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사랑, 류별이 사랑에 빠졌을 지도-친구가 필요해

(4) 여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져 친구를 찾고

by 라화랑

4.


친구가 없다는 것의 장점은- 어떤 시간이든 자신을 괴롭히고 방해할 누군가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구가 없다는 것의 단점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최근 있었던 가벼운 마음들을 털어낼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류별은 친구가 없는 삶에 처음으로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남자, 진짜 뭐야. 알 수 없는 말만 중얼중얼. 무슨 노래 가사인 줄."

타자기를 두드리며 프로젝트 운영 계획서를 3번째 재검토중인 5년차 대리 류별 옆 자리의 신입 사원이 신경쓰인다는 듯 예의상 한 번 묻는다.


-대리님, 괜찮으세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또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할 일 하세요. 하는 냉기 가득한 대답이 돌아오겠지. 요새 신입사원들은 대리님이니 부장님이니 다 신경 안 쓴다고 하는 인터넷 밈이 넘쳐 흐르는데,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은 옆 자리 사수가 한숨 한 번 푹 쉬면 단체 카톡방으로 오도방정 자신 때문인가 호들갑을 다 떨어대는 걸 왜 모르는가- 유은은 세상이 답답했다. 그리고 임유은에게 옆자리 사수는, 매우 어려운 상대였다. 뭘 같이 먹자고 하는 법 한 번 없고,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 자신이 먼저 빠릿하게 타 주려고 할 때면


"유은님. 저희 회사는 직급이나 나이에 따라 커피를 타라고 하지 않는 수평적인 곳입니다. 앞으로 제 커피나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굳이 눈치 보지 않아도 됩니다."


라며 칼같이 선을 긋곤 했다. 그런 류별을 사수로 둔 덕분에 대학교 동기들이 겪는 원치 않는 회식과 각종 프린터 눈칫밥에 해방된 그녀였지만,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유은은 그것 나름대로 고통스러웠다. 퇴근하고 옆 자리에 같이 앉았던 직장 동료들과 함께 치킨집에 들러 검은색 정장 자켓을 훅 뒤집어놓은 채로 맥주를 건배하는 로망이, 대학교 4학년 취준생 시절을 견디게 한 상상이란 말이다!

KakaoTalk_20231116_161807730.jpg

그런 유은의 옆자리가, 오늘 좀 이상하다. 한 번도 실수같은 것 하지 않던 팀장님이 어긋난 코딩처럼 오류 투성이다. 스테이플러를 밑에 집어서 허둥지둥 다시 프린트 하지를 않나, 또 새로 뽑은 그 계획서는 작년 계획서이질 않나. 저 양반이 대체 왜 저러나, 집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안 그래도 신경을 곤두서고 있던 우리 귀여운 신입사원이 드디어 말을 걸 건덕지가 생겼다. 유은은 냉큼 류별의 혼잣말을 주워 대화의 공을 사뿐히 띄워올린다.


"대리님. 오늘 좀 이상해요. 무슨 일 있으신거죠?"


[어, 그래보여요? 아닌데. 나 안 이상한데.]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실수 하시잖아요. 이것 봐봐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대체 무슨 계획서에 표가 저렇게 들어가요!"


어, 그러게요… 나 진짜 이상하네. 남들이 알만큼 티가 나네.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지 화면에 띄워진 100 곱하기 100의 표를 지운 류별이 다시 한 번 내쉬는 한숨. 그리고 또 덧붙이는 혼잣말. 유은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사실 좀 알아달라고 한 혼잣말일 수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는 류별이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대체 뭔 심산이냐고. 뭔 생각이래.

"남자 얘기요?! 엄마야 류별님 썸 타는 남자 생겼어요? 아니면 남자 친구?! 소개팅?! 뭐예요?"


본인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에 유은이 입을 합- 다문다. 그렇지만 이미 사무실 안에 퍼진 신입사원의 낭랑한 대꾸는, 안 그래도 졸리고 피곤한 목요일 오후 4시의 직장인들 귀에 무척 자극적이다.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에- 다들 한 마디씩 신나게 말을 더한다.


"뭐야, 자기네들끼리 재미있는 얘기 하네? 나도 껴줘!"


"그러게 말예요. 류별 대리 연애하나 봐?"


"내가 살다살다 류별 대리가 사생활 얘기하는 모습을 다 보고. 유은씨 나이스 샷이야."


별의 얼굴이 빨갛다. 뜨거워진 두 뺨을 어루만지며 황급히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는 유은을 다급히 탕비실로 끌고 간다. 질질질 끌려가는 신입 사원은 별의 사랑을 응원한다는 환호성을 향해 찡끗- 팀장님께 손짓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오늘이야말로- 류별 대리님과 친해지고 말겠어.

