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이번 장르는 로코 7

(7) 정운은 큐피드? 겨울이 녹는 중

by 라화랑

7.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누나. 둘 다 그러고 만 거야? 아 끝을 알려줘야지!


복실복실한 파마머리의 화려한 체육복 복장을 한 남자. 웬만한 여자보다 눈이 큰 또렷한 쌍커풀을 가진 정운이 호루라기를 두 손으로 휘휘 돌리며 겨울에게 묻는다.


-학교에서는 누나라고 부르지 말랬지. 요게 아주, 너 자꾸 그러면 잘라버린다.


정운의 큰 키 때문에 까치발을 들었지만, 위엄을 잃지 않겠다는 듯 짐짓 엄격한 목소리의 겨울이 정운의 머리에 아프지 않은 딱밤을 때린다. 그에 맞추어 아이고, 나 죽네- 정규직이 비정규직 가지고 협박하네- 부러 오버 섞은 장난을 치는 남자가 체육관 안쪽, 겨울과 함께 단 위에 걸터 앉아 있다. 방과 후 오후 2시 40분. 겨울은 수업을 마치고 일주일에 세 번 학교를 찾아와 강사로 일하는 정운을 자주 찾는다. 뭐 챙겨줄 것 없나- 하고. 정운에게 체육 강사 지원서를 이곳에 넣으라고 추천한 게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만 때려! 내가 아직도 고1인 줄 아나본데, 나 이제 다 컸거든? 허. 참. 지난 주에는 그 누나, 홍대 별빛 어쩌구, 거기 알지. 거기 진짜 음악만 들으러 갔거든? 근데 여자들이 어떻게 알고- 날 가만히 안 두더라니까. 이렇게 인기가 많아요, 다들 내가 좋다는데, 어떡해? 뭐 좀 잘 놀다가- 으아악, 아 그만 때려! 진짜 아파!


-니가 아직 덜 큰 건 확실하다, 아휴. 너 책임감 갖고 착실하게 살라고 여기 지원서 넣으랬더니- 그 돈으로 주말마다 뭘 하고 다닌다고? 이리와 임마. 넌 내가 내 준 수학 숙제 하나도 안 할 때부터 알아봤어. 확 그냥, 딱 대!


요리조리 피하는 정운이 익숙한 겨울이다. 니가 몸만 컸지, 아직도 고등학생 같은 걸 어떡하냐고. 한숨을 쉬며 이제 누나도 삭신이 쑤실 나이라 그만해 준다 외치고 겨울이 가쁜 숨을 내쉰다. 오, 나도 그럼 항복-을 외친 정운이 금세 푸들처럼 반짝이는 눈망울을 달고 두 손을 든 채 여유롭게 여자의 바로 옆에 앉는다. 체육관 바닥에 털썩 앉아버린 두 남녀. 남자는 턱을 괴고 흐으음- 부러 길게 소리를 내며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여자는 뭐 왜 임마. 재수없게 그만 쳐다봐. 라며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거친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둘 중에 누구랑 사귀는데.

정운의 물음에 겨울이 갸우뚱거린다.


-응? 둘 다 안 사귀는데. 결론이 왜 그렇게 났냐?


-누나 성격에 싫은 남자를 굳이 나한테 고민까지 털어놓아가며 데리고 있을 리가 없거든. 누나 기억 안 나? 내가 스무살 되자마자 누나한테 사귀자고 찾아갔을 때? 와, 나 진짜 상처. 어떻게 고백하는 남자 앞에서 그렇게 호탕하게 웃어버릴 수 있냐. 내가 그래서 누구한테 먼저 고백을 못 해요. 완전 트라우마, 흑.


-야, 그게 그거랑 같냐? 너 같으면 친척 동생 친구랑, 그것도 대학생때 과외했던 학생이랑 사귀고 싶겠냐? 말했잖아. 넌 그냥 성인 여자를 니 사춘기 시절에 가까이서 본 게 나라서 연애 감정이랑 헷갈린 거라고. 정신 차리라고 누나가 교육 다시 해 줬니, 안 했니.


-아니거든요. 그거랑 같거든요. 아 몰라 흥칫뽀로로로롤뽕 뽀로로 안경 빼고 디즈니 월드에 놀러갔다가 뽀로로 아니라고 뽀롱뽀롱 뽀로로 노래 불렀다가 추방당한 그런 거야.


