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불법점유, 불편한 사람을 내쫓지 못해 아프기만 - (1) 목포
처음으로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때, 목포는 그 때부터 점찍어둔 곳이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사진 하나를 찾아냈다. 갈색 좌식 소파 뒤에 가득한 책들. 넓은 책상만 있는 방. 침대와 분리된 작업실. 사진을 보자마자 달력을 쿡 눌러 갈 수 있는 날짜를 예약했다. 완료 메세지가 뜨고 지도를 살펴보니 목포였다.
어라, 목포의 항구할 때 그 목포? 바다 말고는 얼마나 먼 지도, 뭐가 유명한 지도 모르는데.
기차표를 예약 날짜 일주일 전에 끊고 나서야 목포의 여행지를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알았다. 여기는 바다 말고는 1인 젊은 여행자들에게 유명할 수 없는 곳이겠구나. 검색되는 것이라고는 유일한 자랑거리인 케이블카, 유튜버가 맛있는 집이라며 극찬한 맛집들 밖에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난 즐거운 마음으로 전라남도 목포를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니까. 책, 서점, 먼 곳, 바다. 그것만 보면 되는 것이다. 다른 걸 볼 마음이 없다. 평소와 달리 여행 가방을 지고 반차를 냈다. 일찍 퇴근하자마자 버스에 올라탔다.
15분이면 되는구나.
어이 없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내가 그렇게 아파하고 힘들어했던 일상과 그런 나를 얼마간 도망치게 해 줄 기차역이 이렇게나 짧은 거리에 있었다니. 언제든지 나를 아프지 않은 곳으로 데려다 줄 기차를 품은 역의 문을 힘차게 열었다. 왜 이제야 왔냐며 힐난하는 듯 했다. 그러게- 돈과 시간과 문을 열 힘만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여기에 올 수 있다. 아이스 커피를 쪽쪽 빨며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자연스레 책을 꺼냈다.
1Q84.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모두 읽어 오히려 난 그런 유명하고 긴 책은 읽지 않을 테다- 어깃장을 놓았던 책이다. 반항심에 나에게 버림받은 1Q84와 무라카미 하루키를 누군가가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에게 의미도 없는 카페 사장님이었다.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서가 아닌, 반발심이 또 일을 만들었다.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제일 유명한 책을, 내가 모른다는게 말이 돼?
명색이 책 좋아한다고 떠벌리는 사람인데.
그렇게 목포의 목표는 1Q84 3권을 모두 읽어내기가 되었다. 깜찍한 사춘기 반항아가 되었다. 근데, 누가 나한테 뭐라고 했었나? 혼자 킥킥거리며 책을 펼쳤다. 옆자리에는 큰 짐을 여러 개 내려놓은 아주머니가 앉았다. 핸드폰으로 연신 드라마나 게임 화면을 연달아 보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아들로 보이는 7살 남짓의 남자 아이가 반대편 통로에 할머니와 함께 앉아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엄마가 아들에게 관심이 없는 거지. 아들은 심심한 듯 ‘으어어어-’ ‘어으아아악’ 크지 않은 소리를 내며 의자를 쾅쾅거렸다. 무료함을 달래는 자신만의 놀이이겠거니, 그 아이가 이해가면서도 이를 말리지 않고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내 옆자리 아주머니가 미웠다. 다 이해하지만, 네 사정도 있겠지만, 기차 안에서는 조용했으면 좋겠는데. 그걸 알려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엄마라는 존재니까.
자신의 일에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 싫다. 아이라고 무조건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라고요. 기분 좋을 목포 여행의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진 기분에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하지만 이어폰을 꽂은 옆 자리 아주머니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아, 이 기분 나쁜 오후를 어쩌면 좋아.
집중하자, 집중해. 눈 앞의 책에 집중해.
1Q84처럼 여기는 2023년도가 아니라 2Q23년도인 거야. 지금 내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내 세계에 있는 사람이 아니야. 잘못된 선로로 기차를 탄 내가 내릴 수 없는 2Q23 세계인 거야. 말도 안 되는 세계를 나는 살아내고 있는 거야.
아오마메가 되어 불편한 마음이 빵빵해질 때까지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마음이 아프기 전의 나라면 웃으며 넘겼을 모든 것들에 예민해진 나를 가만히 놔둔다. 그런 나를 그만 싫어하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냥 받아들여 보는 거다.
역시, 마지막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무거운 짐을 들기 힘들겠지, 배려하기에 내 방광은 구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1시간 전부터 화장실에 계속 가고 싶었다. 어느새 잠이 든 아줌마를 깨울까 말까 고민을 하던 찰나, 눈이 마주쳐 잘됐다 싶었다.
-저기, 저 화장실 가고 싶은데…
여기서 퀴즈. 대부분의 통로석에 앉은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1)알겠다고 하고 얼른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난다.
2)소리 없이 자신의 짐을 치우려고 노력한다.
3)귀찮은 기색이 있지만 자기 무릎이라도 지나갈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준다.
4)싫다고 거절한다.
1,2,3의 차이는 있겠지만 4를 선택할 양심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이 아줌마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저 다음 역에서 내리는데, 많이 급하세요?]
[지금 8분 연착이라고 뜨니까 다음 역까지 8분 남았어요. 급해요?]
이 두 마디를 합치면 4를 예쁘게 포장한 것 아닌가. 어처구니가 저 담장 밖으로 넘어가 홈런을 기록했다. 빠밤- 머릿속에는 신나는 댄스곡이 울려 퍼졌다. 어이 선수, 홈런이에요 홈런! 어이가 없어서 상식 펜스 밖을 빠져나갑니다! 이건, 누구에게도 맛볼 수 없는 훌륭한 한 방인데요! 라화랑 선수, 여기서 어떻게 하나요?
여기서 또 퀴즈. 대부분의 화가 난 사람들은 여기서 어떻게 대처할까.
1)많이 급해요. 그러니까 비켜주세요. 라며 점잖게 요구한다.
2)이 아줌마가 진짜 미쳤나! 화를 발칵 내며 비키라고 소리친다.
3)대응하기 싫다는 듯 째려본다.
4)괜찮다며 웃으며 대답한다.
다시 한 번 문장을 재활용한다. 1,2,3의 차이는 있겠지만 4를 선택할 말도 안 되게 소심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래요? 알았어요.
내뱉은 대답에 나도 놀랐다. 이렇게나 공격성이 제로인 사람이 존재한다니. 그게 나라니. 믿을 수가 없다.
내가 불편한데도 왜 표현하지 않은 거야?
멋대로 움직인 내 입에 충격받은 나는 10분이 지나서야 제 짐을 느릿느릿 챙긴 아주머니 뒤로 화장실에 뛰어갈 수 있었다.
심각한 상태군. 화장실 거울을 보며 속삭였다.
너, 아주 심각해. 정신 차릴 필요가 있어.
손을 씻으며 다짐했다.
목포에 가선, 그래서는 안 돼. 거긴 여기와 다른 곳이니까.
거울에 비친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