"유은씨, 그렇게 말을 크게 하면 어떡해. 내가 너무 놀랐잖…"

KakaoTalk_20231116_161653538.jpg

탁 소리나게 탕비실 문을 닫은 류별이 화끈거리는 두 얼굴을 식히려 왼 손으로 연신 부채질한다. 그리고 대책없는 우리의 말괄량이 신입사원을 쳐다본다. 어라, 자신 앞의 사람 볼도 함께 빨개져있다. 두 눈은 심지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생기가 넘친다. 얘가 이렇게 눈을 크게 뜰 수 있었나. 억지로 웃으며- 그럼 이만, 하고 자리를 뜨려는 류별과 달리 패기 넘치는 젊은이는 즐거운 이야기를 자를 생각이 없다.


"제가 조용하기를 원하신다면, 류별 대리님. 말해주세요."


"뭐, 뭐를."


"류별님이 자꾸 생각나는 그 남자요. 누구예요? 무슨 일 있었죠 분명!"


그런 거 아니라며- 괜히 커피 머신에 아메리카노 버튼을 꾹 누른다.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간 여자는, 또 다시 멍하니 추출되는 커피를 쳐다본다.


"아 대리님, 컵! 컵이요! 저거 어쩔 거야!"


[어, 그러게. 내가 왜 컵을 깜빡했지. 나 진짜 정신을 놓긴 했나봐. 그 남자한테.]


대리님 비키시라며, 바닥을 대신 청소하고 있던 신입 사원의 귀가 다시 한 번 뜨이는 순간이었다. 대리님, 분명 남자라고 하셨죠! 두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유은이 류별을 향해 소리친다. 자신이 말로 마음을 뱉고 있다는 것 조차 모르던 류별이 너, 너 내 마음 어떻게 알았어? 하는 표정으로 유은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한숨을 툭 뱉는다. 류별 미쳤나 보다. 이렇게 술술 마음이 다 새서야. 그래, 업무에 지장이 가니 차라리 빨리 여기서 털어버릴까. 신입 사원이니까 설마, 얘가 회사 안에서 누구랑 떠들고 다니겠냐- 사실은 그런 모든 계산보다 제발 자신의 이 어지러운 마음을 터놓고 싶었던 류별이었기에- 다짐한다. 그리고 말을 꺼낸다.


"그럼, 이 아메리카노 다 먹을 때 까지만. 딱 10분만. 혹시 괜찮으면 내 얘기 한 번 들어봐줄 수 있…"


"아 완전요! 저 열 시간도 더 들을 수 있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얘기가 뭐냐면요, 대리님. 그건 남 사랑 얘기랑, 싸움 얘기걸랑요!"


워워, 그정도 얘기는 아니다. 사랑이라는 그런 부끄러운 말 붙이지 말라는 류별의 입단속에 아무렴 어떻냐는 유은이 귀를 쫑긋 세운다.


"그, 사실, 신경쓰이는 남자가 있어. 소개팅에서 만났는데, 이상해. 근데 끌려. 내 취향이 특이했었나 싶기도 해. 원래 다들 이래? 이거 정상이야?"


"어머, 진짜 흥미로운 시작이다. 더 해줘요, 대리님. 제가 다 듣고 말씀드릴게요. 일단 다 털어놓아 보세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듯한 두 사람의 대화는, 이러지 말고 퇴근 후에 치킨집에서 계속하자며 판을 깔아버린 유은 덕분에 저녁 7시에 이어졌다.

KakaoTalk_20231116_161238708_06.jpg

"좋아해달랬어."


"대박. 그거 완전 고백 아니예요? 뭐야, 그 남자 잘생겼어요? 마음에 들어요? 엄마야 나 너무 설레!"


"근데, 그거 아니야. 자기 아니어도 좋으니까-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해달래. 그리고 오늘이 그랬으면 좋겠대. 그런 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는데. 이거 뭐야? 똘아이야?"


턱을 괴고 어느새 치킨을 씹는 것도 잊어버린 유은이 호들갑을 떨며 더 얘기해보라 보챈다. 류별이 맥주를 벌컥 들이킨다. 속이 시끄러우니 차가운 게 땡기네. 짠- 두 여자가 맥주잔을 맞댄다. 안주는- 그 남자.


"그리고 이상한 거 또 있어. 자기를 도와달래. 근데 자기를 도와주는 방법이,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 행복을 좋아하는 거래. 그럼 자기가 자기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대. 얘 뭐니 대체? 왜 내가 누구랑 같이 있는 게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냐고. 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근데 또, 독립출판 작가야. 그러면서 그런 자신이 싫대. 수의학과를 졸업했는데- 어쩔 수 없이 꽃집을 운영한대. 꽃들이 자기만 찾는대. 유은씨- 나 아무래도 말하다 보니 알겠어. 완전 생 또라이를 만난 거지?"

[대리님. 그 남자 마음에 들죠?]
KakaoTalk_20231116_161238708_05.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을과 사랑, 나조차 내가 싫은데 왜 넌 날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