아, 유치해 죽겠어. 니가 왜 스물 다섯이냐. 너 열 다섯 아니냐. 아니다, 그 정신상태면 우리반 애들이랑 말 통할테니 열 살로 하자며 겨울이 빈정거린다. 정운은 쳇- 하며 팔짱을 끼고 반대편으로 휙 돌아버린다. 겨울은 얘 또 연기한다며 야, 왜이래. 어깨를 몇 번 흔들어댔지만 정운은 꿈쩍도 않는다. 그제서야 겨울이 엇, 나, 아무리 그래도 이제 다 큰 애한테 너무 상처되는 말을 해 버렸나- 돌이켜본다. 여전히 겨울을 보지 않은 채 뒤돌아선 정운의 등에 톡톡, 겨울이 어색하게 검지 손가락으로 비밀번호 해제하듯 두드린다.


-야, 야아. 삐졌냐? 아유 또 뭘, 삐지고 그래애. 미안해. 미안. 응?


어린 아이 달래듯 부둥부둥- 아이고 우리 정운이 착하기도 하지, 우리 정운이 귀엽기도 하지, 하며 겨울이 박수를 짝짝 친다. 그 때, 휙 돌아보며 겨울에게 가까워지는 정운이다. 겨울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정운때문에 중심을 잃고 휘청여 뒤로 몸이 기울고, 정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만큼 더 앞으로 겨울을 제 팔 안에 가두어버린다.


기울어진 두 사람, 그리고 그만큼 더 느껴지는 숨소리. 이게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겨울을 보고 정운이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히 속삭인다.


-지금은 어때. 나 지금은 이만큼 컸는데. 이젠 좀 위험한 것 같지 않아, 나?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 소리는- 겨울의 것이, 아닌가보다. 정신을 차린 겨울이 인상을 팍 쓰며 정운을 두 손으로 확 밀쳐버린다. 꺌꺌거리며 누나 표정 진짜 대박을 외치고 배를 잡고 웃는 정운을 겨울이 니가 아직 덜 맞아서 그래, 하고는 인디언 밥마냥 등짝을 쾅쾅 때려버린다. 아나, 윤정운 진짜 열받게.


-야, 누나 간다. 내가 뭘 믿고 너한테 이런 얘기를 했니- 어휴.


일어서려는 겨울을 다시 앉힌 정운이 아 미안하다며 웃음이 어린 눈물을 닦고 말한다.


-봐봐, 누나. 나 같이 누가봐도 아닌 남자가 누나 선을 넘으면 바로 정색하잖아. 근데 두 남자들에게는 전혀 안 그러고. 누나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해. 근데, 둘 다 알아보는 것도 좋긴 한데- 둘 다 일로 관련되어 있다며. 그럼 한 명 정해서 알아보는 게 낫지 않겠어?


쩝, 그러고 보니 그렇네. 인정하기 싫지만 끄덕이는 겨울이다.


-그러니까. 둘 중에 누구한테 마음이 더 있는 건데? 흠, 보자. 어- 아 그렇게 해보자. 나랑 누나랑 둘이 친하지? 근데 두 사람은 그런 걸 전혀 모르잖아. 그럼 둘 중에 누나랑 나랑 어깨동무하고 지나가는데 두 사람이 그걸 동시에 봤어. 누구한테 먼저 가서 그런 사이 진짜 아니라고 해명하러 갈 거야?


-오, 그 드라마에서 나오던 질투 작전 같은 거야? 집에서 넷플릭스만 보던 짬바가 나온다? 의외로 로맨스 영화만 주구장창 보더니. 대만이었나, 니가 좋아하는 영화 그 있잖아. 그런데서 나오는거냐? 가만히 보면 나보다 웬만큼 더 섬세해.


니가 무슨 일로 나한테 쓸모가 다 있냐며 겨울이 정운의 머리를 쓱쓱 강아지 칭찬하듯 쓰다듬는다. 정운은 그런 겨울의 손길을 익숙하다는 듯 얌전히 받는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는 칭찬이 부족하니, 두 손으로 해달라며 다른 한 손도 자신의 머리 위에 턱 얹어놓는다. 겨울이 얘가 참- 막내 동생 키우는 기분이다며 그러자 그래, 하고는 양손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쓰다듬어준다.


