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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지족마을 글자전시회- 예술가와 대담

(4) 남해 몽도, 지족마을 탐방 중 만난 글자 예술가와 인생 논하기

by 라화랑

"여기, 책방 맞죠? 저, 혹시 지금 문 연 것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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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 죄송한데 제가 지금 먼저 온 손님이 있어서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 보고 계신 건 제가 쓴 시집입니다.

맨 앞에 펼쳐진 시집을 무심결에 왼 손으로 촤라락 넘기고 있던 차였다. 나는 엇, 앗, 옙 하고 대답했고 정중한 태도로 내게 먼저 물어본 남자분께서 원래 있던 여자 손님과 이야기를 더 나누러 카운터로 이동하셨다

.

처음 보는 아우라였다. 어딘가 어색한 서울 말투, 목 늘어난 검은 티셔츠에 검은 츄리닝 긴바지, 검은 고무신, 더울 것만 같은 검은 비니를 머리에 쓴 남자는 얼핏 보기에도 60대 중반에서 70대는 되어 보였다. 턱에서부터 구렛나루까지 죽 이어진 수염은 긴 듯 짧은 듯 제 멋대로 뻗쳤지만 그조차 예술가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패션 아이템 같이 잘 어울렸다. 분명하고 낮은 어조로 끝 음을 또렷하게 맺는 그의 말투에서는 단호하지만 예의 바르겠다는 어떤 사람의 신념이 느껴졌다. 말투만으로도 사람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고 택시 기사님을 설명하며 한 번 말했는데,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삶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든 누군가는
안녕하세요- 한 마디로도 그 사람이 느껴지곤 한다.

책장을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그림책이 많고, 문학책이 별로 없네- 에세이는 더 없고. 이 책방은 주인 분위기와 다르게 아기자기한 큐레이션이군- 생각하던 찰나에 먼저 왔던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안 쪽으로 들어가 보세요. 거기에 작품이 많아요."

-아, 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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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앞서 봤던 글씨 전시회라는 것인가 보다. 화장실 건너편에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작은 방이 하나 보였다. 문은 없었기에, 슬며시 들어가 쳐다보았다. 온갖 한자와 한글이 먹으로 써져 있었다. 제멋대로인 삐뚤빼뚤한 한자부터, 정갈하게 세로로 쓰여진 한글까지 종류는 다양했고 나는 뭘 느꼈냐. 나는 졸림을 느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로다- 내가 원체 외우는 걸 싫어하는 터라 한자도 6급에서 멈췄단 말이지.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글자를 내가 어떻게 예술적이라며 감탄할 수 있을까- 까막눈 화랑이는 좋은 걸 눈 앞에 보고도 예술을 모르는 촌뜨기로 자랐답니다.

그 때였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남자분께서 하얀 방에 입장하셨다. 나는 눈을 맞췄다.


"어, 저기, 엄청 멋져요! 직접 혹시 만드신 거예요? 책방 운영 하시면서 이것까지 하시다니, 대단하세요-"


대화의 물꼬를 트는 데는 칭찬과 격려만한 것이 없다. 남녀노소 들으면 기분 좋을 마법의 장단을 나는 넣었고, 뜻밖의 장단 추임새를 들었다.


[어, 지금부터 제가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이 책방은 원래 제가 운영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알고 계시던 폰트 회사 대표님께서 운영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홍대에 작업실이 있는,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부족하고 자기 고집이 세서 아직까지 대단하지 않고 그다지 좋지도 않은 것들을 제 멋대로 만들고 예술이랍시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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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고 분명한 말투, 끝이 단정하고 무언가 테이프를 듣는 듯 묘하게 단어와 단어가 엉키며 이어지지만 그게 또 또렷하게 들려오는 유별남.
낮고 단단한 어조.
자신을 거침없이 깎아내리지만 오히려 거기서 느껴지는 명료한 자존감.


나는 직감했다. 이 분은, 어마어마한 예술가다. 자신이 저만큼 특별하려면 얼마나 속을 갉아먹고 빛나려고 온갖 시도를 자신의 작품에 해보았을까. 스스로 수없이 던져져서 발견한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분명히 가진 사람에게 느껴지는 또렷한 개성을 나는, 온 몸으로 받아냈다. 어마어마한 기다.

