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재의 고백, 겨울을 잡아라
5.
합정역과 상수 사이의 일식 덮밥집. 맛집임을 인증하듯 가게 밖에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한 의자가 촘촘히 놓여져있다. 어제 여기서 12시에 보자는 기재의 메세지와 친절히 덧붙여진 식당 링크를 먼저 보고, 문 밖에서 이 추위에 얼마간 기다려야 하나 고민이 앞섰던 여름은 그 덕분에 잠을 설쳐 늦잠을 잤다. 12시 15분경 헐레벌떡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가 다급히 눈을 굴려 구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찾는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마음 덕분인지, 전 날 밤 설치며 어색할까 고민했던 자신의 말투가 무척 편안한 것도 모른 채다.
-어우, 진짜 미안해요. 진짜! 나 정말 내가 이렇게 늦을 줄 몰랐는데, 아 여기 코트? 어, 어디 앉아요 여기? 근데 여기 검색해보니까 엄청 줄 길게 서던데 오빠 어떻게 들어와있…
-천천히. 겨울아. 괜찮으니까 숨 좀 쉬어. 코트 나 주고.
평소 같았으면 내 옷을 오빠한테 왜 주냐며 일부러 틱틱거릴 겨울이 아, 어, 응 하는 얼빠진 소리와 함께 순순히 외투를 건넨다.
그런 겨울의 달라진 반응을 당연히 쉽게 기재가 눈치챘다. 다시금 짝사랑 진행중인 남자, 그래서 겨울의 모든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게 즐거운 남자라면 당연하지. 둘이서만 먹는 식사자리가 이렇게나 어색했었나- 겨울은 어떤 말을 꺼내야 할 지 조심스러워 머뭇대고, 그런 겨울을 기재는 오히려 즐긴다는 듯 부러 대화 중간중간 끊기는 침묵을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가만히 쳐다본다. 너, 이제 이 침묵 어쩔거야- 하는 여유로운 미소도 장착한 채.
일부러 날씨가 좋죠, 아니다 날씨가 춥다, 오늘 옷이 참 멋지다, 학교에는 왜 그런 것 안 입고 오냐, 등의 아무말 대잔치 풍악을 울리던 겨울은 자신도 돈을 내겠다며 카드를 꺼내는 손을 눈빛 한 번으로 제지당했다. 꼬물꼬물 어찌할 바 모르는 손을 보고 기재는 식당 문을 열어주며 생각한다.
-임겨울, 오늘 귀여워 미치겠네.
저 머릿통 속에 뭐가 들어가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무언가 물어보고 싶은데, 뭘 물어보거나 말을 꺼내면 자신이 진지하게 맞받아칠 것 같아서 눈치를 조록조록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조금만 건드려도 화들짝 놀라버리며 굳는 게, 확 깨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딱 귀엽다.
물을 먼저 따라줬더니 황송하다는 듯이 받아먹지를 않나,
맛있냐고 물어보며 자신의 메뉴도 먹어보라고 접시에 덜어줬더니 불에 데인 듯 자신 것도 황급히 주려하질 않나,
그게 웃겨서 그럼 아- 할테니 네가 먹여줄래? 라고 장난을 치자마자 나라 잃은 사람마냥 숟가락을 떨궈버리질 않나.
기재는 짜릿했다. 그동안 용기 안 낸 자신이 너무나도 바보같을 정도로. 겨울의 뚝딱거리는 모습을 자신이 평생 모를 뻔 한 것에 대하여 남자는 이제라도 이런 모습을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점심 식사는 겨울에게 딱 맞았다. 평소 일식을 좋아하는 겨울을 알고 있기에 기재가 다방면으로 검색을 했다. 1인분으로 나오지 않는 음식을 시키면 분명 제대로 다 먹지 않을 테지만 자신의 몫이 나와버리면 요리사에 대한 예의라며 어떻게해서든 한 그릇을 싹싹 비울 그의 짝사랑녀는 그런 마음조차 기재에게 모조리 사랑스러웠다. 겨울이 배를 땅땅 두드리며 맛있었다고 웃음을 짓자, 기재가 그런 겨울의 뒷목에 손을 댄다.
-코트 카라가 세워져서. 접어 줄게.
