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한과 류별, 겨울이 오기 전에 서로 손을 잡아보자고

(5-1) 장한의 속마음은 책 안에 있고, 류별은 참지 않아

by 라화랑

5.


합정과 상수역 사이에 위치한 독립출판서점 겸 술집. 나뭇결의 길쭉한 책상이 공간 가운데를 꽉 채운다. 한 손님이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찾은 듯 종이에 문장을 옮겨 적고, 오른쪽 끝 좌석에는 한 커플이 각자 노트북 타자를 치고 있다.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닿은 책들이 주는 차분한 공기를 가르고 두 사람이 등장한다. 익숙한 듯 기둥 뒤에 숨은 두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에 장한이 가방을 내려놓는다. 사장님과 눈이 마주친 남자가 무언의 반가움을 표한다. 그런 장한 뒤를 류별이 졸졸 따라와 자신의 트렌치코트를 벗어 의자에 접어놓는다. 어느새 사뿐히 다가온 사장님께서 작은 목소리로 어떤 것을 드시겠느냐 묻고, 둘은 하이볼과 딸기맛 맥주를 각자 시킨다. 금새 나온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이런 데 처음 와봐요. 북카페는 많이 와봤는데, 술집 겸 독립서점이라니 정말 신기해요. 여기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제가 말했던- 저한테 책 내달라고 했던 인터넷 친구가, 방금 다녀가신 여기 사장님이세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아 진짜? 근데 왜 서로 아는척 안했어요! 저 때문에?"


[어, 류별씨 제가 인사한 거 못 봤구나. 들어오자마자 했어요.]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류별이 아 맞다며 소리 없는 박수를 짝 친다.


"그래서, 우리 작가님 책은 어디 있는 걸까요? 아 아니다. 여기 있는 거 맞죠? 그럼 제가 혼자 찾아볼래요!"


[그래요 그럼. 잘 찾아봐요. 나도 오랜만에 왔으니 좋은 책들 나왔나 구경해봐야겠어요.]


두 사람이 나란히 책장 앞에 섰다. 류별이 눈에 불을 켜고 '작가 문장한'을 찾기 시작했다. 보자, 아마도 시집일테니 별로 안 두꺼울거고- 크지도 않을 거고- 예전에 나왔다니까 좀 아래칸에 있지 않을…엇, 이건가? 류별이 온통 검은 책 하나를 집어든다. 자세히 보니 회색의 먹구름이 몇 개 그려져 있지만 잘 티가 나지 않는다. 장한에게 눈짓으로 검사를 요청하고, 통과의 신호를 받은 별이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앉아서 책을 본다.

되고 싶지 않았던 모든 마음과 - 문장한 시집


첫 장부터 강렬하다. 별이 마케터답게, 빠른 속도로 글의 목차를 훑어보고 구성력을 재단한다. 그리고는 제목이 끌리는 글의 페이지를 찾아 먼저 넘긴다.



<이유는 없다, 사라지고 싶은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고, 평소와 다름 없이 시동을 걸었다. 직장의 누군가들에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리고 물을 주고, 애정을 쏟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고. 그러고 나서 썰물처럼 모든 게 밀려간 나만의 시간이 찾아오고.
갑자기 잊었던 숙제 생각나듯이
무엇인가가 둥둥 떠오른다.
깜빡했다, 너 거기 있었니? 미처 몰랐어- 하면서







<자화상>



잡혀진 적 없는 손은 내밀 줄 모른다
그에게 손이란 그저 너와 남을 위한 도구


아니다
손이 아니라, 몸이었던가
아니다
몸이 아니라, 나였던가



평생 혼자 짊어지는 삶이란 슬프지 않나요?


누군가 물어보지 않아서 대답할 수가 없다
미리 준비된 내 말은
허공에 흩날려 아무도 들어줄 리 없으니
하늘이시여, 운명을 얼마나 무겁게 할 셈이요

이것은




자신의 시집을 훑어보던 별이 이상하다. 점차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어떤 곳에서 오도카니 조각상처럼 멈췄다. 그리고는 … 저 여자 진짜 뭐 하는 거야. 장한은 곁눈질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별의 행동을 제대로 관찰하고자 고개를 휙 돌렸다. 겸연쩍은 독립출판 작가의 눈에 담긴 독자는,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허둥지둥, 당황한 장한이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별에게 건넨다.



