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건오의 고백, 뜨거운 겨울
6.
[건오님! 제가 정말 죄송해요- 어쩌지. 제가 예상치 못하게 꼭 가야 하는 약속이 생겼었는데 ,그, 앞 약속이 조금 늦게 끝나 버렸어요. 너무 죄송해요. 도착하면 6시 15분 정도 될 것 같은데 혹시 늦게 나와주실 수 있을까요? 엇 벌써 나오셨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그러면 최대한 뛰어서 얼른 갈게요! 그, 먼저 들어가셔서 드시고 싶으신 것 시키시면 제가 살게요! 죄송하니까!]
겨울의 전화를 받고 건오가 맥주집에서 메뉴를 뒤적인다.
네가 말했다- 나보고 먼저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키라고.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다. 갑자기 꼭 가야 하는 약속이란 건 무엇인지. 건오가 맥주 두 잔과 스키야키, 육회를 시킨다. 비싼 것 시켜버릴테다. 누굴 만나 쏘다니길래 시간 약속까지 어기는 건지 꼭 물어봐야겠다 생각하는 남자가 테이블에 한 손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린 채로, 다른 한 손은 턱을 괴고 가게 바깥을 째려보고 있다.
토요일 저녁 6시- 경기도 강배시 집 앞 맥주집에 앉아있는 건오를 창 밖 아줌마들이 노골적으로 쳐다본다. 따라오는 시선에 건오가 휙 눈을 돌려 쳐다보자, 아줌마들 세넷이서 자기들끼리 깔깔거리며 건오를 보고 잘생겼네 20년만 더 젊었으면 어쩌네 하는 기분 나쁜 농담을 내뱉는다.
아, 개같다. 담배나 한 대 더 피고 있어야지.
시간 약속 어기는 여자는 딱 질색이다. 부모님께 어려서부터 1분의 가치를 몸소 현장을 다니며 호되게 배운 터다. 옛날부터 썸 타면서도 여자들이 10분이나 20분 늦어버리면 박차고 자리를 일어섰던 그다. 당연히 자신들을 기다려주겠지 하는 태만한 자세, 혹은 자신을 의도적으로 길들이려는 연애 직전 주도권 눈치싸움은 건오가 극도로 혐오하는 것이다.
…그랬는데, 이 여자는 진짜 미안해 보인단 말이지. 열받게도.
뭘 더 안다고- 자신도 모르게 직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본 남자는 여자의 말이 이상하게 진심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담배를 하나 더 무는 것으로만 마무리한다. 누가 봐도 논리가 이상해보이는 아줌마 앞에서도 본인 잘못 하나 없는데 몇십 분째 욕을 들어먹고 있다니. 여러모로 자신을 돌아버리게 하는 데 본능적으로 도가 튼 여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그러고 싶었지.
그리고 …자신은 무척 좋았단 말이다. 그 밤이. 말도 안 되게.
타들어가는 담배를 탁탁 털고 다시 들어갈 무렵, 저 멀리서 헉헉대며 뛰어오는 여자가 보인다. 임겨울이다. 성도 몰랐던 여자, 교실 문 앞에 깜찍하게도 오색찬란한 학급 안내판이 있더라. 담임 교사 이름을 훑었다. 임겨울, 그리고 그 아이들 25명. 개중에는 본인 장비를 망가뜨린 허율인지 하율인지 뭔 그 놈도 있겠지. 사실 그 남자애가 망가뜨린 장비는 200만원도, 20만원도 아닌 2만원이다. 조그마한 아이가 싸가지가 하도 없길래 거짓말을 좀 쳤더니 그새 꼬리 내리는 꼬라지하고는. 하지만 덕분에 이 여자가 미안해 죽겠는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오히려 고맙다 해야 하나. 건오는 생각하며 비죽 입매만 웃어보였다.
-그으, 제가 정말 죄송…
-됐고. 누군데.
-느..느에? 누가요?
건오가 한숨을 내쉰다. 이 여자는 꼭 몇 번씩 물어봐야 답을 알려준다. 얘 이래서 어디 교사 하겠어? 이렇게 아방해서야 원.