흡- 겨울이 갑자기 다가온 차가운 공기에 숨을 참는다. 어, 원래 그런, 그런…? 기재가 겨울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춘다. 아직도 입술을 꾹 깨물고 숨을 쉬는 걸 잊은 겨울에게 키가 훤칠한 남자가 말을 붙인다.
-이제 됐다. 우리 카페 갈까? 앞에 네가 좋아하는 북카페 있더라. 너 갈색 인테리어 좋아하잖아. 짙은 나무색. 책도.
아, 이 남자 다정한 사람이었지. 아니다- 생각해보니 모두에게 다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제야 생각하는 겨울이다. 그간 겨울에게 기재는
‘원체 모두에게 다정해, 그래서 나에게도 친절한 매너를 베푸는 선배’
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날 좋아해서였다니, 아니, 그래도,
-언제부터…?
-너 또 다른 생각하고 있지. 임겨울. 오늘 하루 종일 그럴 거야?
앞에 있는 사람 눈 보고 마음으로 대화 해야지요, 학생.
기재가 카페에서 시킨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자리에 가져와 쟁반을 탁 소리나게 놓는다. 의자 끌리는 소리에 다시금 정신을 차린 겨울이 고개를 바짝 든다. 기재는 손에 턱을 괴고, 앞 쪽으로 기대 묻는다. 앞의 사랑에게, 자신의 마음을 기댄 채로.
-임겨울 학생. 선생님이 질문 세 번 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어떤 것이든 좋으니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지금 물어봐요. 시간은, 보자, 음… 5분 줄 거예요.
그게 뭐냐며 황당해하던 겨울이 갑자기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묻는다. 진지하다.
-무엇이든, 솔직하게 대답할거야?
-응.
-진심으로?
-응, 그럴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은 겨울이 기재에게 용기를 내 묻는다.
-그, 저기, 나 진짜로 좋아하는 거 맞아?
-응. 맞아.
질문과 답의 간극이 짧다.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선생님의 태도로 기재는 명확하되, 다정하게 대답을 꺼낸다.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첫 번째 질문 끝났다는 표시도 덧붙인다.
-아니, 아니 오빠 그게 아니고. 음, 그러니까. 우리 너무 오래 같이 있었고, 오랜만에 몇 년 만에 보기도 했고, 그래서 오빠가 또 외롭고오 그러니까 오해를 해서, 순간의 헷갈림으로 그런…
-겨울아.
횡설수설 눈을 못 마주치고 말을 이어나가는 겨울과 기재의 시선이 맞닿는다. 두 손을 들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여자의 오른손을 앞에 앉은 남자가 잡아버린다. 그리고는 진정하라며 토닥, 토닥. 겨울의 오른손을 기재의 왼 손이 가볍게 쓰다듬는다. 겨울은 다시 입술을 깨문다. 헙-
-내 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음- 뭐가 좋을까, 설명하려면.
그래, 너 2주 전에 말야. 교장 선생님이 네 계획서 반려했을 때 기억나지? 그 때 너 화난다고 우리 교실 찾아왔었잖아. 그 때 화가 났다는 게 헷갈리거나 순간의 헷갈림으로 오해했던 감정이었어? 너, 화가 난다고 찾아와서는 초콜렛 하나 주니까 헤헤 웃고 금방 사그라들었잖아. 그럼 착각한 거 아냐?
-아니, 그건 아니지. 그건 진짜 화난 거 확실하거든? 내가 금방 마음을 잘 정리해서 그렇지, 그게 빠르게 없어졌다고 해서 화가 아닌 건 너무하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야. 겨울아,
사람의 감정은 겪는 자신이 제일 잘 알고 확신하는 거야. 난, 네가 좋아.
좋은 친구 말고, 좋은 선후배 말고, 친한 사이말고, …사랑의 감정으로. 사랑으로 네가 좋아. 네가 좋은 이유라면- 그건 사랑일 거야. 그래서 난 헷갈림이 없어. 감정에는 착각이 없으니까.
자, 이제 두 번째 질문 하시죠, 학생?
소리 없이 활짝 웃음꽃이 핀 남자가 브이하듯 두 손가락을 여자의 눈 앞에 들고 흔든다. 여자는 아주 약간, 고민하다 두 손을 꽉 쥐고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 언제…
-응? 잘 안 들려 겨울아. 나 더 가까이 가?