-별씨, 왜 그래요. 갑자기 어디 아파요? 무슨 일이에요?



대답 대신 여자의 뺨에 흐르는 눈물. 그리고 이게 무슨 일이냐 싶은 소개팅남이 용기를 내 별의 어깨에 두 손을 얹는다. 그리고 조심스레 어깨 위를 손으로 토닥인다. 자신을 보라는 듯. 결국 마주한 두 사람의 눈- 영문을 몰라 당황한 깊은 눈동자에, 그 눈을 마주치자마자 다시금 눈물로 가득해진 여자의 순수한 두 눈망울이 담긴다. 울망울망, 울먹울먹, 주체할 수 없이 별은 눈물을 그야말로 터트리고 말았다.



…어어, 왜 또 그러지. 내가 너무 무섭게 생겼어요 갑자기? 그래서 그래요? 아니면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어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로봇마냥 어찌할 바 모르는 남자가 이것 저것 물으며 여자를 본능적으로 껴안았다. 토닥토닥, 다시 한 번 토닥토닥. 쉬이- 놀란 아이를 달래듯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섞은 남자의 위로에 여자의 들썩임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그리고 30여분 뒤- 차분해진 대신 머쓱한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와 장한 옆에 앉는다. 드디어 괜찮아졌냐며 남자는 가슴을 보란듯이 쓸어내린다. 이제 말을 걸어도 되냐는 무언의 눈짓, 그리고 끄덕임.



-이제 나 왜 울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너무 놀랐거든요. 괜찮은 거예요, 지금?


[네. 그- 작가 앞에 두고 미안해요. 정말 미안. 근데 왜 그랬어요 진짜! 왜 저런 학대를!]


-어, 운 거 혹시 … 나 때문인가? 설마 저 책 보고 울었다는 얘기 할 거예요?



괜히 입술을 깨무는 별은 이내 고개를 약하게나마 끄덕인다. 충격 혹은 당황 그 무언가 가운데에서 다시금 자신의 글을 되돌아보는 장한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별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나도 똑같이 아파서요. 자신을 할퀴면서 사는 이 사람의 안이 얼마나 외롭고 시끄럽고…. 상처로 헐었을까 하고. 내가 맨날 하는 짓이거든요, 그거. 나 때리기. 자책하기. 나 내 탓 하기.


세상에서 나만 없으면 될 것 같고. 사라지고 싶고. 이 힘든 삶을 남들은 다 즐겁다고 살아가는데. 나만 왜 안되는가 싶고. 장한씨, 저야 나 때문에 의도치 않을 상처 받는 사람들이 싫어서 친구를 두지 않는다지만 장한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잘해주잖아요. 그럼 친구가 많단 소린데- 우리 만난 것도 그렇잖아요. 유광이 뭐 원체 또라인 걸 감안해도요. 그래도 꽃집 사장님이랑 손님이 꽤 친해서 사석에서까지 만난다는 레파토리라던가, 거기서 심지어 누군가를 소개팅하는 건 쉽지 않단 말예요.


당신- 자기 생각보다 꽤 발 넓은 것 같은데, 그러면서 의외로 다른 사람한테 자기 진짜 속 얘기는 하나도 안 하나 봐요? 손 잡혀진 적 없다고 했잖아요, 어떤 시에서. 나 그거 너무 - 사무치게 외롭다는 거- 진짜 잘 알거든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는 내가 어느 날 너무 무거운 기분, 그거 견디고 사는 거 진짜 어려운데.]



아- 이 여자가 내 생각과 정 반대다, 이제보니. 이제서야 이마를 짚고 자신의 속내를 내보인 것을 후회하는 장한이지만- 이미 늦었다. 장한이 별을 만나기 전까지 해석한 그녀의 캐릭터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 없는 개인주의자

였다. 하지만 장한이 실제로 만난 별은

스스로를 견디기 힘들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줄까 전전긍긍하는, 사실은 사랑이 많아 외로운 사람

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쉽사리 내 속내를 드러내선 안 됐었는데, 이래서는…



이래서는 날 자꾸 있는 그대로 더 봐달라고 칭얼거리고 싶은데.
내 곁에 있어달라, 말도 안 되게.


자조하듯 내뱉은 남자의 대답. 그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별의 모습은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닮았다. 방금 뭐라 그랬어요? 되묻는 별의 목소리에 딸꾹질이 얹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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