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별과 장한이 사랑의 존재로 엮였다. 서로의 품에 안긴 각자는 함께 있는 법이 서툴렀다. 그래서 허구한 날 말도 안 되는 것들로 싸웠다. 프러포즈도 가관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웬 갓 피어난 꽃 한송이를 산삼보다 귀하다는 듯 들고 와서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들이대는 남자가 진짜 자신의 삶을 믿고 맡길 수 있는가, 덜렁 꽃 하나 들고 온 주제에 심지어 이게 바로 너라고 자꾸만 울먹이는 남자. 그런 남자와 자신이 평생 힘든 일을 같이 겪어낼 수 있는지 여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렇게 매 번 모든 것에 서투른 남자와 여자가 다음으로 벌인 짓은 나였다. 나. 나의 탄생. 그런고로 내 정체성은 열매라 하겠다. 몇 십년만에 피어난 한 송이의 꽃 혹은 누군가의 씨앗. 나는 행복 씨앗의 열매다.
마지막 문장에 점을 찍은 남자 고등학생이 두 손을 깍지 낀 채로 쭉 편다. 몇 시간동안 키보드를 치느라 고이 접혀있던 두 팔목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뻗어진다.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고개를 스트레칭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마치 노트북에 글을 오래 쓰는 것이 익숙하다는 모양새다.
[아들- 밥 먹어. 우리 작가님은 뭐 하나 빠지면 누굴 닮아 그렇게 열심이람?] {누구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문장한씨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녀석이, 어딜 아빠 이름을 함부로 불러!]
짐짓 큰 소리를 내지만 얼굴에 미처 숨기지 못한 웃음기를 지닌 중년의 사내가 쟁반을 탁 놓는다. 오늘은 특별히 닭볶음탕이라며 힘을 주어 메뉴를 설명하는 게, 수상하다. 이거, 혹시…
{아빠. 이거 엄마가 만들었…어요?} [ㅇ…어? 누가 만든 게 뭐가 중요하니. 네 앞에 놓여진 저녁이 참 맛있겠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지.] {아 아빠! 엄마가 만든 요리 나만 힘들어 솔직히?} [그, 저, 미안하다. 아빠가 미처 말릴 새가 없었어. 오늘 강아지 중성화 수술이 두 건이라, 정신이 없었거든. 헐레벌떡 씨앗들도 돌보아주다가 저녁 시간보다 한 한 시간 늦게 들어왔더니 짜잔 하고 벌써 네 엄마가 뿌듯하게 차려놓은 걸 어째. 그, 그래도 아빠가 너는 살려줬다. 네 엄마 너 불러서 맛이 어떤지 직접 봐야겠다는 거 우리 집 작가님의 시간을 존중해줘야 한다고- 덜어 왔다. 이만하면 아빠를, 용서해 주겠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남자 청소년의 이름은 문 류. 참 단순한 부모임이 짝이 없다. 각자의 성을 하나씩 똑 떼어놓고는 자신들의 행복을 모두 가져가달라는 뜻이 담겼다고 거창하게 포장하는 두 사람의 아들로 류가 태어난 게 벌써 18년 전이다.
문류는 장한의 똑똑한 두뇌와 글쓰기 능력, 별의 마케팅 및 대외적 업무처리능력을 모두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물론 장한의 운명또한 류에게 넘겨받았고. 그런 자신의 삶을- 류는 대범하게도 웹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 장한과 별.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에 류의 상상력이 더해진 로맨스 판타지 소설은 날개돋힌 듯 전 세계로 번역되어 판매되었다. 독자들의 평은 한결같았다.
[판타지 로맨스의 일상화. 내 눈 앞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는 판타지처럼 서술과 묘사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너무 섬세해서 간질간질 내가 같이 설렌다.]
내년 상반기에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질 예정. 그런 스타 작가의 탄생을 류별과 장한은 무척 환영했다.
부모의 몫과 별개로, 별은 자신의 일을 놓을 수 없는 커리어우먼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그만두었다. 별은 어느 날 이게 너라며 파들파들 손을 떨면서 꽃 한송이를 내미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장한의 집에 쳐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장한씨 신부가 되고 싶은 류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저는 장한씨의 꿈을 이뤄주고 싶습니다. 그러니 꽃집과 동물병원을 합해 동물 테라피 화원을 운영하시는 건 어떨까 건의합니다.
