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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칸스 Sep 15. 2021

어떤 선택을 하든 너의 삶을 응원해

과거의 선택이 오랜 시간 한 인간의 발목을 잡는다. 내가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그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되기보다는 비난을 받고 손가락질로 심판받는다. 그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람 취급당하고, 엄격하게 칼을 들이대는 자들은 이성을 지닌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과연 무엇이 옳을까.




한 사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루어진 몇 가지 소개만 놓고 보면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 몹쓸 인간, 인정머리 없는 사람' 등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 몇 가지 줄이 그 사람의 살아온 모든 삶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태어나보니 많은 자들에게 환영을 받는 이가 있는 반면, 태어나보니 가장 가까운 자에게 버림을 받는 자가 있다. 그 어느 누구도 태어난 환경을 선택할 수 없다. 그저 주어질 뿐이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이 몇십 년 가까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 주어진 환경으로 인해 '세상을 살만한 곳'과 '세상은 잔인한 곳'으로 갈린다. 잔인한 환경 속에서 자라온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자신을 망치게 될 지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아픔을 느끼지 않기 위해 주변의 따뜻함을 차단한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나타나도 일시적이고,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알게 된 순간 떠나가는 자들이 태반이므로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는 자신을 더 고립시킨다. 하지만 잔인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살고자 발버둥 치는 그의 수많은 선택들을 어느 누가 함부로 그를 탓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내린 선택일 수도 있다. 모두가 비난하는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살기 위해 내린 선택일 수도 있다. 모두가 욕하는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피눈물 흘려가며 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여 내린 선택일 수 도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본인은 잘 안다. 그 선택이 본인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아프고 괴로운 것이었는지. 



혹독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들이닥쳐 오는 선택들. 이왕이면 바른 선택이었으면 좋겠지만, 치열하게 고민하고 온 힘을 다해 싸운 뒤 내린 선택이 모두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선택이라도 괜찮다. 다만, 그 선택이 자신을 해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다수가 비난하더라도 한 명쯤은 그 선택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한 명쯤은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

그대가 살기 위한 그 선택,

그대가 행복해지기 위한 그 선택,

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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