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는 날 자꾸 있는 그대로 더 봐달라고 칭얼거리고 싶은데. 내 곁에 있어달라, 말도 안 되게.
자조하듯 내뱉은 남자의 대답. 그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별의 모습은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닮았다. 방금 뭐라 그랬어요? 되묻는 별의 목소리에 딸꾹질이 얹혀졌다.
-어, 울다가 웃어서 딸꾹질까지 하면 엄청 못생겨진다는데. 별씨 엄청 못생겨지겠어.
[뭐래, 진짜! 지금 자기 때문에 운 사람한테 할 소리예요 그게? 장한씨 가만 보면 여자 다루는 법을 진짜 몰라. 아 솔직히 말해 봐요. 장한씨도, 진짜 찐하게 사랑한 적 없죠? 그래서 장한씨가 외로움 한 켠 기댈 여자 하나 없었죠? 그러니까 손도 못 내밀었지. ]
툴툴거리는 류별의 말에 다 맞다고 맞장구치는 남자의 미소가 아름답다. 테이블 앞 창문에 비친 햇살이 느지막히 그의 얼굴을 비추고, 싱그러운 그의 표정을 담은 얼굴이 더욱 잘생겼다. 홀라당 그가 계속 웃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빠져버리던 별은 결심한다. 그리고는 소리 없이 자꾸만 자신을 만나면 웃게 된다는 앞사람에게 엄격하게 말한다.
[장한씨, 나 선전포고 할 거예요. 잘 들어요.]
자신의 무거워지는 마음을 채 단도리할 틈을 눈 앞의 여자는 절대 주지 않는다. 장한은 나사가 하나 풀린 사람마냥 입에 담아지는 대로 넋두리하듯 대꾸한다.
- 선전포고요? 무슨 선전포고 하려고요. 뭐,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나?
[네. 전쟁할 거예요. 당신한테서, 당신을 데려올 거예요.]
느에? 감탄사와 말소리가 섞인, 한껏 힘빠진 소리는 별의 전매특허였지만 이번에는 장한이다.
-그게 무슨 소리… [당신, 당신이라도 그렇지. 자기를 그렇게 세상살이에 희생시키는 꼴은 이제 안 볼래요. 제 손 잡아요. 그리고 삶이 힘들거나 하기 싫은 일이 생길 때면 습관처럼 자기 때문이라고 때리는 당신에게서, 당신을 내가 지켜낼거예요. 저, 장한씨 옆에서 행복 찾을래요. 제가 장한씨한테 물어봐줄게요. 안 외로웠냐고 그간. 안 힘들었냐고. 아 힘들어도 같이 힘들어요 우리! 서로 칭얼거려 봐요. 세상에. 나 그동안 멀쩡한 남자들 소개팅으로 만나도 하나도 안 좋았거든요? 내가 이렇게나 별로인 사람인데. 맨날 어두운 마음에 빠져 사는데. 어떻게 날 이해하고 귀찮게 서로 만나나 했어. 근데, 장한씨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아.]
-뭐를요? 뭘 그러고 싶은데요?
[솔직히 말해요. 당신도 좀 고장났죠? 고장난 사람은 원래 고장난 거 잘 알아보거든요. 같은 종족이잖아.]
-...허?
[그러니까요. 그래서 고장난 사람이, 고장난 사람 곁에서 같이 행복 좀 찾아볼래요.그러고 싶어졌어요. 장한씨 곁이라면, 외로움이 뭔지 알고 삶이 얼마나 버거운지 아는 사람이라면, 나 힘들어도 살 것 같아.]
-저, 저기, 그 류별씨. 일단 진정하고요. 그 생각보다 제 삶이 어 류별씨 삶이 안 힘들다는 게 아니고, 어 저는 그 아주 다른 카테고리의 인생을 살고 있…
[아 그러니까요! 선전포고라고요. 그 다른 카테고리, 어디 한 번 내가 손 잡아줄테니까 있는 대로 퓨전해 보자고요. 나, 필요할텐데? 내가 누구 곁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면서요. 난 장한씨 옆 할래요. 지금은 그래요. 내일은 몰라도.]
고백이 아니고, 선전포고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여자의 진지함에 장한이 웃기 시작한다. 푸핫, 실소로 시작한 소리 없는 웃음이 왜 웃냐고 채근하는 앞 사람을 보고 박장대소로 바뀌어 버렸다. 배를 부여잡고 정말 웃기다는 듯 끅끅거리며 눈물을 훔치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쳐다보고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얼른 나랑 사귈거냐고 대답을 채근하는 여자 사이에는- 향이 가득하다. 이상하다, 별의 향은 4월 어느 날의 햇살 한 모금, 떠다니는 가을의 살짝 차가운 공기 두 모금, 흩날리는 첫눈의 열 번째 도착지 향인데- 지금은 그 향과 함께 새로운 향도 섞여 나는걸.
