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상한 거 또 있어. 자기를 도와달래. 근데 자기를 도와주는 방법이,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 행복을 좋아하는 거래. 그럼 자기가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대. 얘 뭐니 대체? 왜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 게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냐고. 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근데 또, 독립출판 작가야. 그러면서 그런 자신이 싫대. 수의학과를 졸업했는데- 어쩔 수 없이 꽃집을 운영한대. 꽃들이 자기만 찾는대. 유은씨- 나 아무래도 말하다 보니 알겠어. 완전 생 또라이를 만난 거지?"
대리님. 그 남자 마음에 들죠?
정곡을 푹 찌른 유은이 포크로 치킨 뒷다리도 폭 찍는다. 그리고는 맛있게도 뜯는다. 그리고, 뜯기는 것 또한 류별임을.
[대리님 같은 성격에- 마음에 조금만 안 들었어도 이렇게 혼이 쏙 나가서 있을 수가 없어요.
단칼에 거절 잘하잖아요. 대리님.]
"아, 내가- 그래? 난 내가 거절을 잘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어우 무슨 소리. 저 살다 살다 이렇게 냉철한 사회 생활 처음이라며- 몇 달 간 엄마한테 울면서 하소연한 거 알아요? 커피 한 잔 먼저 타주려고 했더니 그렇게 제 호의를 싹둑 잘라 버리는 사람이라니- 저 나름 처음이었다고요.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갓 입사한 24살짜리 여자애가 뭘 알았겠어요.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류별 대리님 말투 원래 그렇고, 다른 사람한테 책임 떠넘기지 않는 멋진 사수님이란 거 알지만- 처음에는 진짜 몰랐거든요. 그런 대리님께서 이렇게까지 누구 얘기하는 것 저는 처음 봐요.
그러니까, 대리님 이제 그만 아닌 척하고 빨리 얘기해줘요. 그 분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엇, 미안하다며 류별이 허둥지둥 사과를 건넨다. 그런 게 아니라, 신입사원이 누군가 커피를 타 주고 상사나 동료의 눈치를 보며 회사 생활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까지 덧붙여서. 그런 류별을 보고 유은이 두 눈을 깜빡깜빡, 연신 움직인다.
"저 완전 감동. 류별댈님 이렇게 착한 사람인지 우리 팀원들 다 알아야 하는데-
왜 그동안 회식은 안 나와서 사람들 다 오해하게 만들어요!"
[아, 그게, 그냥. 사람 많은 자리 좀 불편해서. 무슨 오해를 했는데?]
"그거야 완전 싹퉁바가지 사회성제로 일에만 코딩 완벽한 AI죠!"
와우. 얘가 요새 애가 맞다. 자신 같았으면 진짜 저런 마음이 들었어도 절대 상사 앞에서 솔직히 말하지 못했으리라. 류별은 헤실거리며 맥주 한 잔 더를 외치는 유은을 바라본다. 자기 마음과 감정에 솔직한 아이는, 저렇게나 사랑스럽구나. 류별이 픽 웃는다. 자신 앞에서 자신 욕을 멋대로 해버리는 이 어린 여자애가, 유은은 싫지 않다. 그리하여 좀 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우, 로봇 앞에서 치킨 먹느라 힘들었겠네."
[헙, 이제는 농담도 해요? 대박사건. 저 오늘 회사 달력에다가 동그라미 쳐 놓을래요. 류별 대리님 농담한 날이라고. 이건 두고 두고 기념해야 해.]
"아 진짜, 그만 오버해 좀. 그러고 보니, 내가 이렇게까지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싶었던 적도 없었으니까.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는 노력인건가 싶기도 해. 어디가 마음에 드냐고 물었지?
잘생겼어. 내눈에. 심히. 아, 그게 제일 커 사실.
그리고, 자신이 아니어도 된다는 그 마음이 신경쓰여. 내 행복을 바라면서- 자신의 행복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 말이 자꾸 걸려. 그 사람- 왜 가을이 좋다는 지 알아? 오는 손님들의 기운이 좋아서 그렇대. 그래서 내가 자기를 위해서는 무얼 좋아한 적 없는 거냐 물었더니- 진짜 몰랐다는 듯 놀라더라.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본댔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잘생겼다는 건 알겠는데 남의 행복을 바라는 게 신경이 쓰인다니요?
그냥 착한 사람 아니에요?]
그렇지,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테지. 고개를 끄덕이는 류별이다. 자신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마음이 간다. 신경이 쓰인다. 그 나름대로의 사랑 고백이었던가.
[내가 아니어도 좋으니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문장에서 별은 왜
[꼭 나이기를 바란다]는 번역기가 돌아가는 건지, 자신도 모를 풀이다.
스스로에게 관심 쏟은 적 없는 사람의 기운이었다.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한 적 없다는 씁쓸한 웃음에서 나오는 그의 건조한 온기란- 자신을 향해서는 한 번도 쬐어진 적 없는 듯 했기에. 자신을 탓하는 게 습관적인 류별만이 느낄 수 있는 특이한 감상이었을 수도. 류별이 스스로에게 늘 반성과 후회로 가득한 하루를 살아내며 누군가와의 접점을 끊어내는 동안, 장한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만큼 다른 사람에게 모든 기준을 맞추어 제 한 몸 바친 햇살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런 장한을- 별은 지켜주고 싶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갖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챈 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다 문득 자신 앞에서 꽐라가 되어 푸헹헹 웃어대는 귀여운 신입사원을 내려다본다.
"아휴, 그래- 네가 고생이 많았다. 내 얘기 대신 들어주느라. 우리 이제 집에 가자. 내일 토요일 아니야. 출근해야지. 이제 일어나, 너 가방 어디 있어?"
[제 가방으은, 으응, 오디 있을까요오? 퀴이즈!]
말도 안 되는 말을 주저없이 뱉어내는 걸 보니 만취다. 덕분에 오늘 자신이 털어놓은 속마음 같은 거,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쉰 별이 카카오 택시를 잡는다. 계산은- 내일도 멋지고 냉철한 상사여야 하는 별의 몫이다. 정신을 반쯤 놓은 유은을 태워 보내고 나니 밤 11시다. 얘기하느라- 술 먹느라 핸드폰을 확인할 겨를 없던 별이 핸드폰을 확인한다. 새 메세지 3건, 그리고 발신자는 모두- 장한이다.
-류별님. 오늘도 좋은 하루 됐어요?
혹시 괜찮다면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제 책 드리고 싶어서요
한 번 더 뵈었으면 하는데 주말에 시간 좀 비워주실 수 있어요?
어라- 분명 안 취했었는데 왜 이렇게 세상이 울렁거리지. 약간 도로가 반짝이는 것도 같고. 빵빵거리는 도로 소음이 아름다운 것도 같고. 같은 술 냄새를 풍기며 지나치는 아저씨들이 괜히 웃겨 별이 킥킥거린다. 그리고 지하철 막차가 끊기기 전에- 입구를 향해 달린다.
집에 도착하면, 답장해야지.
11월 초- 도시의 가을밤이 이상하게 따뜻하다. 집으로 향하는 류별의 발걸음은 산책하는 사람마냥 가볍다. 아, 산책이라고 하니까 또 생각나잖아 그 사람? 여자의 두근거림이- 남자에게 닿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