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이번 장르는 로코 8

(8) 건오와 기재, 거울에 비친 겨울의 속마음

by 라화랑

8.


-겨울아, 넌 어때. 넌 뭘 하고 싶니.

겨울이 거울 속의 겨울에게 묻는다. 얄밉게 와하하 웃어버리는 정운을 농구공으로 몇 번 저격하고 나서야 겨울이 속 시원한 듯 체육관 문 밖을 나섰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정리하러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보이는 건 자신. 학교에서, 내가 내 얼굴을 이토록 자세히 본 적이 있었던가- 겨울은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3층 복도 끝 여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 멀거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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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기 일쑤였다. 그간 겨울의 연애 전적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만, 겨울 주변의 세상은 겨울을 쉽사리 사랑에 빠지게 놔두질 않았다. 여중, 여고, 여초과에 진학하여 여자가 득실거리는 학교에 발령이 났으니. 좋은 사람이라며 간간이 들어온 소개팅도 겨울에겐 맞질 않았다. 그런 겨울에게 갑자기 자신이 좋다며 들이닥친,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두 남자는 풀 수 없는 영원한 문제를 가지고 찾아온 악마들이었다.
-도대체, 뭔데. 사랑하는 게! 사귄다는 게 대체 뭐길래, 저러냔 말야.



역할이 주어진다면 오히려 잘 수행하는 우리의 모범생은- 자율적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몰래 행하던 연애라는 것에 좀체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드라마나 책 속에서 보이는 연애물이라는 장르에 들어갈 수 없는, 캐스팅 오디션에 실패한 연기자같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동화나 성장물에 가까운 사람이지, 로맨스나 치정 멜로, 로맨틱 코미디에는 도무지 쓸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굳건히 믿어가며.



그래서 낯선 자신의 모든 행동이 두렵다. 무섭다. 예측할 수 없는 마음가짐에 자신도 어찌할 줄 모르고 고장이 잔뜩 나버린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 않는 어벙한 말이나 해대고 앉아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싫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을 어쨌거나 해야만 할 때. 의외로 냉정해져야 하는 순간에 거침 없이 마음이 차가워질 수 있는 그녀가 속으로 체크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한다.

-건오, 건오, 건오. …알 수 없단 말야. 지가 뭘 알고 내가 취향이래. 날 뭘 알아?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 자꾸만 생각나는 장면에 겨울의 두 뺨이 금세 발그레해진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뜨거움과 욕망, 그건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의 결정체같은 것이었다.

건오와 함께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다. 생각할 사이에 이미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그리고는 뒤늦게 이성이 뒤쫓아와 ‘야, 너 후회 안 가져갔더라- 여기 있다!’ 하며 뒷북을 치곤 한다. 후회의 종류는, 계획 없이- 미래 생각 않고 일을 벌린 것에 대한 것이다. 겨울은 그리하여 건오가 두렵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깨부셔지는 기분이 든다. 혼자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어떤 모든 것에 대한 행동들을 건오와 함께라면 대책 없이 산뜻하게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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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겨울은 건오의 손을 덥썩 먼저 잡아버린 적이 있다. 대범하게 자신만이 정해놓은 통금 시간을 어기면서 음악이 쿵쾅거리는, 평소에 갈 생각조차 않던 스탠딩 펍에 가본 것도 건오 덕분이다. 눈이 동그래진 겨울을 보고 건오가 킥킥거리며 겨울에게 손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라며 볼에 뽀뽀를 남겼지.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가볍게 리듬이라도 타 보라기에- 어기적 거렸더니 그걸 보고 웃겨 죽겠다며 건오가 배를 잡고 웃었다. 화가 나서 넌 뭐 잘 하냐고 도끼눈을 떴던 겨울은 건오가 가르쳐준 춤으로 신나게 새벽 3시까지 다른 사람들 무리에 섞여 춤을 추었다. 더 늦게 있다가는 내일 일에 지장 생기겠다며 끌고 나온 건, 의외로 건오였다.



-너, 더 있으면 내일 칠판 앞에서 존다? 애들이 자는 건 봤어도, 선생이 졸면 안 돼지.

-웃기시네! 아니거든요! 밤 새도 수업은 따로 할 수 있거든요! 아 또 열받게 하네?



