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해 몽도 - 밤늦게 찾아간 지각생은 몽도 규칙에 벌벌 떨어
나를 기다리는 여주인께서 거실에 앉아계셨다.
나는 머쓱하게 인사드렸고, 다행히도 사장님께서는 웃으며 나에게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죠? 원래는 4시간에서 막혀도 4시간 반이면 올 수 있는데, 오늘은 비가 오기도 했고 금요일이라 많이 막혔나 봐요. 거기 앉아있느라 많이 힘들었겠어요."
라고 걱정해주셨다. 사르르- 일순간 긴장했던 마음이 탁 풀렸다. 많은 규칙이 있다고 들어, 인터넷으로 미리 학습해 간 터였다. 거기에는 꼭 입퇴실 시간을 지켜달라는 것이 첫 번째였다. 이것만은 불편하니 꼭 지켜달라고 지정해놓은 규칙을 버젓이 어겨버린 나이기에, 괜찮다는 문자를 받고도 한 켠에는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그 마음을 활짝 웃으며 내 안위를 먼저 묻는 여사장님 덕분에, 몽도의 포근한 공기 속으로 날려보낼 수 있었다.
"여기는 거실이예요. 원래는 밤 10시까지만 오픈하는 곳인데, 오늘은 화랑님께서 오신다길래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기가 주방, 저쪽 식기 중에서는 손님들이 쓸 수 있다고 표시된 것만 써주세요. 간단한 식사는 여기서 할 수 있지만 냄새나는 것이나 술은 자제해 주세요. 그리고 에어컨이나 선풍기는 마음껏 틀어도 돼요. 다만 저기 방충망이나 출입문을 잘 열고 닫아 주세요. 다른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 쓰레기가 생기면 그저 여기 지정된 곳 위에 놓아주세요. 주인들이 알아서 치워드릴게요. 또, 이제 방 구경시켜드릴게요. 저를 따라와 주세요."
졸졸 따라간 별채에는, 세 개 정도의 방이 있었다. 방 하나는 내가 묵을 '광합성'방, 다른 하나는 2인에서 3인이 사용하는 방, 나머지 하나는 주인 부부가 사용하는 공간. 밤이 되어 소등한 상태였기 때문에 은은한 조명등만이 반짝이는 별채의 복도는, 참으로 아담하고 정갈했다. 곳곳에 비치된 책과 관련된 소품, 책장, 주제별로 꽂힌 책이 밤늦은 여행객을 맞이해주었다. 아, 여기도 글자가 사람을 환영하는 공간이구나- 5시간 반동안 갇혀있어 찌뿌둥했던 몸이 일순간 상쾌해졌다. 사장님께서는 방의 에어컨, 화장실 위치 등을 간단히 설명해주시고는 퇴장하셨다. 그제서야 나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고 방을 제대로 구경했다.
4평 남짓한 작은 방인데, 왜 이렇게 평안해 보일까.
답은 군데군데 다소곳이 앉아있는 문장들 덕분일 것이다. 방문을 열 때에는 까만 바탕에 하얀 글씨로 써진 엽서가 붙여져 있었고, 의자 위에는 특별히 제작한 듯 의자 사이즈에 꼭 맞는 작은 종이 입간판이 놓여져 있었다. 침대 맡에는 남해의 풍경을 담은 여러 사진 엽서들과 함께 문구가 붙여져 있었다. 심지어 물을 떠다놓은 텀블러에도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문장으로 시작해서 문장으로 잠드는 방이라니,
이보다 더한 환대가 없다고 생각한다.
독서가에게 이곳은, 말 그대로 글자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공간이었다. 문구들은 다음과 같다.
방문 앞: 인간의 언어가 모두 타버린 다음에도 출렁이는 바다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의자 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머리 맡: 마음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에 붙여도 온통 세계가 되는 이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텀블러: 언제나 내 꿈을 짓밟아오기만 한 인생아. 마지막으로 한판만 재미있게 잘 풀려줄래?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말과 글이 사라져도 출렁이는 사랑을 열고 들어서면,
삶이 특별하지 않음을 알면서 자연을 다시금 쳐다보게 되는 곳에 앉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꿈 하나를 이루기 위해 물을 마시며 다짐했다가,
자기 전에 떠오를 그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생각해보고
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마음이란 단어에 경탄하며 까무룩 다음날을 기약하는 방.
이토록 나에게 완벽한 방이 있었던가, 기대와 계획 없이 유명세만 믿고
'한 번쯤 유명한 곳에 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평소에 자는 곳이랑 너무 비슷해서 사실 좀 돈 주고 가기 그렇다. 버스도 오랜 시간 타야 하고, 가서도 딱히 뭘 할지는 모르겠다. 규칙도 세세하게 많다고 들었는데, 그만한 가치를 잘 모르겠다.-'
며 가는 길에도 구구절절 스스로에게 불만을 쏟아냈던 어리석은 여행자는 몽도의 '광합성'에 마음마저 따사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득한 글자의 마음을 헤아리다가, 피곤한지 일찍 잠이 들었다.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살며시 내 귀에 닿을 무렵, 눈이 떠졌다. 시간을 보니 오전 8시. 오전 9시 누룽지 조식 시간을 신청한 터라, 부지런히 일어나 화장실로 향해 샤워를 했다.
