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불법점유당한 게 아니라, 내 길이 잘못된 거였구나 - (3) 목포
오늘은 또 어떤 친절에 보답해 볼까.
어제 추천해주셨던 여러 음식점 가운데, 어떤 음식을 먹을까 고민하며 인터넷으로 뒤졌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포켓몬을 잡으러 가는 용사처럼 2시간 전에 먼저 깨 커피를 들이부은 나는 음식점의 오픈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엄마]
또 다시 전화. 아직도, 여전히 진짜 받기 싫다-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어우 화랑이 일찍 일어났네에? 근데 다름이 아니구, 홍홍 그게 있잖아. 그 업무용 아이디랑 비밀번호 좀 줘 봐. 아니 내가아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글쎄 그 사람들이 자꾸 한 달만 해달라고, 해달라고 빌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한 달만 하기로 결정을 했잖아. 어우 그럼 어떻게 해. 나밖에 없다는데. 그래서 그런데, 요새 일은 엄마가 하던거랑 얼마나 달라? 너 작년에 그거 해 봤다며. 근데 너 지금 어디야? 엄마랑 원래 가기로 한 뮤지컬 너가 취소시켰잖아. 진짜 목포 갔어?]
엄마, 말 그만. 맛집 줄이 길어지고 있단 말예요-
라고 대답할 수 있는 효녀가 대한민국에 몇 이나 될까 싶다. 옆 자리에 앉은 아주머니한테도 필요한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엄마에게 더욱이 볼멘 소리를 할 수 없다.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엄마가 필요할 대답을 해 주고, 지금 어디인지 소상히 알렸다.
아빠의 어젯밤 만행 (마을 아저씨와 술을 먹고 뻗어버려서 꼴 뵈기가 싫다),
오빠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한 아쉬움 (청춘인데 집에만 틀어박혀서 게임하는 꼴이 싫다, 하지만 잔소리 할 수 없다)
을 모두 전달받은 뒤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1인이라고 당당히 외치고 중깐을 시켰다. 목포에만 있는 중국집 메뉴라던데, 벽에는 유튜버가 인정했다는 팻말이 메뉴 옆에 붙어있었다. 중깐이 뭘까. 중국집 깐풍기의 줄임말일까. 이름이 짬짜면같이 뭐가 섞여져 나올 것만 같다- 온갖 상상을 다 하기 무섭게 자리에 앉은지 5분만에 메뉴가 나왔는데…
-자아, 짬뽕이랑 탕수육 먼저 나왔습니다아.
입이 턱 벌어졌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주인집 아저씨가 만족한 듯,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이번에는 짬뽕이랑 탕수육이 먼저 나왔네. 이따 또 나옵니다아.
여기서 뭘 더 먹을 수 있다는 거지. 뭘 더 먹어야만 하는 걸까. 하는 찰나에 아저씨가 신나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난 큰일 났다.
-주문하신 중깐 다 나왔습니다아. 맛있게 드세요.
비장한 표정으로 음식들을 모두 쳐다보았다. 까만 소스가 뿌려진 면에 계란 후라이를 섞으며 주문을 외웠다. 그래, 내가 어제 안주도 거의 안 먹고 술만 마셨는데. 이 정도야 해장으로 껌이지! 지금 나는 일어난 지 세 시간이 되어서 배도 무척 고프다구! 할 수 있다. 아자!
15분 정도 뒤, 패배자는 털레털레 배를 두드리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중깐은 맛있었냐며 서점 사장님이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어우, 엄청 배부르게 먹었어요.
나도 네 맘 안다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오늘 코스를 지도 어플을 켜서 짜 보았다. 모두 독립 서점들이다. 사장님께서 모두 추천해주신 곳이었다. 한 군데 빼고는 모두 도보로 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미 중깐을 맞이하며 한 군데의 위치는 봐두었다. 자, 이제 출발이다.
예술 서적을 전문으로 파는 독립 서점이었다. 책방에 들어서자 중후한 목소리가 “어서오세요”라며 날 반겼다. 빵 모자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성이 날 보고 있었다. 계산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90년대 라디오 부스를 책임지던 DJ같았다.
남의 책장을 구경하는 것은 참 재미있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이 곳에 살포시 얹어놓았는가 추리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럼 나는 사장님의 성격을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바퀴 둘러보니 이 사장님은, 아마도
-예술과 관련된 일을 이전에 한 적이 있으며 문학보다는 사회 경제와 관련된 정보를 좋아하는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나이
일 것이다. 예술책의 수준이 초짜부터 심화까지 다양한데, 주로 초급자를 위한 책이 많았다. 예술을 좀 더 편하게 즐겼으면 좋겠는 전문가의 마음이 들어가있다. 내가 좋아했던 장르를 남도 좋아했으면 좋겠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독립서점을 그렇게 돌아다녔다.
남의 집 장롱을 당당하게 열어보는 도둑의 기분이 들었다. 내가 책을 구매하지 않고 빨리 나왔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내 가방 안에는 아직 다 못 읽은 1Q84가 있다고요!
잠시 독립서점 투어를 멈췄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독립서점을 탐방하는 와중에 옆에서 나를 유혹하는 돌산이 어딜 가나 보인다. 이건 진짜 안 되겠다.
이렇게 나를 꾀어내다니, 얼른 타 버리고 말겠어.
사람이 많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목포의 사람들이 여기서 바글거리고 있었구나. 안 그래도 돌아다니며 걸어다니는 사람이 나 이외에 없는 것이 기묘할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외진 곳을 돌아다녔느냐,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독립서점들이 있던 곳은 좀 옛날 거리이긴 하지만 상점가가 줄지어 서 있는 곳이었단 말이다. 큰 학교도 바로 옆에 있었고. 주말에 이렇게까지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고? 목포는 죽은 도시인가. 모두 더 큰 경기도나 서울로 이주해 버렸나. 곰곰이 생각하다 이상한 세계로 진짜 빠져버린 것은 아닌가, 고민하던 찰나였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들에 관심이 없구나. 내가 세상사의 경로를 많이 이탈했구나. 불현듯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뭐,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소음이 싫어 에어팟을 낄 필요도 없었으니 조용한 산책길이 된 것은 좋았다.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사람들 없이 혼자서만 다녀야 할까. 조금 암울해졌던 터였다.
대기번호표를 뽑고 어묵을 시켜먹었다.
외로워지지 않으려면, 내가 사람들 속을 찾아오면 되는구나.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5분간 기다린 어묵은 참 맛있었다.
반 쯤 먹었을 때, 내 순번이 다가와 허겁지겁 남은 음식을 모조리 입 안에 밀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