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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남해는 버스 기사님도 사랑 철학자라

(3) 남해 몽도 - 지족마을 가기 전, 버스 기사님과 사랑 이야기하기

by 라화랑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은 온통 논밭이었다. 사람들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초록의 공간. 저 길 너머에는 신선들이 살 것만 같은 큰 산에 안개가 널찍히 걷지 않은 커튼마냥 걸려있었다. 저런 산이라면, 어떤 사람이 긴 하얀 머리에 요술봉을 휘두르는 할아버지를 봤다고 해도 믿음직할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25분간 멍하니 서 있으며 지나다니는 차들을 구경했다. 쌩쌩 달리는 승용차들 사이에, 내가 탈 버스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버스라고 생긴 게 이 도로에 입장하기나 할까.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라는 건 올 생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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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휘적휘적 팔을 내두르며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막춤을 추고 있을 무렵, 관광버스같이 생긴 큰 차 한대가 저 멀리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결연히 손을 흔들며 팔짝팔짝 뛰었고, 버스는 곧 내 앞에 천천히 멈췄다. 냅다 물었다.


"이거, 지족마을 가요?"


기사님께서는, 웃으며 대답하셨다.


"아이 그럼! 버스가 왔다고 춤을 추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


나를 백미러로 쳐다보며 기사님께서 유쾌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버스를 드디어 탔다는 안도감과 행복감에 젖어 기쁘게 대답했다.


"하하, 여기 버스가 올 때에는 손을 세차게 흔들라고 하셔서요!"


"아 그래애- 여기에 뭐가 있어요?"


나는 몽도와, 북스테이, 그리고 책방을 찾아다니고 있으며 취미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랬더니 기사님께서 반색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와이프도, 글을 써요. 나는 그래서 글 쓰는 사람들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존경해요. 우리 와이프를 보면, 나랑 같이 가다가도 가만히 꽃을 보고서는 집에 얼른 들어가. 그리고서는 빨리 시를 써야 한다면서 글을 쓰는 거야. 그래서 우리 와이프가 지금은 잘 안 쓰지만 안 바쁠 때에는 저기, 그 남해 신문에도 시를 내서 당선되고 그래서 인터뷰도 하고 지역 잡지에도 나가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뭐야, 그런 사람들끼리 책을 만들기도 했는데 우리 와이프도 거기에 시를 몇 개 지어서 내서 책이 있어요."


"어머, 정말요? 그 책 이름 뭔지 제가 찾아보고 싶어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아니야 아니야, 내가 그 책을 직접 주고 싶은데 없어서 아쉽네. 아무튼, 우리 와이프는 글을 쓰는데 난 일자무식이라서 그게 너무 멋져. 그리고 존경스러워. 나같이 단순한 사람들은 같은 걸 보고도 뭘 쓰겠다는 생각을 못 하거든. 근데 와이프는 그런 거 하나를 보고도 생각을 해나가는 거잖아요. 나는 그래서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해요."


아, 사랑꾼이다. 내가 찾는 남편감 후보가 여기 계셨다. 한 30년만 젊으셨어도, 제가 참 좋아했을 텐데요, 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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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취미로 글을 쓴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몇 종류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1.응원형: 퇴근하고도 글을 쓰세요? 대단해요! 어떤 글을 쓰세요? 정말 멋져요!
2.현실충고형: 그 글 가지고 뭐 하려고? 그냥 혼자 놀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니? 어디에 내봐- 요새 그런 걸로 돈도 벌고 그러더라.
3.(최악의)비난형: 그게 네 인생에 무슨 소용이 있어? 그냥 편하게 노는 것도 바쁜데, 그런 짓을 뭐하러 하냐?
4.자기반성형: 나는 퇴근하면 아무 것도 안 하는데, 너는 뭐라도 하는구나. 그래, 자기 취미를 한다는 건 대단한 거야. 나는 취미가 하나도 없는데 어쩌지. 너처럼 뭐라도 해야겠다.

