과 함께하는 안온한 곳이라고 착각했던 걸까.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기분이었다. 애써 숟가락을 떴지만 손이 벌벌 떨려 자꾸 빨간 국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살려주세요. 이런 나를 누가 좀 도와주세요. 다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연락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혼자 이걸 견뎌내야 해. 메신저 속의 가족 얼굴을 보면서도 전화를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난, 이걸, 혼자, 어떻게, 이렇게, 계속?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심호흡을 하며 그저 눈을 꼭 감고 견뎠더니 심장이 좀 괜찮아졌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음식을 반쯤 욱여넣었다. 황급히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를 흡 하고 크게 들이마셨다. 휴- 내뱉는 한숨에 바닥을 쳐다보자, 길냥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갈색과 하얀색이 섞인 아주 어린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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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거리는 듯한 묘한 표정과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고 오도카니 가만히 있는 그 순진무구함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귀여움이 세상을 구하고 지금의 나도 구했다. 쪼그려 앉아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 덕분이야. 나 갈게. 너 오늘 한 사람 구해준 거야."


산뜻한 산책길. 다시금 마음이 안정된 나는 모티프원으로 돌아왔다. 하루 있었던 것 뿐인데, 문을 열자마자 모든 긴장이 풀리며 어깨가 내려갔다. 그제서야 알았다. 어깨가 꼭꼭 굳어 위로 올라가 있었구나- 하고.

공용 거실로 가서 내 자리에 앉았다. 마침 호스트분이 청소를 끝냈는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저어…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


-아 네네, 그럼요!


"괜찮으시면 혹시 제 글 잠깐 읽어주시고 평해주시면 안될까요?"


-어머 그럼요 그럼요! 제가 지금 이걸 보면 될까요? 아, 이거 여기에 쓰시는구나. 어, 이거 어떤 이야기예요? 같이 설명해주세요! 읽고 있을게요!


"사랑 이야기인데, 편지 형식이에요. 화자는 여자고요.

요새 살롱이니, 커뮤니티니 하면서 청춘들이 그런 모임을 많이 하잖아요. 느슨한 연대의 주제가 있는 간간한 인연들. 그런 인연들 속에서 애매하게 꽃피우지 못하고 사그러들었다가, 불타올랐다가 하는 묘한 감정들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연인이라 부를 수 없고, 짝사랑이라 부르기엔 거창한 가볍고 너무 가볍다기엔 직장도 나이도 잘 모르는 요새 젊은이들 모임에서 나타나는 의외의 순진한 면모 같은 것들이요.

매 번 이 여자는 책을 추천해줘요. 그러면서 며칠간 남자와 있었던 일을 상기하는 거예요. 자기 마음을 그러면서 정리하는 거죠.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는 예민한 여자의 연서입니다. 혹시 보시고, 재미 없으면 편하게 제발 말씀해 주세요. 왜냐하면 제가 이거 좀 길게 써서 독립출판으로 내보고 싶거든요. 지금 제재를 찾는 중이라 이것 저것 시도 중이에요."

아아, 네에! 라는 대답과 함께 호스트가 내 글을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덜커덕거렸다. 내 글을 누군가가 읽는 건 처음이라 떨렸다. 물론 어렸을 때 선생님이 내 일기를 읽은 적은 있고, 대학을 입학할 때 말도 안 되는 자기소개서를 입학사정관이 읽은 적도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다이어리조차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비밀로 점철된 사람이 바로 나였단 말이다! 괜히 손을 만지작거리며, 먹고 싶지도 않은 녹차를 우리는 척 자리를 떴다. 뒷통수에 모든 신경을 곤두선 채로. 달그락거리며 녹차 잔을 손으로 툭툭 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뒤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렸는데, 내 착각인가.

-...해요! 이거 완전 신선해요! 그리고 너무 재미있는데요? 와, 이걸 1시간만에 쓰셨다고요? 제가 청소하는 그 부산스러울 동안 쓰신 거잖아요, 저 자리에서요! 맞죠! 와, 정말 대단해요! 제가 여자라서 특히 더 공감가는 부분이 많고, 이야기가 처음부터 다 안 나오고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요. 근데, 여기 이 내용은 잘 이해가 안 가요. 여기 뭐예요?


"아, 이건 그 앞에 메세지를 남자가 이런 식으로 더 보냈단 설정인데, 그걸 더 써야겠네요. 이해가 안 갔구나. 그거 외에는 혹시 어땠어요? 저 진짜 솔직히 말씀해주셔도 괜찮은데."


-아아, 그런 설정이 더 있구나. 뭔가 더 있을 것 같아서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근데 그것 외에는 전 너무 재밌는데요? 진짜 이거 여기서 한 시간만에 생각을 해 내신 거예요?


"네. 여기 덕분에요. 그리고 호스트님도 제게 영감을 줬어요. 감사해요."


