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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북스테이, 파주 헤이리 마을, 안티 사랑책

(1) 파주 모티프원, 데이트 명소 북스테이는 또 처음이라

by 라화랑

출발 당일, 메세지가 도착했다.

헤이리로 가기 위해 전 날 부리나케 싼 짐을 오도카니 쳐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괜히 신청했다.'


출근 가방을 벗어던지고 반차를 냈지만 바로 헤이리로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침대에 출근했던 복장 그대로 벌러덩 누워 몸의 힘을 쭉 뺐다. 아- 귀찮아. 다 힘든데, 그냥 다 힘들단 말이지.


아닌가, 괜히는 아닌가. 최근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우울증 약을 복용받기 시작하고, 다니던 직장에서 방 문도 못 열어 휴가를 신청했던 적이 있으며, 그래서 약간 회복되었다고 믿었지만, 또다시 어딜 떠나 책과 함께 이야기를 소통하기에는 부적절한 닫힌 태도를 가진 사람.


그래도 집은 싫다, 결론을 내렸다. 2박 3일간의 파주 헤이리 마을 안에서의 북스테이는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잠시 피난처가 되어줄 테지. 결심을 굳히고, 짐이 가득한 검은 가방을 둘러 멨다. 또다시, 도망이다. 세상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뚜벅이가 헤이리 마을까지 가는 게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 무척 쉽다. 다들 자신의 애인 차 옆에 타 있을 때는 몰랐겠지만 말이다. 사실 나도 그렇고. 찾아보니 합정역에서 빨간 버스를 한 번 타면 헤이리 마을의 다양한 입구에 금방 데려다준다. 나는 1번 출구에서 내렸다.

보자, BMW 몰던 그 남자애랑 헤어졌을 때가 3년 전이니까 나는 헤이리를 3년만에 다시 찾은 거다. 홀로 갇혀있기 위해 선택한 장소가 데이트 성지라니, 그것도 참 웃기군. 저녁이 지난 시간이라 주변 모든 상점들은 닫혀 있었다. 나는 마음 놓고 에어팟을 끈 뒤 조용한 헤이리 마을을 쳐다봤다. 불이 꺼진 관광지를 보는 마음이 괜히 편하다.

그래, 저 건물들도 이제 사람들 시선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인거야.
내가 빨리 지나가 줘야겠다.

사람들이 없어진 뒤의 거리에서 활보하는 고양이들이 느릿느릿 나를 경계 태세로 쳐다봤고, 나는

"어어, 미안해 금방 갈게- 금방!"

말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루 종일 사람들 눈초리 받느라 힘들었을 텐데, 나마저 쳐다보는 게 미안했다.

모티프원을 찾는 것은 쉬웠다. 거주자 지역이라는 갈색 표지판을 지나서자, 작은 팻말로 바닥에 잘 왔음을 알려주었으니까. 문자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노란 대문을 한 건물은 담쟁이덩굴이 몇 년에 걸쳐 자연스레 몸을 감싸 신비스러웠다. 저 노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괜히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두근두근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2박 연달아 신청하신 분 맞죠?"

문을 열자마자 밝은 목소리의 여자가 나를 반겼다. 회색 추리닝과 하얀 린넨 셔츠를 입은, 짧은 파마 머리의 귀여운 여성이었다. 깜짝 놀라 쳐다봤더니 헤헤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 2박 3일인데 짐을 이만큼만 가져 오셨어요? 다른 분들은 막 이만한 캐리어 들고 오시던데. 혼자 묵으시는 것 맞죠?"

[네, 맞아요.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 나 그래도 옷 3일치 다 챙겨왔는데…]

"미니멀리스트신가보다. 자, 그럼 블루방 거실 구경하고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여기가 거실이에요. 먼저 짐 내려놓으시겠어요?"


네에, 하며 계단 두어 개를 올라 본 거실의 모습은, 고민했던 침대에서의 한 시간이 원망스러울만큼 환상적이었다.

적어도 내겐 이 곳이 판타지 소설 속이다.

책이 가득한 사방의 책장과 온갖 나무결 냄새, 양반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아서도 읽을 수 있고, 나무를 통으로 쓴 것만 같은 책상에 팔을 걸치고 정자세로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다양한 의자들이 나를 설레게했다. 와, 진짜 좋겠다. 거기다 이런 집에서 매일 살고 싶다-는 감탄이 나온 데는 통창으로 비친 나뭇잎들과 숲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호사스러운 곳에서
2박 3일을 있어도 되나...?


여기가 나에게는 호텔 5성급보다 더 좋은 최상의 호캉스였다. 돈만 있으면 매일 오고 싶다- 생각했다. 잠시 앉아 통창에 비친 고양이 밥 먹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블루방이 준비가 다 되었다며 나를 불렀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곳은, 세상에 내가 죽기 전에 꼭 이렇게 집을 짓고 살아야지 하고 바랐던 그 방이었다.



ㄱ자로 뚫린 통창 아래 짙은 갈색 나무 책상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각이 진 의자도 마찬가지로 깊은 자연의 향을 품은 갈색이다. 그럼, 언제든지 편히 사용하시라는 말과 함께 여자분이 나가자마자 의자에 조심스레 앉아보았다. 엉덩이가 폭 쌓이고 등이 쭉 펴지는 이 느낌, 책과 글이 잘 어울릴 것만 같은 느낌, 합격이다. 아주 좋아. 가져온 옷더미들을 옷걸이에 걸고, 가장 중요한 책상 셋팅을 마쳤다. 분홍색 키보드, 태블릿, 그리고 분홍색 작은 수첩과 볼펜 몇 자루. 단정히 놓여져 있는 내 물건들에 기분이 좋았다.

입실한 시각이 밤 8시가 넘어, 다른 숙박객이 있나 조심스레 문을 열어 공용 거실 공간을 살펴보았다. 호스트인 여자분 외에 아무도 없길래 용기내서 책을 들고 나왔다. 여자분은 거실 왼쪽 모서리의 한 책상에서 노트북을 하고 계셨다. 나는 그 쪽에서 가장 먼, 입구쪽 방석에 앉았다. 내가 가져온 책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였다. 책에도 홍대병이 넘치는 내가 드디어 20대 청춘답게 사랑의 대가라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 이 나이 먹고 책 좋아한다는 사람이 알랭 드 보통을 모른다는 건 수치야.


이번 파주 모티프원 북스테이의 목적은 그리하여 '알랭 드 보통'에 대한 내 마음 알기가 되었다. 너, 진짜 많은 사람들이 떠받들 만큼 대단한 사람인지, 한 번 알아보자구. 하는 비뚤어진 예비 독자가 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집중이 안 됐다. 자리 탓인지, 아니면 처음에 비행기에서 갑자기 운명이라고 느끼는 남자의 시선이 얼토당토 않아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운명이라고 하면서 한 번 자고 그 다음에 어떻게 될 지를 몰라 어쩔 줄 모르는 서양 사람들의 문화 차이가 있어서인지. 확 눈에 띄는 무언가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눈이 가기 시작했다. 엇, 이거 막 읽으면 안 될것만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 방에서 분홍 노트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녹차를 끓였다. 따땃한 마음으로 진중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겠어.


그 때, 옆에서 노트북을 치고 있던 호스트분이 나를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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