그런 정운의 눈에 보이는 두 남자-
체육관 문 밖에서 정운과 겨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두 남자의 눈길이 차례로 정운과 마주친다. 정운은 직감한다. 저 둘이구나. 그리고 눈이 마주칠 때, 기재에게는 윙크를- 건오에게는 메롱을 선사한다. 그리고는 겨울이 돌아가지 못하게 나랑 더 놀아달라 일부러 칭얼거린다.



-나랑 공놀이 해 줘, 누나. 어렸을 때 처럼.

-어휴, 알았다. 알았어. 아직도 애야.


-누나가 여기 꽂았으니까, 책임져어. 고등학교 때부터 내 수학 점수 책임진다 해놓고 나 수능 말아먹었잖아. 그러니까 as.


-야, 그건 니가 맨날 숙제 안 하고 놀러다닌 탓이지! 이게 어딜 과외 선생님을 탓해? 내 커리는 완벽했거든?


-몰라 몰라. 커리는 카레야. 인도 카레. 태국 카레. 뿌빳뽕커리 뿡뿡!


누나. 내가 왜 대만 영화 좋아하는 지 알아? 첫사랑이라서. 첫사랑이 안 이루어지까. 그게 너무 나 같아서. 나는 자꾸 눈물이 왕왕 나더라고. 그래서, 그 중에서도 갑자기 십 년 뒤에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찾아 보곤 해. 그래서 다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는 그런 첫사랑 영화 있잖아. 내 첫사랑은 눈 앞에 계속 아른거리는데, 나는 진짜 아니라 하고. 나는 자꾸 동생이기만 하고. 내 앞에서 다른 남자들한테 관심 생겼다고 고민이나 하고 말야. 그럼 난 어떡해. 그러니까, 지금 이런 작은 심술은 용서해 줘. 어차피 난 누구한테 마음이 기울었는지 알 것도 같거든. 사랑에 빠진 걸, 자기만 몰라. 바보 누나. 바보 임겨울. 그리고 더 바보 윤정운.


진 사람이 헤드락 걸기라며 죽기 살기로 농구를 하는 두 사람이 자뭇 아름다워 보인다. …밖에서는 적어도 그렇다. 고까운 감정의 두 남자가 멀뚱히 서서 각각 윙크와 메롱을 받고는 화를 참지 못한 채 욕을 각자 내뱉는다.


-저, 저 미친 새끼 누구야 저거.


드르륵-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에 든 드릴을 작동시키는 건오와


-왜 저 강사랑만 저렇게 친한 거지? 어…그럴 리가 없는데. 임겨울이.


언짢은 듯 손에 든 볼펜을 딸깍딸깍,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는 기재가 눈이 마주친다.


-저, 그, 제가, 체육관을 공사하기 전에 꼭 봐야겠어서요. 그, 임겨울네 선생님이시죠? 같이 들어가 줍시다. 좀.

건오의 말도 안 되는 핑계에 기재가 정말 마침 잘 되었다는 듯, 그럼 그러시라며 체육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연다. 비장한 두 남자가 동시에 쳐다보고 부르는 건,

-임겨울!
-겨울아?
깜짝 놀란 여자가 농구공을 떨어뜨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운이 파항항 맑게 웃으며 아랑곳 않고 겨울의 얼굴을 부러 수건으로 닦아준다. 누나, 땀 많이 흘렸어- 하고 물이 든 텀블러도 건넨다. 어어, 고마워. 하며 물을 받아먹자 두 남자가 각기 탄식을 금치 못한다.

정운은 이 모든 상황이 웃기기 그지 없을 뿐. …약간 아픈 자신의 마음은, 언제나 뒤로 하고. 아직은 아니니까. 아직은. 하지만, 곧 자신도. 누나를 데려올 만큼 크면.


건오가 벅차오르는 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체육관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기재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갑자기 학년 회의가 생겼다며 겨울에게 10분 뒤에 연구실에서 보자고 하고 마찬가지로 체육관 밖을 나간다. 정운이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 겨울에게 묻는다.


-자, 내가 다 만들어 줬다. 이제 어디로 갈래, 누나? 아- 나한테 와도 참고로 무척 환ㅇ….으악! 아 그만 때리라고! 아프다고!
수건으로 먼지나게 풀썩 맞고 있는 정운의 눈이 왜 이상하게 웃는데도 슬퍼보일까. 그리고 겨울은, 누구에게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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