바락바락 화내는 겨울의 뺨을 꼬집는다. 그리고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고, 집 앞에서 밍기적거린다.



-진-짜, 진짜 손만 잡고 잘…


-안녕히 계세요, 즐거웠어요. 그럼 이만!


-아, 야야야.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나 여기까지 데리고 와줬으니까, 하나만 해 주라.


-무…뭘요. 뭐! 나 졸리니까 빨리 말해요.


-성질 급하게스리. … 여기. 여기 뽀뽀.


그럼 겨울은 못 이긴 척 건오의 왼쪽 뺨에 뽀뽀를 하려 가까이 가고, 그는 그런 겨울의 얼굴을 냅다 붙잡고 입술을 꼭 붙여버린다. 벌렁벌렁- 겨울은 건오와 있으면 심장이 뜯겨질 정도로 대차게 뛰어 숨을 쉬기 힘들다.


...그리고 나서 일상에 지장이 없으면 참 좋겠다만, 다음 날 겨울은 중요한 서류를 교육청에 보내지 않고 교실에서 졸다가 교감 선생님의 불호령을 들었다. 요새 젊은 애들이 이래서 문제라며. 죄송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에서 나오면, 멀쩡하게 장비를 옮기던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럼 겨울은 괜히 건오가 얄미워져 윙크를 건네는 그의 눈길을 무시하고 교실로 들어가버린다. 건오는 그런 겨울의 태세전환이 어이가 없고, 벌컥 교실 문을 열고는 화를 낸다.



-너, 뭐야. 어제는 그렇게 재미있게 잘 놀아놓고 나 무시하는 거야? 와, 역시 배운 사람이라 안 배운 사람 갖고 노는 게 쉬운가 보지? 넌 좋겠다? 그렇게 스위치가 니 맘대로 다 왔다갔다 해서? 넌 그게 문제야. 즐길 거 다 즐겨 놓고, 이상한 생각이나 판단 지 맘대로 다 하지. 그리고는 앞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그렇게 판단하잖아.



…건오에게 무작정 달려갈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붉게 물들었던 겨울의 두 뺨이 금세 찬 물이 닿아 하얘진다. 건오는 스스로 모르겠지만, 겨울이 느끼는 건오는 단순함에 대한 강요가 깔려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 설명하지 않고 혼자 판단해버리려는 겨울도 어느 정도 잘못했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여긴 직장이고- 어제 늦게까지 놀다가 어떤 업무 하나를 놓쳐서 교감에게 된통 깨졌기에 당신이 좀 미워서 모른 척을 했다고 바른 대로 고했다고 한들 그의 반응은 비슷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식이겠지.



-뭐? 야. 임겨울. 나쁘면 나쁜 거지. 근데 그게 왜 날 무시하는 것까지 가냐고. 허- 거기 원인을 찾아내서, 그게 뭐, 나니까, 다 내가 잘못했다고 그새 나를 싫어한다고? 뭔 기분을 그렇게 배배 꼬아서 생각을 표현해내냐. 그냥 기분 나빴다 그래.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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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그러나 끌림. 건오는 마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의 히스 레저를 닮았다.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 아무것도 닮은 것이 없기에 선사할 수 있는 극강의 즐거움. 그리고 아주 짜릿한 느낌.


건오는 겨울에게 감정이다. 완벽히 현재의 감성.
그렇기에 당장 내일 건오가 겨울을 자신의 취향이 아니게 되었다며 버릴지도 모르겠고, 자신 또한 내일부터 건오에게 온갖 새로운 경험도 정도껏이라며 권태를 느낄 지 알 수가 없다. 무엇도 예측할 수 없기에 오는 불안과 가질 수 없는 확신.



겨울이 화장실 거울에 비친 복도를 멍하니 쳐다본다. 마침 자신의 교실에 학습지를 공유하러 온 듯, 손에 인쇄된 종이 한 뭉터기를 들고 가는 기재의 뒷모습이 보인다. 참 그 답다, 겨울은 생각한다. 모두에게 친절한 줄 알았으나- 사실은 자신을 좋아해서 자신에게만 다정했던 남자- 기재라면 겨울은 절대 불안을 느낄 리가 없다. 늘 그렇듯, 기재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런 기재 곁에서 겨울도 스며든 다정의 향으로 그를 소중히 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정된 사랑과 연애, 그라면 가능하겠지.