누군가의 마음 향이 역시 완성되고 있다. 아주 진하고- 따스한, 무더운 여름 나무 밑의 그늘 냄새 두 모금 그리고 진달래 뿌리와 나무 뿌리가 땅 밑에서 조우하는 만남 세 모금 향. 이건, 어떤 남자의 향일까. 자신의 향이 진해지는 걸 자신은 알고 있을까. 적어도, 저 멀리서 움츠린 씨앗이 갑자기 꽃망울이 맺힐 때까지 자라나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그리고 그 씨앗에 물을 주던 관리자가 화들짝 놀라 박수를 치고 있을지도.
두 사람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책방 사장님이 마침 장한에게 조용히 하라며 웃으며 다가온다. 그리고서는 책 한 권을 류별 앞에 놓는다. 얘가 누굴, 특히 여성을 데려와서는 자신의 책을 보여주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게, 이 놈 신권이에요. 소설인데 대범하게 에세이라고 출판해버렸다니까, 이 자식이. 그래서 제가 먼저 관심있어하는 사람들한테 말하잖아요. 이 책은- 에세이라고 찍힌 것 부터가 소설입니다. 하고.}
아닌데, 그거 진짜 에세이라서 에세이라고 한 건데. 볼멘 소리로 대꾸하는 장한을 가볍게 무시한 사장님이 류별에게 책을 건넨다. 책 제목을 확인하자마자 류별도 장한에게 장난이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찰싹 가볍게 등을 친다. 이 제목은 절대로 에세이일 수 없다나. 장한이 끝끝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래- 일단은 그런 걸로 치자. 근데, 진짜 내가 에세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믿어 줘야 할 거라며 옆 사람을 은근히 쳐다본다. 시선을 받은 옆 사람은 막상 책을 살펴보느라 바쁘다. 어엿한 커플 태가 벌써 나는 두 사람을 보고 센스 있는 사장님이 빙그레 웃으며 카운터로 돌아간다. 마침 저 멀리서 노트북으로 각자 무언가를 하던 커플이 장한네 테이블 위 그의 책을 보고는 저 책 뭐냐며 사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문의한다. 사장은 답한다.
“아, 저거요. 마침 잘 오셨네요. 지금 저기 앉아계신 저 남자분 있죠? 저 분께서 이 책 작가이시거든요. 지금 이 책 사시면 저분께 싸인도 받아다드릴 수 있어요.”
-오늘을 추억하기 딱 좋겠네요. 자기야, 우리 저 분 책 한권 사 가자! 저희 여기 오려고 지방에서 올라왔거든요. 인스타에서 대표님 피드 잘 보고 있어요. 저희 작가님 팬이에요!
[저- 독립 출판 작가 같으신데. 저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저 책이요. 혹시 에세이인가요? 저희가 에세이는 싫어하는데.]
“다행입니다. 그러면 이 책이 아주 잘 맞으실 거예요. 에세이라고 표지에 써놓은 것부터, 소설이거든요. 대범한 소설가죠? 저 녀석, 자기 능력에 비해 자신을 진심으로 뒤돌아볼 줄을 몰라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독립출판물 작가로만 살고 있는데- 제가 강력 추천합니다. 한 번 읽어보시면 후회 없으실 소설이에요. 저 작가는 방금까지도 이걸 에세이라고 우기지만요. 뭐, 손님들의 믿음에 맡기겠습니다.”
두 사람이 입 모아 어떤 내용이냐고 물어본다. 사장님이 카운터에서 친구 흉을 보는 듯, 부러 장한을 째려보며 말을 건넨다.
“일단, 행복 씨앗이 나옵니다. 말도 할 수 있고, 온 사방 팔방 둥둥 제 멋대로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이에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행복의 몫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분들같이 커플이나 사랑을 찾은 분들의 씨앗이 잘 자라서 꽃이 되면 … “
장한의 에세이이자, 남들이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그 책의 제목은 - [ ]
END.
그리고 류별의 꽃이 피었을까요? 장한은 시원하게 플로리스트 따위 집어치우고 세계 여행이라도 떠났을까요? 너는 사실 이용당했어, 하며 류별을 내팽개쳤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