-아니, 아니! 그,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으악, 뱉어버린 낯간지러운 말에 겨울이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결국 자신의 머리를 헝클인다. 살려줘요, 저는 이런 로맨스에는 면역이 없단 말이예요- 생각지도 못한 하루 하루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여자는 다시금 남자에게 손을 제지당한다. 익숙하다는 듯 삐져나온 머리들을 단정히 한 손으로 빗어준 기재가 이번에는 톡톡,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답한다. 우리 겨울이, 언제 크나-
-언제부터라.
그거 정말 어렵긴 하다. 정확히 알게 된 건, 네가 나한테 민지랑 잘 해보라고 말하려고 둘이서 술 먹자고 했을 때. 둘이서만 술 먹으러 간다니까 이상하게 떨리더라. 사실 그 전에도 나 너 좋아하는건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말야. 그 때 확실히 알았어. 네가 무슨 말 꼭 해줬으면 싶더라고. 나, 좀 좋아하고 있다고.
근데 생각해보면, 겨울아.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하게 됐던 것 같아. 그 때에도 넌, 지금이랑 똑같았거든. 눈은 이렇게 반짝반짝, 겁내면서도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고 물어보고, 난 그런 네가 신기하고 재미있고. 그래서 자꾸 옆에 있고 싶고. 눈길이 가고. 챙겨주고 싶어. …그러다 손도 잡고 싶고. 같이 심심할 때 놀고도 싶고. 네 생각들이 나도 궁금하고. 나 없는 네 시간들에 조급해지고. 누구와 같이 있길래 월요일에 주말 즐거웠다며 헤헤거리는지, 속은 타들어가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네 모습이 예쁘고.
내 사랑은 습관같아, 겨울아. 네게 하루 기분이 달린 내가, 난 익숙하거든.
기재는 마음의 가장 짙은 한 마디는 속으로 삼킨다. 겨울이 부담스러워 할 까봐. 안 그래도 이미 자신의 말이 더해지며 입이 벌어지는 여자 앞에서 어떤 말을 더하겠냐고. 우리 겨울이, 언제 커서- 나한테 올 거니.
겨울이 이제 그만 물어보자며, 자신은 들을 걸 다 들었다며 황급히 주제를 돌린다. 그나저나 이 카페 참 예쁘다라던지, 여기 책 많은데 뭐가 있는지 좀 둘러봐야겠다던지.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깨고 자리를 일어나려는 겨울을 기재가 부드럽게 다시 앉힌다. 그리고 겨울에게 묻는다.
-그럼 나머지 질문 하나는 남았으니 내가 너에게 할래. 그래도 되겠지요, 학생?
엉거주춤한 자세로 겨울이 끄덕이고, 기재는 씩 다시 한 번 웃는다.
겨울아, 한 번에 이만큼은 커 줄래? 내가 이제 그만 기다리려고 해. 쑥쑥 마음 크고,
- 매일 밤에 전화하는 사이, 되어 줄래? 나- 네게 어떤 사이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나 꽤 좋은 남자 친구일 거라 자신하거든. 그래서 너도 날 조금 경험해 주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의 사이 말고, 특별한 감정이 깃든 서로 말야.
그러니까 내 말은, 진짜 사귀는 건 아니더라도-
음- 체험판. 체험판 남자친구, 어때?
너도 네 마음이 어떤지 천천히 알아보고, 나는 네게 어떤 면이 좋은지 어필하는 시간.
그리고 얼른 내 옆으로 오자.
사랑이 아니라도, 일단은 가벼운 호감이라도 괜찮아.
일단, 내 옆에 있어 줘.
…그러니까 오늘 저녁 걔랑 한 약속은 안 가면 안 돼?
며칠 전, 겨울과 건오의 약속 잡기 현장을 복도를 지나가다 직관한 기재는- 학년 부장 중 나이도 어린 게 가장 늦었다며 교무실에서 타박을 맞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토요일 점심, 겨울의 시간을 뺏었다. 신원 확실하지도 않은, 얼굴만 번지르르한 그런 애 말고- 내 생각 해 줘. 겨울아.
그리고 웬만하면, 걔와의 약속 자리에는 갈 생각도 안 했으면 하는데.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늘 마음에 묻어놓는 기재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삼켜버리곤, 혼자 아파하는 것에 익숙하지. 그게 습관이니까.
자신을 해하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은, 여자. 임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