그런데 왜 자꾸 망설여지느냐면, 그건 그놈의 감정 때문이다. 분명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하다. 겨울에게 고백한 뒤로 기재는 지금까지 겨울을 눈치채지 못하게 챙기고 아꼈던 지난 모든 날을 청산하듯 대놓고 오로지 그녀만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달라진 기재에게 가끔 바르르 떨릴 때가 있다. 카페 음료 주문벨처럼, 잔잔하되 자글자글하게. 엇, 좀 떨리는데 하며 반짝거리던 심장은 이내 기재와 편히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평온해진다.


다만 평온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말을 편히 내뱉을 수 있다. 옛날부터 친했던 두 사람이라 공간과 음료만 주어진다면 스물 네 시간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 그렇게 방 안에 가둬놓고 스물 네 시간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연인이거나 사랑이라면 무언가를 더 하고, 둘만 있는 게 떨려 죽어야만 할 텐데 그렇지 않을 것만 같다. 그저 즐겁게 내 속까지 다 내보였다며 후련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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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연인이나 사랑이 아니고 그저 우정 아닌가. 흠. 그래도, 떨리긴 했으니- 가능성인가.


겨울은 기재와의 어젯밤 통화를 떠올린다.


[...뭐? 넌 그게 꿈이라고? 자연사가? 임겨울, 인위사 못 하게 내가 옆에서 막아야겠네.]


[아 난 진지해! 난 가끔 삶이 버겁거나 따가울 때가 있단 말야. 그러니까 내가 생을 끝까지 다 해낸다면, 그건 진짜 박수칠 만한 일이야. 오빠는 뭐 없어?]


[어, 꿈 말이지? 있지.]


[뭔데, 말해봐.]


[니가 너무 이상한 걸 말해서 나도 같이 이상해져야 하나 싶다. …아아 알았어 안 놀릴게. 음, 나는 말야. 네 방에 놀러가는 거. 그리고 네가 내 집에 놀러오는 거. …일단은 여기까지 작은 꿈이라고 할게.]


[엥, 그게 뭐야. 너무 현실적이야. 좀 나처럼 허황되고 말도 안 되는 이상적인 꿈 없어?]


[내 꿈도 검열해주시는 검열사님- 따라야죠, 예예. 허황되고 큰 꿈이라- 어, 나 그럼 이거 할래. 네가 인위사를 절대 못 하게 내가 옆에 24시간 딱 붙어 있는 거야. 그래서 세상에 이런일이에 24시간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랑꾼 할아버지의 비밀 같은 걸로 tv에 나오는 거지. 이유를 물으면 이 할망구가 어디서 확 나몰래 죽어버릴까봐, 라고 대답해. 그러려면 우리 결혼해야겠다. 그래서 그런데, 겨울아. 나랑 언제 사귀어줄거야?]



이렇게, 기재가 갑자기 자신의 마음을 확 표할 때 겨울은 바르르 떨린다. 하늘을 나는 짜릿함은 아니더라도, 온 몸에 갑자기 벌레가 기어올랐나 싶은 간질간질함이 온 몸을 감싼다. 그럼 겨울은 으억, 엇, 그게, 하고 말을 또 더듬고 말고- 그런 겨울을 그래그래, 하며 진정시키는 기재였다. 나, 그 이상의 뽀뽀나 … 그 다른 모든 일을 그 떨림에 기대어 할 수 있을까. 그걸 모르겠단 말이다.



또한 겨울은 지금까지 잘 쌓아온 우정이 자신의 헷갈림으로 다른 길로 샜다가 깡그리 사라져버리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겨울의 모든 말과 생각을 지루하지 않게 맞받아치며 끊임 없이 깔깔거릴 수 있는 사람을 쉽게 잃고 싶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건오를 선택한다면, 그래도 기재가 자신의 곁에 여전히 똑같은 모양새로 남아 줄까. 그것 또한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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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동안이나 화장실 안에서 자신을 째려보던 여자가 드디어 문을 나선다. 결연한 여자의 눈빛은 무엇이라도 결심한 듯 하다. 입술을 앙 다물고 겨울이 어딘가로 향한다. 발걸음이 빠르고 민첩하다.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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