-내 앞에 만났다던 갑자기 생긴 중요한 약속. 그 사람 남자냐? 나 그럼 진짜 화나는데.
-아…? 아, 그, 맞긴 한데, 그… 학교 부장님이요! 부장님이 만나자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제가 거절을 못 하고…
아, 그 얼굴 까맣고 재수 없는 안경 쓴, 키 멀대같이 큰 하얀 셔츠 입은 그 새끼. 눈도 흐리멍텅하게 떠서는 꼭 자신을 째려보는 것만 같이 눈매가 꽤 길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얗고 곱상한 자신과는 정 반대의 얼굴. 성실함이 느껴지는 큰 근육질의 몸.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멀대같이 큰 키까지. 남자는 본능적으로 안다. 건오는 겨울을 학교에서 마주한 첫 날, 부장님이랍시고 그 남자한테 달려가는 겨울과 자신을 잠시 쳐다보는 남자의 눈을 보고 느꼈다. 아, 저 남자가 임겨울 좋아하는구나. 임겨울은 아무 생각도 없이 모르고.
-열받네. 야. 넌 사람 약속이 있는데 그 앞에 또 약속을 잡냐? 너 원래 그래?
난 그거 진짜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어, 저는 그게, 그 어쩔 수 없이, 그… 근데 그러고보니 그렇네. 저 왜 이렇게 계속 혼나요? 너무해! 저녁에 맥주집에서 보자고 한 건 건오님이잖아요! 그럼 건오님이 제게 용건이 있는 것 아녜요? 이렇게 근데 오자마자 계속 화만 내시면, 전 무서운데!
그렇지, 그제서야 자신이 왜 이 여자를 불러냈는지 기억한 건오가 아, 맞네.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겨울이 틈을 타 명랑하게 건배나 하자며 잔을 든다. 건오와 겨울의 잔이 허공에서 짠- 소리를 내며 만난다. 겨울은 달려온 게 꽤나 고됐던 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 저기 그 장비…는 어떻게 잘 수리하셨…
-아니, 그건 됐어. 너 원래 이렇게 아방하냐. 그래서 뭐 네 일 제대로 하겠냐. 지난번처럼 아줌마들한테 치이기나 하고. 요새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너 그러다 남자애들한테 질질 끌려다닌다?
- ...아…? 저기요. 건오님. 제 일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서 할 정도로 경력은 있으니 그만 하셔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도 건오님 학교에서 뵙고 일 하는 것 뵈었지만, 단 한 번도 건오님 일 열심히 하네 안하네라며 평가한 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고요. 꽤 불쾌합니다. 사과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변한 겨울이 맥주잔을 쾅 내려놓는다. 눈길이 냉정해졌다. 앗차, 이게 아니지.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고, 건오가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여자 앞에서 처음으로 허둥지둥한다.
-그게, 아니고. 어, 내가 생각해도 이건 잘못했네. 미안.
그, 걱정이…돼서! 그랬어.
자신의 사과에 싱긋 웃기만 하고 말 없이 끄덕이는 겨울의 미소가 건조하다. 건오는 다급해져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 얘 앞에 있으면 뭘 하고 싶었던 건데. 왜 주말 저녁에 불러낸 건데. 정신 차려, 이건오.
-그, 너는, 연애할 때 뭐 보냐.
-그, 너 이상형 같은 것 있냐.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겨울의 눈이 커진다. 겨울이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하며 맥주 한 잔을 더 시킨다. 대체 무슨 생각이 저렇게 많은 거야. 생각하는 것 그냥 그대로 말만 하면 되는데. 건오는 자신을 앞에 두고 자신의 마음을 재정비하는 여자가 답답하다. 그리하여 묻는다.
-뭔데, 너. 무슨 생각을 사람이 묻는 것에는 대답도 안 하고 하는데. 그냥 해 봐. 너, 뭐 복잡한가 보다? 혹시, 남자친구 사실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아뇨! 그건 진짜 아니고요. 그, 제가 사실 그 이런 게 처음이라, 하하, 하핫하. 뭔가 많이 복잡한 게 맞는데요. 근데 뭘 어디까지 생각을 할 지 모르겠어서요.