사람을 찬찬히 분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기운으로 압도하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한 터라 당황스러웠다.

대부분 사람들이 뿜는 기라는 것은 나이대에 따라 어느정도 비슷하게 결이 맞춰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분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호랑이같았다. 맞다, 이건 어느 산기슭에서 내려온 호랑이의 기운이었다. 난 몇 살인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겨우 "아, 정말요? 대단하세요!" 라며 말꼬리를 잡고 박수를 짝짝 쳤다. 정신차리자. 나는 분명 이분에게서 끌어낼 대단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라는 직감이 퍼뜩 들어 눈을 번쩍 떴다.


[아, 어떻게 그 사장님께서 제 작업실을 찾아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어 물어 찾아왔겠지요. 변변찮고 이렇게 유명하지도 않은 무명 미술가를 어떻게 알았는가 했더니, 제가 어딘가 전시회의 표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그걸 보고 글씨체가 마음에 들어 찾아 오셨다고 하시더군요. 감사한 마음에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습니다. 앞에 보시는 한자 작품은 그분의 호를 제가 지어준 것입니다. '석주'라고 이름 붙여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설명한 그는 잠시 한 호흡을 쉬었다. 그리고는 어딘가 먼 시선으로 내 등 뒤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작품, 작품 너머의 사람을 보며 이야기하는 듯 했다. 나는 말하는 것 조차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가는 그 분의 설명을 더욱 혼이 빠져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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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는 어떤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그 분께서는 여행을 가면 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지 않고 사람들과 계속 만나고 다닙니다. 그래서 제가 돌은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지만, 배를 만들면서 가라앉지 말고 떠다니며 끊임없이 여행하라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돌 석자에 배 주 자입니다. 또, 이 글자들 외에 한글 글자들은 어느날 제 작업실로 저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사람들 때문에 시작된 작품들입니다. 제가 몇 가지 그림책들의 표지 작업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글씨체가 마음에 들었는지 어찌 알고 변변찮은 제게까지 와서 저만의 글자체를 하나 작업을 해 달라- 요청을 하더군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찾아와서는 제게 네 글자만 써 주면 '이동진체'로 만들어 인터넷에 보급하겠다 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4글자만으로는 내 글씨체를 만들 수 없다, 나는 100자는 만들어 보겠다.]


삐뚤빼뚤 제멋대로 하얗고 곧게 뻗은 수염들이 말을 따라 춤추기 시작했다. 점차 수염들은 빠른 몸짓으로 입 주변을 반짝이게 했고, 그 덕분에 그 분의 말이 더욱 힘을 얻는 듯 했다.

[저는 그래서 판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살폈더니 한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글은 한자와 달리 가로로 써서, 위와 아래 간격이 자꾸 맞춰졌습니다. 저는 그래서 깨달았습니다. 아, 세로로 쓰자. 세로로 제 멋대로 쓰자. 저는 고집불통에 미천한 사람이라 돈과 더러운 것들만 오래 남는 예술계를 경멸합니다. 그래서 제 마음대로 쓰지 못하면 제 것이라 할 수가 없으니, 저는 이렇게 혼탁한 세상에서 가로로 생각하다 안 되면 세로로 생각하자고 깨닫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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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한 마디가 내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갔다.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면 다르게 보면 되는 거야.

그건 내가 세상에게 할 수 있는 나만의 복수이자 나를 지키는 최소의 방어막이다. 아무도 나에게 가로 세로를 맞춰서 쓰라고 하지 않았다. 내 삶도 강요당한 적 없다. 하지만 늘 불만만 많았지.


'쟤는 태어나서부터 똑똑한 집안에서 과외 받고, 좋겠네. 유전자가 잘났나보지.'


'쟤는 집에 돈이 많아서 멍청한데도 유학 가고 지금은 혼자 엄청 비싼 아파트에 사네. 난 절대 그럴 수 없는데, 배 아파.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쟤는 원래 활발한 애라 그래. 나는 원래 안 그런데. 근데 부럽다.'