1,4,2,3 순으로 좋아하며 그 중 3번은 상종하기도 싫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반응은 당연히 1번이다. 나도 남의 취미를 깎아내릴 생각이 없으니, 대신 내 주변의 누군가도 내 취미를 평가절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라고-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시키지 말자 - 내가 생각하기에 싫다고 생각하면 남에게도 그 말을 안 하는 게 그렇게 세상 사람들은 어려운가 보다. 특히 오지랖이 넓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즐겁게 놀아도 아까운 시간에 왜 방에 처박혀서 필요도 없는 글을 쓰고 있냐고, 진심으로 네 삶이 안타깝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는 사람들에게 고한다.

너 나 잘 해.


버스 기사님처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걸 멋지다고 할 수 있는 수용적인 태도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성숙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사님과의 대화가 무척이나 즐거웠다. 자신의 아내를 끊임없이 자랑하며 자신은 그에 걸맞는 멋진 남자가 되기에 너무 단순하다는 웃음 속에, 자신의 가족을 향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귀여운 분이셔- 대화를 하다 보니 지족마을까지 금세 도착했다. 나는 기사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며 하차를 하려고 카드를 댔다. 그때였다. 기사님이 지금껏 듣지 못한 큰소리로

"잠깐! 안돼!"라고 외치더니 내 손을 막았다.


"여기는 시골이기 때문에, 하차를 한다고 카드를 한 번 더 대면은 요금이 한 번 더 나가요. 그러니까 하차할 때에도 앞으로는 버스를 타거든 그냥 내려요. 알았죠?"


아, 마지막까지 다정하고 친절한 분이다. 나는 남해에 와서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를 태웠던 버스가 떠나고, 비가 내릴랑 말랑한 하늘 아래 나는 인터넷에도 잘 나오지 않는 '지족마을'이라는 곳에 왔다. 자, 어디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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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걸으려고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금세 없어지는 건물들과 사람들에 무서움을 느꼈다. 어, 이건 아닌데- 난 이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인데, 이렇게 고요하고 적막한 곳은 싫어. 그래서 일단 밥을 먹기로 했다. 밥을 먹는 곳에는 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여러 음식점이 좌라락 내 앞에 펼쳐졌지만,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은 없었다. 왜냐하면 흘낏 쳐다본 메뉴판 맨 밑의 선명한 몇 글자 때문이었다.

'모든 메뉴 2인 이상 주문 가능'

망했다. 여기에서 유명한 해산물 정식같은 건 전혀 못 먹겠구나- 혼자 돌아다니면 특히 한정식 집에서는 나를 마뜩찮게 생각하며 선심 쓰듯 음식을 내 준다. 혹은 내가 들어가자마자

"아, 1인은 안 받아요~" 하며 내쫓기도 한다. 오랜만에 이런 기분 느껴본다. 그동안 내가 다닌 북스테이에서 적어도 1인이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쫓겨난 적은 없었는데. 밥 먹는 건 포기하고 카페에서 빵이나 먹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였다. 초록 간판 위에 어린 왕자가 발을 빼꼼 내밀고 앉아 있었다. 하늘을 지붕 삼아 달랑달랑 발을 흔들며 그네를 타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직감했다. 여긴 백 퍼센트 책방이다. '밝은 마음'이라고 써져 있는 노란 팻말도 내게 산뜻하게 손짓했다.

이리와, 여긴 너의 공간이야.

바깥 유리창에는 포스터가 몇 개 붙어있었다.

'이동진 글씨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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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집에서 상처받은 마음, 글씨로 한 번 치유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세차게 열었….닫혔다.

'삐이이이이이이'


기계 소리가 불청객을 내쫓듯 소리쳤다. 나는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줄 몰라 문에 대고 대화를 시도했다. 내가 그렇다. 갑자기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하면 혼잣말로라도 사과를 하고 만다.


"어, 야, 미안해. 그게 그러려던 게 아니라, 엇, 근데 여기 오픈이라고 써 있어서 연 건데. 너가 이렇게 시끄럽게 하면 내가 부끄러워서 어쩌면 좋니?"


대답 없는 전자 문고리에 의미 없는 사과를 남발하고 있는 나와 안에 있던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무안한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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