-그냥 해. 말로. 뭐가 그렇냐.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할 말 있으면 하고- 그런 거지. 뭔데.
뭐가 복잡하냐며 이것 참 쉽죠? 하는 건오의 눈이 가볍다. 겨울은 한결 자신의 생각을 비우게 된다. 그래, 굳이 빙빙 돌려 미래까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지- 겨울이 산뜻해진다.
-그, 건오님. 혹시 이런 일 자주 있어요? 전 처음이라 많이 당황했거든요. 자주 있는 일이신가 해서.
-뭐래, 나도 처음이거든? 넌 날 뭘로 보고.
아,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겨울이다. 그런 겨울을 보고 건오가 연신 답답하다는 듯 테이블을 부러 탁탁 친다. 고개를 들어 겨울이 건오와 눈을 맞춘다. 아, 저 장난스러운 눈에 보조개는 나 아직 좀 위험한데. 겨울은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가 참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임겨울. 잘들어. 우리가 뭐 불법적인 일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남녀가 끌릴 때 하고 싶은 일 한 거야. 그러니까 그만 좀 생각해. 바보야. 뭘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냐? 그리고 너 말해봐. 지금 나 앞에 있으니까 좋아, 싫어. 나 보면 좋아 싫어. 그것만 말 해봐.
-그, 그게…
-이것 봐. 답답하게 한다니까? 난 너 앞에 앉아 있어서 좋아.
달랑달랑 테이블 아래에서 그네처럼 흔들던 겨울의 두 다리가 힘 있는 건오의 다리에게 잡힌다. 흡- 맥주를 마셔야겠다. 술이 더 취하면 덜 떨릴 거야. 생각하며 맥주잔에 다시금 손을 뻗는 여자가 꽤나 귀엽다 생각한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맥주잔을 일부러 뺏는다.
-대답. 대답하면 줄게. 좋아, 싫어?
울상인 여자가 입술을 꽉 깨물고 원망스럽다는 눈초리로 말한다.
-그, 싫다, 좋다는 아니고… 설레요! 그래서 떨려요! 근데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근데 건오님은 잘생겼고, 그러니까 이런 일 많이 겪어봤을 것 같고, 저보다 더 예쁘고 어린 여자애들 많을 텐데 왜 저랑 이러고 있는 지도 모르겠고, 근데 직장에서도 어쨌거나 일로 엮인 분이니까 이래서는 안 될 것도 같고, 그래서 싱숭생숭해요. 됐어요?
그러니까 빨리 내 맥주 내놔요- 하고 겨울이 건오의 한 손에 들린 맥주를 되찾는다. 건오는 깨닫는다.
얘 앞에 있으면, 웃긴다. 재미있다. 건오가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큭큭거리며 조용히 웃기 시작하다 웃음을 주체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기까지 한다.
겨울은 의아하다. 뭐야, 취했나 봐. 왜 저래?
-임겨울, 나 너 마음에 들어.
한 번만 더 말하는데- 나 이런 적 처음이고. 너보다 예쁜 여자 내 눈에는 없거든?
딱 너다. 딱 너가 내 취향이라고. 그리고,
건오의 다리가 겨울의 다리에 더욱 가까이 붙는다. 겨울은 도망칠 수 없이 갇힌다. 발 끝에서부터 뜨거워, 겨울은 그만 간지러워진다. 따가워 간지러운, 뜨거움.
-나, 너 지금도 원해. 너도 그것만 생각해. 너 지금 나 원해, 안 원해.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어 겨울은 그만 말 없이 건오의 눈만 쳐다보고, 그런 겨울의 눈빛을 건오가 형형하게 맞받는다. 왁자지껄한 강배시 토요일 저녁 8시의 맥주집, 유일하게 조용한 테이블의 두 남녀는 어디로 가게 될까.
사진 출처: 배인혁 인스타그램(@inhyuk__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