난 이미 세상에 졌다고 생각한 멍청이었다. 진짜 세상에서 진 사람은, '스스로 졌다고 생각하고 나를 세상이 보는 깜냥에 집어넣고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 나 같은 바보였다.

세로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내 삶은 나만이 그릴 수 있는 한 장의 종이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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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옆에 있는 작품을 보시면 뒤에 글씨가 비칠 겁니다. 갑자기 제가 생각이 나서 글씨를 썼더니 뒤에 이미 제가 작업했던 글씨가 써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그 글씨를 똑같이 쓰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벌써 제가 한 번 썼던 그 에너지와 글자에게 쏟았던 힘은 없어지고, 그저 글씨이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알았습니다. 그 순간의 기분과 힘은 중요하고, 그걸 느끼는 건 한 순간이구나. 그러니 그 순간을 아주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말이지요.]


아니다, 나는 늦지 않았다.

그 순간의 에너지는 내가 발산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뿜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망쳤다고 생각하는 내 삶의 종이 뒷장에 써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렇게 예쁘게 걸려 있으니. 뒤의 먹물이 은은히 비치는 이 글자도 나는 참 멋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는 제 한문 글씨도 좋습니다. 이걸 쓰면 제 마음이 깨끗해지고, 글씨 쓰는 것을 통해 저를 계속 배웁니다. 또 저도 계속 세상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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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과 스스로에 대한 설명을 마친 남자분께서 나를 가만히 보고 웃었다. 나는 느꼈다.

저 웃음은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두 배는 더 많은 분께서 늘 스스로와 세상을 배운다는 말에 부끄러워졌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제가 선생님 작품과 설명을 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좀 더 유심히 이제 설명을 들었으니 작품을 잘 살펴보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하며 하얀 방에서 책이 있는 주 공간으로 건너간 분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계속 생각에 빠졌다. 이 이미지, 강렬한 이미지를 나는 절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텐데- 탐이 난다. 어떻게든 당신과의 만남이 내게 어떤 힘을 주었는지 1퍼센트라도 내게 정리하고 싶다.


단정하고 정중한 이 예술가께서는 내가 어떤 반응을 하면 가만히 내게 오른쪽 귀를 갖다댔다. 아마 잘 안 들리시는 모양이었다. 우리 외할머니도 치매에 걸리고 나서는 한 쪽 귀가 아예 들리지 않아 대화를 할 때 눈을 맞출 수 없었다. 대신 귀를 보며 이야기했다. 소리치며 귀에게 말했다. 나는 가게를 나가기 직전, 그 분의 귀를 가만히 보고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사실,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정확히는 작가는 아니고, 혼자서 일기나 여행기같은 것들을 인터넷에 올리려고 곧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예요. 괜찮다면, 제가 여기서 선생님을 뵈었던 걸 글로 써도 될까요?"


남자분께서는 아, 그러셨구나- 하며 겸손한 태도로 대답하셨다.


[그렇군요. 예, 그래주시면 저는 감사합니다. 제가 드리는 시간은 여기까지고 지금부터는 선생님의 글로 시간을 가지시면 되겠군요. 저를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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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며 책방에서 나왔다.

큰일났다. 나는 이 멋진 경험을 이렇게까지밖에 쓰지 못하는 부족한 내 글솜씨가 미웠다.

내가 겪은 이 환상적인 시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다보니 배가 고팠다. 마침 앞에 분식집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얼핏 몽도 사장님께 '거기 분식집이 새로 생겼는데, 맛있어요.' 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고. 나는 냉큼 분식집에 들어가 멸치 김밥과 비빔 국수를 시켰다. 평소에 먹는 양보다 2배는 많지만,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허기진 마음을 채운 것은 음식이었고, 나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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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서울에 가는 버스에서 문득 그 분 이름이나 쳐볼까 하고 네이버에 검색을 해보았다.

나는, 멍청이야.

나오자마자 대단한 분인 걸 직감했으면 그 때 쳐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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