-아니에요! 제가 영광이죠! 우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꼭 더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뿌듯했다. 어마어마한 파도가 밀려왔는데, 그냥 맞고 싶어서 흠뻑 젖었다. 자기애의 파도. 이런 나 대단해!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퐁퐁 솟아났다. 가장 사랑스러운 부분은, 누군가에게 용기내서 보여줄 생각을 하고 실천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세일러문 오프닝 곡 시작에 나오는 가사인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네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 가 머릿속에 자동 재생되었다. 그 부분만 반복 재생.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인가 하고 있었다. 그 글은 지금까지 쓴 모든 인생의 다이어리 글 중 가장 솔직히 방어 기제같은 것 집어치우고 내보인 내 진심이었다.

내 진심과, 유일한 장기인 글을 빨리 써내리는 것, 솔직함, 그리고 남들은 왜 이만큼 안하지- 싶었던 독서. 몇 가지를 더하니 나만의 무언가가 완성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토록 나에게 확신을 가진 적이 없다. 나는 이 글을 끝까지 어떻게든 써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솟아났다.

처음으로 발견한 내 확신이야, 이걸 놓치고 싶지 않아.

가슴 속에 호스트의 칭찬 하나 하나를 꼬옥 담으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나는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글을 보여준 뒤에 내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었다. 공용 거실에 더 있을까 고민했지만, 토요일을 맞이해 새로운 손님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호스트는 곧 그들에게 내가 당했던 것처럼 똑같은 친절로 이곳 저곳을 소개시켜 주었고, 나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이번 여행의 임무는 이미 완수했다. 조기 완료한 미션에 성취감을 누리며 나는 2편을 위해 책을 계속 읽었다. 다음 책은 이 책으로 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지금 내가 읽고 싶은 책, 그게 내 마음에 가장 와닿은 책이기 때문이고, 그 글들은 모두 내 마음에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가깝기 때문이다. 밤까지 계속 방과 공용 거실을 드나들며 책을 읽었다. 전과 변한 것이 있다면, 마음에 드는 구절이 생기면 무조건 다이어리에 써 버릇 하기 시작한다는 것. 혹시 내가 2편이나 3편을 쓸 때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머, 나 글쟁이 같다. 내 삶에 글이 흠뻑 들어왔다.



글을 쓰고 싶었고, 그걸 써 냈다.

글에 대한 영감같은 건 밖에서 보고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맞았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나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내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내 안에서 찾은 내 일상의 마음가짐을, 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고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빈말이나마 평해 주었다. 난, 그거면 끝까지 내달릴 준비가 되었다. 더욱 책 읽는 일이 즐거워졌다. 다이어리에 책을 읽는 중간 마음에 드는 구절과 그 이유를 파란 글씨로 적는 것도 귀찮지 않아졌다. 글이 즐거워졌다.

읽고 쓰는 것이, 나에게 행복을 준다.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다. 화자를 위한 글이다. 마음 속에 욕심이 일렁인다. 오랜만에 비춰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따갑다. 하지만 두 눈 부릅뜨고 이 빛을 끌어안으려고 한다.


스포트라이트 빛 아래 서있는 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나다.
내 자신감도 같이 곁에서 따스해지기 시작했다. 차가웠던 공기에 겨울잠을 자던 친구였는데, 어디서 달콤한 냄새가 나 홀린 듯이 따라왔더니 따뜻한 빛을 발견하고는 펄쩍 뛰며 즐거워한다.

자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글을 쓸 생각을 했다. 다음 날 오전에 일찍 일어났다. 헤이리 마을을 나서야 할 시간이다. 오전 9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살풋 웃으며 호스트와 인사를 나누고, 말했다.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그 여자 화자 소설 이야기. 그거 사실은 어느 정도 제 얘기였답니다. 그 다음에는 진짜 소설이 될 거지만요. 아직까진, 그래요. 저였어요."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요! 너무 자세했어.


호스트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답했다.


"다음에 그 여자는 무얼 하고 싶고,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저도 무척 궁금해요.

어 저기, 음 ...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게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잘 있다 갑니다. 감사해요!"


의외의 인연과 의외의 글, 그리고 의외의 나를 맞이한 파주 헤이리 마을을 떠난다. 씩씩하게 혼자 헤이리 마을을 걷는다. 옆에 누가 없어도 괜찮다. 진짜 괜찮았다. 왜냐하면 난, 나를 찾고 있는 중에 내 마음에 드는 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빨간 버스에 몸을 싣는다. 새로운 책, 새로운 장르를 모르는 사람들과 읽을 생각을 하니 벌써 신난다. 이번에는 시를 가지고 3화를 써 봐야지- 벌써부터 배시시 입가가 올라간다.

안녕? 글 쓰는 나, 반가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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