조심스레 본채인 거실로 진출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나른하고 몽롱했던 나를 시원하게 반겼다. 빗소리를 타고 밝은 시각에 다시 마주한 본채 거실겸 작업실은, 내가 꿈에 그리던 집이었다. 야트막한 높이의 한옥에 끝까지 가득찬 책, 넘실거리는 목재 책장 냄새, 중간에 길게 뻗어있는, 나무를 그대로 눕힌 것만 같은 책상과 위에 달린 책 읽기에 최적화된 조명까지. 황급히 핸드폰을 들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언젠가 내가 집을 짓게 된다면, 거실은 꼭 이렇게 만들어야겠다- 다짐했다. 그 때였다. 40대-50대인지 가늠을 할 수 없는 어른 남자분이 주방에서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오신 분 맞죠? 어제 늦게 도착하셨다던."
큰 눈망울에 강렬한 눈빛을 지닌 분이, 남사장님이신가보다. 맞다고 대답하니, 아침을 준비해드리겠다며 금방 주방으로 다시 건너가셨다. 그리고는 쟁반에 담긴 음식들을 들고 나오셨다.
"맛있게 드시고, 음료는 커피나 차 드릴 수 있어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아메리카노? 아니면 메밀차?"
"엇, 저는 아메리카노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께서는 커피를 갈고, 나는 아침 식사로 나온 누룽지를 쳐다보았다. 아, 이것마저 내스타일이야. 나는 몽도와 사랑에 빠질 것이다.
회색 쟁반 안에는 네 그릇이 담겨있었다. 작은 세 그릇 안에는 각각 두부 조림, 매실장아찌, 유자단무지가 들어있었다. 하나같이 정성이 들어간 반찬들이었다. 그리고 미역국 안에 들어가있는 누룽지까지, 아침을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나였지만 술술 넘어가는 맛있는 식사였다. 찰칵- 사진을 찍고 헐레벌떡 밥을 먹었다. 이렇게 아침에 밥을 적극적으로 먹는 모습에 스스로도 어색했다. 그런 나를 보며 사장님께서 물었다.
"11시부터 4시까지는, 어디 갈 예정이에요? 혹시 정해놓은 일정이 있나?"
몽도는 연박 손님이라도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규칙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택시기사님께서 추천해주신 곳들을 죽 읊었다. 그리고는 여기서 택시를 탈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장님께서는 흐음, 하고 혼자 고민하시더니 벽 앞에 붙은 버스 시간표를 보며 말씀을 이어나갔다.
"그것도 좋긴 한데, 오늘은 비가 오니까. 독일마을이나 스카이워크는 비가 안 오면 내일 가는 게 어때요? 오늘은 주변에 실내로 돌아다닐 곳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버스가 보자, 11시 15분 정도 되면 오는 게 있어요. 거기에 지족마을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돼요. 지족마을이라는 데가, 간단한 소품샵도 많고 카페도 예쁜 것 있고요. 거기 새롭게 생긴 김밥집도 있고 해서 혼자 돌아다니기 좋을 거예요. 아, 책방도 몇 개 있고요."
"어, 잘됐네요. 저 책방 투어하고 다니거든요. 그래서 이 북스테이도 알게 된 거고요. 그럼 추천해주신 거기 가볼게요! 그, 마을 이름 다시 한 번만 말씀해주실래요? 인터넷에 쳐도 잘 안 나와서…"
사장님이 몇 번 [지-족-마-을]이라고 말씀해 주신 후에야 네이버 검색창에 제대로 칠 수 있었다. 버스정류장은 어디이며, 건너지 말라는 신신당부까지 해주셨고 마지막 말씀은 아주 결연하게 덧붙이셨다.
"그리고, 여기 버스는 서울이랑 달라서 탈 때 손을 세차게 흔들어야 해요. 안 그러면 그냥 지나가 버려. 그리고 11시 15분이라고 하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금 더 일찍 나가 있어요. 한 11시쯤부터 기다리면 될 거예요. 기다리다가 오는 버스 아무거나 붙잡고 지족마을 가냐고 물어보면 분명히 갈 거예요."
말씀을 끝내신 사장님께서 다 먹은 내 그릇을 치우고, 위에 산딸기 같은 상큼한 무언가와 복숭아가 얹어진 요거트와 커피를 내오셨다. 후식 감동 서비스에 버스 안내까지- 규칙이 많다기에 딱딱하고 무서운 사람들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의 배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예의를 편안히 요구할 수 있는 단단하고 강한 분들이셨다.
무작정 자신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착하다는 걸 들을 바에는 누군가의 오해를 사더라도, 서로 편안해질 타협점을 예절과 예의로 그저 글로 몇 자 적어놓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착한 사람들이라 부른다.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따스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베푸는 강인한 사람들.
선한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나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다치게 해 가며 남들의 요구사항을 눈치껏 맞춰왔다. 그렇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사람들은 내게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화를 낸 적도 없었다. 나의 몸을 챙긴 뒤에, 나의 마음을 건강히 챙긴 뒤에야 진정한 착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많이 배우는 요즈음이다.
정갈한 마음새로 나에게도 예의를 잘 지키는 것,
다른 사람에게도 나를 소중히 대해달라 요구하는 것,
그대신 나도 당신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약속하는 것,
이것들이 내가 그동안 부족했던 덕목이며 몽도에서 알게 된 새로운 선함의 정의였다.
가볍게 가방을 비우고,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 11시에 사장님께서 잘 다녀오시라며 다시 한 번 길을 건너지 말고 버스를 탈 때에는 손을 흔들라고 당부해주셨다. 웃으며 잘 흔들어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