무릎을 견고히 꿇고 냅다 사업설명서를 줄줄 읊는 예비 며느리를 장한의 부모는 어떻게 생각했냐고?
-우리 연약하고 강인한 아이를 잘 부탁하네. 고맙네.
라며 눈물을 글썽였었지. 그리고는 또 다시 내밀어지는 화분과 꽃 하나.
그것은, 행복 관리자가 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특권- 자식의 행복 씨앗 관리의 결실, 즉 장한의 행복꽃이었다.
이 씨앗 역시 3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꿈틀거린 적조차 없었는데, 최근 몇 년간 갑자기 물을 주지 않아도 쑥쑥 자라고 있었다고. 그리하여 어느날 화사하게 만개한 장한의 꽃의 주인이 언제 이 문지방을 넘나드나- 그 날부터 미리 양복을 제대로 다림질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황하는 예비 며느리의 손을 꼭 잡은 두 시부모의 표정에는 감사가 가득하다. 그제서야 별은 장한이 언뜻 스치며 이야기했던 행복 씨앗이라던가, 이게 네 꽃이라던가, 이게 진짜 에세이라던가 하는 모든 말들이 약간 믿어지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자신의 꽃은 대체 누가 키우고 있을까 상상하던 37세가 된 남성의 부끄럽고 놀란 얼굴은 참, 귀엽고 아름다웠다. 별에게만큼은, 가장 멋지기도 했고.
-여보, 왜 아직까지 안 나와? 지금까지 안 나오는 거 보면 류 쉬어도 되는 시간인가 보네? 그럼 엄마 아빠랑 같이 저녁 거실에서 먹자- 나와- 여보, 당신이 데리고 나와-
주방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류별의 목소리. 직장에서 갈고 닦은 마케팅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그녀는 장한의 동물 테라피 병원의 모든 업무를 도맡았다. 각종 홍보와 회계, 사업의 방향성까지 장한의 실력 발휘 및 행복 발현까지 동시에 잡아버린 그녀의 최근 행복은- 요리다. 온갖 영상에 넘쳐나는 가족을 위한 건강 요리 중 꽂히는 게 생기면 그 날은 장한과 류가 꼼짝없이 당하는 날이다.
블루베리 삼계탕, 전복 노니 소스 구이, 낙지 연근 쉐이크 등 그녀의 역작은 날로 늘어만 가고…
그럴 때면 두 남자는
[야, 아빠 좀 인간적으로 살려주라. 딱 한 번만.] {아, 아빠. 일부러 나랑 말 오래 걸은거지? 밖에 나와달라고! 아, 그럼 억지로라도 더 먹어야 하잖아!} 서로 살려달라며 서로에게 싹싹 빈다. 오늘 닭볶음탕에는 무엇이 들어갔을까 서로 두려운 눈초리로 그릇을 내려다본다. 무언가 익숙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남자의 미적거림이 익숙한 류별이 눈치채지 못하게 류의 방문 앞에 기대어 서 있다.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을 바라본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자신 몫보다 1.5배 더 먹어주자, 그러면 배 고플 때 서로 몰래 치킨을 온실에서 시켜 먹자, 그건 서로 공조해주기로 하자, 계책이 방 안을 떠도는 동안 별은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 함께하는 삶은, 오늘도 즐거운 거야. 가끔 화가 나도 말이지.
그리고는 큼큼, 일부러 헛기침을 낸다. 망했다. 장한과 류의 당황이 뒷통수에서부터 느껴진다.
별은 입술을 꽉 깨물고 웃으며 대꾸한다.
-좋은 말로 할 때, 말로 할 때- 거실로 와라. 오늘 닭볶음탕에는 아무것도 안 넣었다.
넵. 얌전히 뒤따라가는 두 남자는 저녁을 먹고서 온실에 가기로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맛이 없을 수도 있으니- 8시에 씨앗들에 물 주고 말도 걸면서 자연스럽게 컵라면 하나씩 들고 만나자고. 두 남자의 도원결의는, 온실 행복 씨앗에게 말을 걸고 들을 수 없는 별이 평생 모르리라.
여느 평범한 집의, 평범한 저녁이다. 11월 말, 밖은 놀랍도록 추워 예쁘려고 코트를 입었던 커플들이 서로의 온기에 기대는 계절. 가을이 떠나가고 추위가 밖을 뒤덮는 시간. 그 시간을 류별과 장한, 그리고 그들의 열매가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내일도, 내일 모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