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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Apr 05. 2021

귤을 거부할 수 있나요?

저는 못합니다.



코끝이 쌀랑해지는 계절이 오면 역시 귤 생각이 난다. 작고 노오란 외형을 떠올리자 벌써 혀밑에 침이 르르 고인다.


봄이 제철이라는 오렌지는 되려 여름과 잘 어울린다. 오렌지 나무를 가로수로 쓰는 스페인에서는 거리마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린 오렌지가 쉽게 눈에 띈다. 타는 목마름으로 보께리아 시장에서 한숨에 들이킨 그야말로, '생 오렌지쥬스'의 시고 달고 아찔한 맛! '주스'가 맞는 표기라지만 '쥬스'라고 해줘야 왠지 더 신선한 느낌이다. 귤은 침이 고이는 수준이라면 오렌지는 입안 가득 주홍빛 폭포수가 흘러넘친다.


엄지손톱을 푹 찔러 넣으면 손쉽게 껍질이 벗겨지는 귤. 반면 오렌지는 손가락을 찔러 넣을 엄두조차 생기지 않는다. 야무지게 완벽한 구 형태, 농구공에 버금가는 단단함은 과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테이블 위에 놓인 장식품처럼 보인다. 필히 과도를 꺼내와야 하니 귀찮아서 먹기를 주저하다가 포기하게 된다.


웬만큼 균일한 맛을 담보하는 오렌지와 달리, 귤은 복불복 성향이 강하다. 새콤달콤한데 보통은 달콤 쪽이 우세다. 당도가  빠진, 내리 시기만 한 귤은 웬만해서 환영받기 쉽지 않다. 그래서 귤을 까기 전에 그렇게들 괴롭힌다. '말랑해져라, 달아져라' 주문을 외면서 빙글빙글 돌려가며 엄지 검지로 꼭꼭 눌러 마사지해준다. 실제로 한 방송에서 귤을 주무른 전후 당도 측정을 했는데 주무르고 나니 당도가 높아졌다. (이런 류 실험은 100% 믿지 말길. - 전직 방송작가 왈)


"귤 먹어" 했을 때 거절을 다면, 당신은 방금 양치를 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담 없고 친근한 이 과일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을 터. 배가 부르다면 주머니 속에 넣으면 그만인걸.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새콤한 향이 피어오른다. 누군가 가방 속에 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리며 귤을 까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먹어도 유일하게 비난받지 않는 음식 아닐까.


귤을 가장 맛있게 먹으려면 역시 이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엎드려서, 옆에는 좋아하는 책이 책등을 위로 한채 몸을 활짝 연 채 나처럼 누워있을 테지. 손가락이 노래질 때까지 한 없이 입속으로 들어가는 귤의 저주. 부둣가에 널린 불가사리처럼 처참한 그의 잔해는 보일러 바닥 후끈한 기에 벌써 구덕구덕 오그라들었다. 겨울에 살이 찌는 이유는 활동량이 적어서라고 하지만, 귤이란 녀석도 한몫 거드는 게 틀림없다.


즐겨 찾는데도 이상하게 귤은 무르고 썩는 일이 잦다. 오렌지는 그런 일이 잘 없다. 우선 가격에서부터 귤에 비해 고가요, 그래서일까, 한 번 살 때 넘치는 양을 사지 않는다. 귤은 어떤가. 적어도 한 봉지, 본격적인 귤 철이 되면 박스째 사들이게 되는데 그래 봤자 5천 원, 비싸도 2만 원을 넘지 않는다. 두고두고 먹다가 다 못 먹어도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오렌지처럼 존재감이 확실하고 단단한 사람이고 싶었다. 웬만해서는 까 볼 엄두가 안 나고, 일정한 지름을 유지하는 사람. 외부 자극에도 쉽게 무르지 않는 강한 사람 말이다.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갔다. 이제는 만만하게 손이 가는 귤의 품성이 더 끌린다. 강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복잡한 과정 없이 손 내밀면 툭 닿는 그런 사람. 겨우내 냉장고를 열면 서랍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은 적어도 늘 그 자리에 있어줄 것 같은 다정함.


내 생긴 대로 살기보다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구르고 부딪치고 멍들고 때로는 좌절도 하면서 말랑해지고 싶다. 아프지만 더 달아지니까. 그렇다고 귤이 아닌 건 아니니까.








내일, 캐리브래드슈 작가님은 '취준생'과 '공시생'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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