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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Oct 07. 2021

나는 '강남'은 그냥 별로던데

프로 강북러는 강남을 공부했다고 한다


내가 서울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절대' 안 그렇게 생겼다고 하는데(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나는 태어나서부터 결혼 전까지 33년 동안 서울에서만 쭉 살았다. 서울 중에서도 한강 위쪽, 경기 북부에 가까운 한 동네에서 말이다.


초중고대학, 직장도 모두 사대문 근처에서 다녔다. 좁은 골목이 모세혈관처럼 펼쳐져있는 지역에서, 만원 버스와 지옥철을 당연하게 여기며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30대가 되기 전까지 나의 주 무대는 연신내, 종로, 신촌, 합정, 홍대, 상수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강북 안 개구리였다.


대중교통으로 모든 생활 동선이 해결되니 당연히 자차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친정은 아직도 그 흔한 자동차 한 대가 없다.


삼십 대가 넘어 강남이란 신세계를 밟았다.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혀야 끝이 보이는 고층 건물, 공포스러울 정도로 넓은 로, 저질 체력으로 소화하기 힘든 블록 간의 거리. 다들 '강남, 강남'하는데 나는 사람 냄새가 나지 않은 그곳에 웬만해서 가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업무나 모임으로 강남을 찾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부동산에 관심이 없었고, 아이도 없으니 교육열도 나와는 먼 이야기. 여전히 그곳에 애정은 없지만 '사람 만나기에 무난하고 편리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뿐이었다.





한종수, 강희용의 <강남의 탄생>을 읽고 강남이 달리 보인다. '남서울' 혹은 '영동지역(영등포의 동쪽)'이라고 불리던 '촌 동네 강남'이 어떻게 부와 권력, 금수저 상징으로 변모하게 됐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 덕이다.


전후 남침에 대한 공포, 그리고 민주화 물결에 두려움을 느낀 정부는 서울의 중심을 청와대(그리고 주요 정부기관)와 떨어진 남쪽으로 옮겼다. 독재자의 정치 자금 마련, 정치인과 건설사의 로비가 땅값을 부풀렸다.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두고 과열은 더 심해졌다. 막무가내식 건설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참사를 일으켰다. 그러는 동안 강남은 지금의 위치에 서고 카르텔을 형성했다.


그리고 새롭게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



반포에는 '내시촌'이 있었다?

1980-1990년대에는 서울은 주택 부족, 경기 과열로 아파트 분양 청약 창구가 북새통이었다. 정부는 '국민주택 우선 공급에 관한 규칙'에 '불임 수술자 우선 제도'를 새로 포함했다. 정관수술을 받은 이들에게 우선 분양권을 줬다고. 지금은 아이를 많이 낳아야 청약 혜택을 주는데! (p.73)


명문고의 강남 이전 목적은?

5대 공립과 5대 사립-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 중앙고, 양정고, 배재고, 휘문고, 보성고- 그리고 주요 대학 캠퍼스를 교통난 완화를 이유로 강남으로 대거  이전했다. 운동권 세력이 약했던 '여자대학'은 지방 캠퍼스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부의 의도를 증명해 준다. (p.95)


금싸라기 아파트의 비밀

1975년, 민간 기업과 달리 당시 주택공사가 건설한 아파트는 대부분 5-6층이었다. '자라나는 아이들 정서에 문제가 있다'라는 이유 - 그들의 고집 덕분에 저층 아파트들은 상대적으로 넓은 대지 지분을 가지게 되었고 후일 금싸라기 아파트로 변모해 먼저 재건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p.125)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비밀 공간이?

잠실, 송파 일대가 강남으로 '합류'할 수 있게 만든 주인공은 '아시아 선수촌'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다.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설계자 조성룡은 아파트 주민들이 죽을 때 대비해 엘리베이터 안쪽 벽면을 열면 관을 눕혀 내려올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한다. (p.151)

: 장례문화의 변천이 엿보이는 부분. 나는 이런 깨알 같은 재미를 발견하면 책에 반한다.



강남의 부동산은 왜 그렇게 강력할까?

<강남의 탄생> 저자가 분석한 이유 (p.218)


1. 강남 부동산 소유자들이 정부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1급 이상 고위 공직자 20~30%가 강남에 거주. 정부 정책 결정과 집행, 배타적인 수사권 가지고, 입법 책임지는 사람들 상당수다.


2. 빈부격차의 심화는 곧 높은 진입장벽을 만들고, 그들만의 천국으로 구조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강남 판타지가 진입장벽을 굳건하게 만들어.


3. 강남은 현대판 '계급 세습 구조'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다. 금수저 상속 구조 정착. 금수저를 재생산하는 두 축은? 부동산과 교육이다. 강남 출신이 유리. 최근 서울대 입학생과 행정고시 합격자 30-40퍼센트 강남 출신. 지방 부자도 강남에 투자.



이 책을 읽을 때 지도는 필수다. 거미줄 같이 복잡한 서울의 지역, 고속도로와 대교(옛 지명을 포함)가 수도 없이 등장하는데 안 그래도 길치인지라 머릿속으로 그림이 안 그려져 혼났다. 한 땀 한 땀 정보를 찾아가며 뜨개질하듯 읽느라 애썼지만, 빨리 읽어서 또 무엇하랴.


현대사를 가장 흥미롭게 공부하는 방법 중 하나, <강남의 탄생>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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